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텔레비전을 그냥 켜두는 날들이 많았다. 무언가에 집중하려기보다는 적막이 싫어서였다. 방 안을 채우는 말소리와 음악, 어쩌다 눈길을 끄는 장면들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배경이었다. TV는 움직일 수 없는 물건이었기에 집 밖으로 나가면 세상은 다시 조용해졌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기다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동안 멍하니 있곤 했다. 그 비어 있는 시간 속에 종종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더 이상 멍하니 있지 못한다. 손 안에 스마트폰이 있고 그 안엔 언제나 콘텐츠가 있다. 내뱉는 말은 줄어들었지만 눈과 귀는 쉴 틈 없이 바쁘다. 콘텐츠는 소리 없이 밀려들고 나는 어느새 그것을 멈추지 못한 채 따라가고 있다.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 허전하고 그 허전함이 곧 불안으로 번진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무언가를 본다. 정보를 얻고 누군가의 일상을 엿보고 짧은 영상으로 웃는다.
콘텐츠에 빠져들고 있다는 위기간 속에서 나름의 균형을 찾으려 하기도 한다. 유익한 걸 보자며 교양 있는 콘텐츠, 생각할 거리를 주는 글들을 고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것조차 깊이 남지 않는다. 무언가를 분명 봤는데 다 보고 나면 또다시 허전하다. 무엇이 좋았는지 왜 좋았는지 기억도 오래가지 않는다. 그저 또 다른 콘텐츠로 넘어갈 뿐이다.
콘텐츠는 나의 취향을 잘 안다. 내가 어디서 머무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계산해 다음 영상, 다음 피드, 다음 추천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 새로운 감동이나 생각은 점점 사라진다. 즐거움은 점점 덜 새롭고 덜 선명하다. 기대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흐름 놀랍지 않은 전개, 감정의 패턴. 취향의 반복은 편안함을 주지만 언제부턴가 그 편안함조차 지루함으로, 무감각으로 바뀌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제 비어 있는 시간이 어떤 감각이었는지 잘 떠올릴 수 없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무언가를 보고 듣지 않으면 내가 존재하는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보고 듣는 동안 나는 점점 더 가벼워지고 피로해진다.
콘텐츠는 넘치지만 그 안에 머물 틈은 없고 그 안의 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요즘 탈콘텐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무언가를 끊자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나를 다시 회복하고 싶다는 뜻이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다시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비어 있는 시간은 사라졌지만 그 감각만큼은 다시 되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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