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지키는 나만의 주식 라이프 (11)
주린이, 코린이, 요린이.
서울 시민청은 지난 어린이날 ‘○린이 날’ 신조어를 공모하는 이벤트를 했다고 한다. 주린이라는 신조어가 입에 착 감기기도 하고 언론에서도 많이 듣고 쓰는 표현이라 나도 별생각 없이 사용했다.
주린이는 주식에 입문한 사람이나 초보자들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주린이 이후로 다른 분야에도 마구 어린이를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벼락 거지, 영끌, 존버, 따상...
주식 열풍이 불면서 탄생한 다른 신조어들도 많다. 그런데 그중 주린이가 무슨 문제가 되나.
웃자고 하는 말에 굳이 죽자고 덤빌 필요가 있나 하는 사람과 익숙함과 불편함을 거침없이 짚고 넘어가는 사람 사이에서 나는 그동안 전자에 가까웠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어딘가 모르게 주린이라는 용어를 들으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어리숙하고 불완전하고 초보인 존재일까.
우리가 만든 주린이라는 용어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른들이 어린이를 순진하고 미숙한 존재로 여긴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꼴이 된다. 어린이는 어른이 돌보고, 가르치고,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버려도 될 존재인가.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집 여섯 살 어린이는 신발의 오른쪽과 왼쪽을 자주 바꿔 신고 음식을 먹고 난 뒷자리는 과자 부스러기 투성이니. 여덟 살 어린이는 작은 단추는 끼기 어려워하고 아직도 안아달라고 할 때가 많으니.
그런데 말이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 여덟 살 어린이는 나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색종이로 생각하는 것을 뚝딱 만들어낸다. 핸드폰과 넷플릭스 없이도 온종일 자신이 만든 놀이들을 창조하며 놀 수 있다. 날벌레를 무서워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그네를 높이 탈 수 있다.
여섯 살 어린이는 같은 블록으로 질리지도 않고 매일 다른 것을 만들어낸다. 지치지 않고 날쌔게 달리고 킥보드를 타는 실력은 나보다 월등하다.
“왜 나는 겁이 많을까?”
“철과 돌은 왜 단단할까?”
의식적으로 질문을 만들지 않으면 수동적으로 대부분의 것들을 받아들이는 나와 달리 아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질문을 만들어낸다. 우리 집 어린이들은 나보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자주 할 줄 안다.
실컷 써 놓고 이제 와서 주린이라는 용어가 불편한 것은 왜일까. 어린이를 함부로 미성숙한 행동이나 생각을 하는 이라고 단정 짓는 무례함을 이제야 인식해서일까. 어린이들에게 배꼽 인사와 예의 바른 행동을 권하면서 어른들은 과연 그들에게 격식을 갖추고 있을까.
‘어린이’는 사전적으로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이다.
어린이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 용어 안에 깃든 어린이를 향한 존중의 뜻을 몰랐다.
독서교실을 운영하며 어린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뜻하게 그린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가 떠올랐다. 그녀는 어린이들의 외투를 벗고 입는데 시중을 들었다고 했다. 정중한 대접을 받아본 아이는 남에게 정중하게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는 문장을 읽고 나는 한참 그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한 사람으로서 어린이도 체면이 있고 그것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도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고, 때와 장소에 맞는 행동 양식을
고민하며,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주린이에서 시작한 생각이 갑자기 나의 반성문이 될 줄이야.
요즘 어린이들은 SNS나 유튜브를 통해 어른들의 관심사와 용어를 쉽게 접한다고 한다.
더 많은 어린이들이 알기 전에 대체어를 찾는 게 어떨까. 주식 초보자, 주식 입문자, 주식 아마추어....
시민청은 이벤트를 조기 종료하고 게시물도 삭제했다. 조기 종료가 사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급등하는 주식만큼이나 신조어를 만드는데 성급했다고 어린이들에게 정중히 사과하는 건 어떨까.
입에 착착 감긴다고 생각 없이 낱말을 만들었다가는 먼 훗날 그들도 우리를 ‘주노인’이라 부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