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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zue Mar 29. 2024

마르크스와 니체의 이야기 (시리즈 4/6)

현재는 '과거'보다 '미래'가 더 가깝다. 미래의 흔적, 자본주의와 AI


1. 계몽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독일 프롤레타리아 운동가들마르크스는 엥겔스와 영국으로 가 의인동맹 운동가들을 만난다. 그리고 국제적인 혁명조직을 만들려고 브뤼셀으로 돌아간다. 


이때 브뤼셀의 <공산주의자 통신위원회>와 함께 *<공산주의자동맹>을 경성한다. 1847년 6월 런던에서 열렸고 이주노동자들은 프랑스, 독일, 영국, 스위스와 독일 이주노동자 중심이었다.


* 의인동맹을 런던으로 옮기니 런던운동가들(바이틀링지지자)이 마르크스 와 통합해 만들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파리대표로선출)가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철폐를 외치며 선언문을 의뢰하였고, 여기서 *'공산주의'라는 함께 생산한다는 의미가 코뮨의 의미를 떨어트려 진보적 사회 진취는 어디를 중심으로 사유할 것인가가 문제되고 있다. 






*코뮨과 공산 중 마르크스는 왜 '공산주의'로 썼는가. '사회주의'가 아닌?


이는 1887년에 당시 '사회주의'는 


1. 공산주의자들 (유토피아를조직하고자 하는 사람) 


2. 사회적 문제를 제거해주겠다는 사람들 의 의미했다. 

어쩄든 이 말을 쓰면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자신의 과업이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혁은 친숙한 것에서 괴짜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2.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퍼블릭은 무엇인가? (용감한가 그렇지 않은가?)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질의에 대한 응답'이 첫 관문이다. 혁명의 문답(비밀적인) 것들이 19세기 운동가들은 쉽지 않고 프로이센 때는 꽤 문제가 되었다. 강령은 공개적이었다.


철학사에서 '감춤없는 삶''숨김없는 삶'은 참된 삶의 기본적인 특징이었다. 플라톤은 진실하다는 것을 수치스러운 행동이 없는 행동, 언제나 타인의 보증과 보장 아래서 이루어지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고 세네카 역시 진실한 삶이란 타인의 시선 앞에 자기를 드러내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견유주의자들 (사회를 검열함으로써의 벌거벗음)

"우리는 카드를 가 보여주고 카드 놀이를 할 수 있다"라고 했다. (도덕적이고 관습적인 위선들을 까발리기 위한 말의 의도, 진실의 증언자)





3. 프랑스 부르주아 nation (계급적) 균열에 관하여 우리 모두 인류는 형제다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지만 정황적으로 선언문에 드러나고 있다. 


마르크스는 '가치'를 유령적인 것이라며, 감각적인 초감각적 사물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가치 형태란 한 상품의 가치가 다른 상품의 몸을 빌어 유령적으로 마주 선 것이다.


1/8 부분의 기념비적 성격 중 *'유령적 의식'과 닮아 있다. 이는 1 시리즈에서 말했듯 미래에서 현재로 온 '유령테마'를 말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유령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하지만 대체로 부정적으로 쓰인다. 다르게 '바울의 혁명적 정신'으로 변형된다. 





4. 결국 캘린더에서 보이는 과거 - 현재 - 미래는 허물어진다. 왜냐면 미래는 현재로 끌어들이고 새로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성이란'시간성'이다.


현대는 모데르네 '새로운news'의 뜻을 가지고 모든 시대는 이전 시대와 비교해서 새로운 시대 일 것이다. 다른 시대에 비해 미래는 현재와 가깝다는 뜻이고 새로운 것이 더 낫다는 말은 '발전주의'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부르주아계의 끊임없는 진보와 혁신의 존립을 말한다.  여기서 화폐가 매개화됨으로써 신비적인 것들은 전부 깨져 버린다. 




생산도구들의 혁신과 교통의 발달은 "모든 민족들을 가장 미개한 민족들까지도 문명속에 끌어"넣었다. 선언문은 4가지로 말한다.



1. 생산과 소비(경제) 영역에서, 생산과 소비는 서로 자극하며 대공업의 발전과 세계 시장의 창출을 가져왔다.
2. 정치영역에서,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을 집중시키고 인구를 집중시키고 소유를 집중시킨다. 
3. 사회의 영역에서 부르주아지는 봉건적, 가부장적, 목가적 관계들을 파괴한다. 
이를 "부르주아지는 신앙적 광신, 기사적 열광, 속물적 감상 등의 성스러운 외경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집어 넣었다"고 한다
4. 정서의 영역에서. 새로운 상품은 새로운 욕구에 상응하고 새로운 욕구는 또한 새로운 상품을 낳는다.
5. 매우 역설적이게도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자신의 매장인을 만들어낸다.




쉽게 말해 부르주아가 자본주의를 생성하지만 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조직화로 유기적으로 생성된 것이다. 그렇기에 파업이 깨지며 교통 연결 단결을 말하며 자본주의의 투쟁의 성과는 '노동자들의 확대된 단결'을 승리'진전'되었다고 말한다.


임금이 오르거나 행동의 결과보다 단결 자체(운동)이 자본주의를 부순 승리였다는 것.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필연적으로 계급으로 단결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만들고, 또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들을 폭력적으로 폐기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 생산관계들과 아울러 계급 대립의 존립 조건과 계급 이반을 폐기하게 될 것이고, 또 이를 통해 계급으로서의 자기 자신도 폐기하게 될 것이다."



니체의 말대로 사자보다 아이가 곧 자본에서 우위인것은 성을 부수면서도 웃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히틀러는 웃지 않는다. 슬픔에 입각한 비웃음. 혁명의 마지막 정신을 말하길 프롤레타리아트는 '상실을 상실해야 한다' '결핍을 결핍하게 하라.' 인 것이다.






없는 것에 매달리면 그것은 쎄진다. 없는 것들을 결핍하게 하는 것. 끝으로 프롤레타리아는 그렇게 재산이 없어졌다. 결핍하게 하겠다고 한다. 이후 사적 소유가 철폐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족은 사실상 해체되어있다. 





*'현대의 가족'은 "자본에, 사적 수익에" 근거한다. 이는 부르주아들은 위선적인 '기념'들을 두고 있는 가족의 표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은 프롤레타리아를 챙기지 않는다. 같은 시민이지만 부르주아만 챙긴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는 안갖고 있는 것을 버린것' 즉 공산주의 혁명은 가장 철저한 결별인 것이다.





*매력없는 부르주아지. "공산주의 혁명은. 가장 철저한결별'이다. 마르크스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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