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su Feb 25. 2023

삶의 사계에 대하여

영화 「리틀 포레스트 2: 겨울과 봄」

「리틀 포레스트 2: 겨울과 봄」 편에는 다른 계절의 풍경이 많이 나온다. 겨울에는 수확을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이전의 계절에 절여두고, 말려두고, 재워둔 음식을 꺼내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장해 둔 음식을 꺼내 먹다 보면 자연스레 그 계절이 생각난다. 겨울은 한 해를 돌아보며 지나간 계절들을 회상하게 되는 계절이다.


모든 작물과 음식에는 적당한 때가 있다. 싹이 나고 꽃이 필 때 날씨가 너무 추워서는 안 되고, 햇볕을 받아야 할 때 장마가 겹쳐서도 안 된다. 정해진 때에 정해진 씨앗을 심고, 해와 바람과 비의 상태를 살피고, 자주 들러 잡초를 뽑아주어야 한다. 요리를 할 때도, 재료와 조미료를 일찍 넣거나 늦게 넣는 것만으로도 음식의 맛과 식감이 달라진다. 불을 떠나지 않고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릇에는 음식이 담기고, 음식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다는 말을 나는 참 좋아한다.


올바른 마음들을 때에 맞게 심으며 살았다고 생각했다. 당장 피고 지는 꽃 같은 것에 열중하기보다 열매와 나무가 되려고 했다. 이십 대라는 흙밭에 화려함과 성공 같은 것보다는 성찰과 반성을 심었고, 나의 열등감이나 질투 같은 감정을 잘 살피어 때때로 뽑아주었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나면 곧, 주변에는 그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자라나곤 했다.


사람들이 많을 때도 있었고 적을 때도 있었다. 더없이 친한 사람과 별 이유도 없이 멀어지기도 했고, 한동안 연락이 없던 사람과 다시 가까워지기도 했다. 사는 곳이 달라진다거나, 소속이 변경된다는 이유로 금방 멀어지는 사람들도 있었고, 내가 어디로 떠나도 항상 같은 곳에서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애정과 관심을 듬뿍 쏟았지만 나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고, 내가 신경 써주지 못했지만 항상 나를 챙겨주고 안부를 물어봐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나는 그 사람들과 기억들로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을 떠올린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부끄러워한 일, 자랑하지 않아도 될 것을 자랑한 일. 미워하지 않아도 될 사람을 미워한 일, 고맙다고 해야 할 일에 고맙다고 하지 못한 일들을 천천히 씹는다. 씁쓸하고 아린 맛이 서서히 은은한 단맛으로 변한다.


그렇게 지난 이십 대의 사계를 복기하다 보면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들뿐이다. 나는 지금 아주 긴 겨울을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이전 17화 사랑의 복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