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ta Activa를 위하여 (2)
카톡이 왔다.
동영상이었다. 장소는 헬스장 에어로빅실 마루인듯하다. 빨간색 탑에 검은 레깅스를 입은 중년 여성이 머리는 묶은 채로 검은 마스크에 검은색 헬스용 장갑을 끼고 서 있다. 탑 아래로 드러난 허리는 잘록하다. 마른 느낌보다는 탄탄하고 군살 없는 근육질로 보인다. 동영상이 3초를 지나자 바로 그녀는 옆구르기를 시도한다.
매트에서 구르는 옆구르기가 아니다. 한 손을 바닥에 집고 다리를 들어 올려 빠르게 옆으로 구른다. 텀블링처럼 완전하게 공중은 아니지만 한 손을 바닥에서 뗀 순간만큼은 공중이나 마찬가지다. 인터넷 위키 사전에 따르면 옆구르기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면 할 수 있지만 몸이 굳은 성인은 충분한 연습 없이는 실패율이 높다. 이 여성은 동작을 가볍고 능숙하게 해낸다. 무려 연속 4번이다. 마무리는 일자로 다리 찢기다.
영상 속 그녀는 나의 엄마다.
엄마가 헬스장에서 옆구르기를 자주 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니 나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별 영혼 없이 ‘대단해요’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그만큼 나에게 엄마가 운동하는 모습은 익숙한 장면이었다.
엄마는 아는 이모에게 그 동영상을 보냈고 그 이모는 자신의 딸에게 다시 보냈다고 한다.
“이 이모는 상위 3%네.”
상위 3퍼센트라.
그럴지도 모른다. 예순을 바라보는 엄마의 체력과 운동에 대한 열정은 분명 남다르다. 나는 엄마가 가진 운동 신경의 3분의 1도 못 따라간다. 같이 산에 가도 엄마는 다람쥐처럼 날아다니고 나는 내일 내려가도 상관없는 신선처럼 뒷짐을 지고 천천히 움직인다. 아이들은 할머니와 달리기 시합을 하면 졌다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태세다. 짐이 없을 때면 엄마의 집인 22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한다. 힘들다고 불평하면서도 나와 아이들은 엄마의 눈빛과 기운에 결국 끌려가고 만다.
엄마가 늘 그랬던 건 아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자주 아팠다. 엄마는 그때 열병과 두통을 앓았다고 했다. 간호사인 이모가 집에 와서 자주 엄마에게 수액을 맞혀주던 기억이 있다. 어느 날 한의원에 갔던 엄마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단순하고 뻔한 말을 마지막 희망인 듯 붙들었다.
그날부터 엄마는 에어로빅을 시작했고 이모가 우리 집에 오는 횟수는 점차 줄었다. 어느새 엄마는 에어로빅 시간에 가장 앞줄에 서게 되었다. 에어로빅 수업 중에 몇 번째 줄에 서는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첫 번째 줄의 센터는 당연히 에어로빅 선생님 자리다. 선생님은 음악을 켜고 끄느라 자주 자리를 비운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양쪽에 서는 회원은 선생님 수준으로 동작을 외우고 있어야 뒤에 있는 회원들이 따라 할 수 있다.
목소리가 걸걸한 에어로빅 선생님을 도와 기압도 힘차게 넣어야 분위기를 업시킬 수 있다. 처음 온 회원이 멋도 모르고 잘 따라 하려고 그 자리에 섰다가는 다른 회원들의 눈치에 스스로 뒤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암묵적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앞줄에 설 수 있다.
우리 집 부엌 서랍에 가득했던 빵과 과자도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동네에서 떨어진 시내에 있는 헬스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도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포스터에 붙은 헐크 같은 남자들을 보고 기겁을 했다. 헬스장 관장님은 키가 정말 작았는데 유명한 보디빌더 선수라고 했다. 나는 그때 왜 엄마가 그곳에 드나드는지 몰랐지만 어느 날 알게 됐다. 이모 손을 잡고 실내 체육관에 간 날이었다.
근육질의 남자들이 포즈를 취한 후 구릿빛 피부색을 한 세 명의 여자들이 다음 무대에 나타났다. 모두 검은색 비키니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중 한 명은 엄마였다. 나는 그날 보디빌더 대회와 엄마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잘 몰랐다. 엄마가 받은 2등 트로피가 신기했을 뿐이다. 나의 미션은 아빠가 그 트로피를 보지 못하게 내 방 붙박이장 가장 안쪽에 숨겨놓는 일이었다.
엄마는 그 후로도 볼링, 배드민턴, 등산 등 여러 운동들을 섭렵해갔다.
엄마의 볼링 착지자세는 마치 학을 연상시켰다. 나는 공도 못 들어서 낑낑대고 있을 때 엄마는 시원하게 스트라이크를 성공시켰다. 아들이 합기도에 다닐 때 따라서 한 달 등록했다가 누구를 낙법으로 쓰러뜨리려 하냐는 아빠의 만류에 한 가지는 실패했지만 말이다. 아빠는 아마도 자기 방어를 걱정했던 것 같다. 엄마는 지금도 태권도나 합기도를 못 배워서 한이 된다고 한다.
엄마는 참 긍정적인 사람이다.
항상 부지런하고 쾌활하다. 수시로 김치를 담고 가사노동에 시달리며 식구들을 챙기면서도 엄마의 삶에는 늘 운동이 함께 했다.
엄마가 30대였던 시절에 에어로빅은 엄마를 살린 약 같은 존재였다. 증상만 조절하는 양약이 아니라 마음까지 들여다 봐주는 한약 같은.
40대에 볼링장은 엄마가 자신 있게 누비는 무대였다. ‘인생 한방인데 소리 지르는 네가 챔피언’이라는 싸이의 노래 가사처럼.
50대에 엄마에게 근력 운동은 살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아빠의 병간호를 위해 체력을 방전하지 않으며 자신의 속내를 치유할 방도를 찾아 헤매는.
예순을 바라보는 지금 엄마에게 운동은 흔들의자에 나사를 조이려는 것처럼 균형을 잡는 일이다. 김치를 담는 것만큼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힘들고 일관성 있는 맛을 내기 어려운.
혼자가 된 엄마의 60대, 70대의 운동은 어떤 의미가 될지 궁금하다. 여전히 삶의 생기를 주는 에너지원일 것이다. 혼자임을 깊고 넓게 도와주는 오랜 친구일 것이다.
“엄마, 아빠랑 그렇게 안 맞았는데 어떻게 살았어.”
“매일 운동으로 버텼지. 엄마가 돈은 많이 못 모아놨어도 근력은 많이 쌓아놓은 것 같아. 운동이 삶을 이겨내니까. 엄마는 그렇게 믿어.”
주부라서 운동할 시간이 넘치는 것은 아니다.
복근과 근육이 생겼다고 성과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며 퇴직금이 쌓이는 것도 아니다. 힘겹게 상체를 접고 펴며 겨우 만들어놓은 복부 사이의 골은 두 세끼 잘 먹으면 지방으로 다시 덮이고 만다. 운동이 인생의 모든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엄마는 썩은 동아줄이 아니라 건강하고 튼튼한 밧줄 하나는 꼭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걸 나에게 알려주었다. 밧줄의 종류는 여러 가지지만 엄마가 잡은 밧줄도 꽤 괜찮다는 걸 보여주었다. 살다가 외로움에 한없이 영혼이 땅속으로 꺼질 것만 같을 때, 일상의 균형이 흔들리고 무너질 때 기압 한 번 넣고 옆으로 굴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누군가 나에게 그랬다. 너희 엄마랑 부딪혔는데 살이 정말 단단해서 놀랐다고.
나는 혼자 속으로 말했다. 상위 3% 아줌마는 거저 되는 게 아니라고. 무기력이 자신을 쓰러뜨리지 못하도록 30년 동안 몸을 움직여야 되는 일이라고.
오늘도 엄마는 바쁘다.
“엄마, 주말인데 뭐해?”
“여기 환상이다. 엄마 무박으로 강원도 산에 왔어.”
카톡으로 폭포가 내리는 산의 풍경이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