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플라톤과 화이트헤드의 이야기

플라톤의 서양 철학적 사유와 <티마이오스> 창세기의 창조설, 신화적 양식

by hyejoocontext



pexels-lazaro-rodriguez-jr-6565036.jpg


생성되는 모든 것은 필연적인 원이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된다. 원인이 없이는 생성될 수 없다. 무엇을 만드는 사람이던 간에 언제나 그 형태와 성능에 있어서는 '본'이 있다.


플라톤의 우주발생론은 기본적으로 제작의 이미지다. 어떤 사람이 무언갈 만들떄에는 소재와 그것을 만들수 있는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플라톤의 원인론에 해당하는 것은 이 과정을 설명한다. 제작자는 '데미우르고스' 계기는 본이 되는 '형상' 그리고 원로는 '질료'이다. 함축된 이 세 가지의 요소는 제작된 이미지로 만들어 진다.


가장 좋은 것을 위해서 말하는 훌륭한 사람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바라보면서 말하겠지요? 다른 모든 장인들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주목하면서 각자가 사용하는 것들을 선택해서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내는 작품을 어떤 형상 eidos을 갖게 되도록 사용합니다

- 《고르기아스》



제작자 즉 데미우르고에 해당하는 것은 준비된 자료들의 형상인 '에이도스의 지배'를 받는다. 이는 아무리 좋은 제작자가 좋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그 방법을 바르게 알지 못한다면 또는 방법이 부실하다면 완성체를 만들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서양 중세 시대의 플라톤 우주 발생론에 대한 개념을부터 신이 창조한 기독교 설파론 과 우주발생론 사이에 관점에는 큰 간극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기독의 신은 창조주가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플라톤의 데이우르고스는 모든 걸 창조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말한다.


칸트와 같은 철학자에게서는 이성, 오성, 감성이란 인식론으로 부터 사실을 한 가지 만들어 낸다. 서양철학의 내저긴 논리구조가 항상 능동적인 주체, 불변하는 법칙, 유동적인 타자라는 3가지 변별적 요소의 함수를 암시하는 것처럼 서양 철학자에 어떤 난해한 내적 구조 예를 들면 라캉과 같은 비 현실에 대한 주체도 결국 플라톤의 철학 각주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다.


pexels-yan-krukov-6611183.jpg



어떤 것을 만드는 데 3가지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거칠게 말해서 플라톤과 아퀴나스는 설계도가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스피노자나 니체, 마르크스는 재료가 중하다는 입장 그리고 칸트나 흄은 제작자가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기독교적 사유의 헤겔 사유에서 그 원형이 존재한다.


여기서,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발생론을 사유하여 플라톤의 제작이미지에 반기를 든다.


자신들이 가진 무게라는 속성 때문에 원자들이 허공을 관통해 아래로 떨어질 떄, 절대적으로 예견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들에서 그것들은 자신들의 직선 경로로부터 아주 조금, 단지 한 순간의 위치 이동이라고 이야기 될 수 있는 작은 정도로, 틀어진다. 만일 그것들이 직선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모든 원자들은 빗방울처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을 관통하여 아래로 떨어지게 될 것이며, 일차적 성분들 사이에 어떤 충돌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어떤 타격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자연은 결코 어떤 것도 만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무의미한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클리나멘'이라고 하는 평행에서 벗어난 미세한 차이를 말한다. 이는 사후에만 결정되는 계기로 말하는 데 이 세계가 의미있는 세계가 완성될 시 존재하는 세계의 요소로 존재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의미의 세계를 만든 이후 세계의 요소가 보이고 세계에서 변화하는 미세의 차이를 변화로 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눈이 쌓여 눈동이가 되고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우연이라는 생성이 생기고, 알튀세르의 말처럼 진정한 유물론에 대한 철학적 기초를 제시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주침이 응고의 결과로 나오는 모든 거슨 요소들의 '응고'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뒤이어 나오며, 이 사실로 말미암아 그것은 '응고하지' 않을 수도 있고, 더구나 '마주침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이 모든 것을, 분명히 몇 마디 암시 속에서이긴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돈 많은 사람과 벌거벗은 노동력의 '마주침'에 대해 그토록 자주 말할 떄, 그의 정식 속에서 말하고 있다. 심지어 더 나아가 역사에서 이 마주침은 그것이 서구에서 응고하기 전에도 여러 번 일어났으나 당시에는 한 요소의 결여 혹은 몇몇 요소들의 배치의 결여로 '응고하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18세기와 19세기 포 강 유역의 이탈리아 국가들이 그 증거가 된다. 그곳에는 돈 많은 사람들과 테크놀로지와 (강의 수력으로 가동되는 기계들의) 에너지와 숙련 인력(실업상태의 장인들)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 현상은 '응고하지' 않았다. 아마 거기에는 마키아벨리가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호소의 형태로 필사적으로 추구한 것이, 즉 가능한 생산을 흡수하기 적절한 내부 시장이 결여되어 있다.

- 《마주침의 철학》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주침의 유물론이 인간의 자유와 혁명의 역능을 새롭게 부여해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알게 모르게 우발적 마주침이 응고되어진다. 다른 세계의 마주침으로 인해 클레티우스의 '클리나멘'에서 파악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정당화 되어지는 것도 바로 이 이유에서 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