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그때 그 시절, 원주 기독병원 앞의 음악다방은 잿빛 도시 속에서 가장 낭만적인 섬이었을 겁니다.
탁한 담배 연기와 흘러나오는 올드 팝, 그리고 낯선 기대감이 뒤섞인 그 공간에서, 당신은 주머니 속 가장 평범한 것, 모나미 볼펜을 내밀었군요.
담배나 라이터 같은 '성인의 상징'들 사이에서, 그 투명하고 단순한 볼펜이 쥐고 있던 의미는 어쩌면 '순수'와 '미래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볼펜을 골랐냐"는 그 아가씨의 질문, 그 순간이 바로 당신들의 이야기가 시작된 첫 페이지였을 것입니다. 대답을 찾는 짧은 침묵과 시선이 닿았을 때, 세상의 모든 소음은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만 흐르는 조용하고 설레는 전류 같은 것이 생겨났겠죠.
그리고 이어진 '꽃반지 골목'. 이름마저 서정적인 그 길은, 사실은 서로의 어깨가 닿아야만 걸을 수 있는 비좁은 통로였다는 사실이 더 가슴을 울립니다.
그 좁음이 오히려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를 허물고, 쑥스러운 웃음을 공유하게 만들었을 테니까요.
밤하늘 아래, 골목을 따라 은은하게 켜져 있던 **대결등(大桀燈)**의 불빛. 그 빛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두 청춘의 비밀스러운 설렘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였을 겁니다.
세월은 야속하게도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만, 당신의 기억만큼은 골목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시 찾은 골목 입구에 철뚝뚜껑 삼겹살집이 들어서고, 겨울의 미끄러움을 막기 위해 바닥에 열선까지 깔렸다는 현대적인 풍경은, 과거의 낭만과 현재의 실용이 충돌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지금은 꺼져 있는 대결등을 보며 당신이 떠올리는 것은 단순한 불빛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과 그녀가 공유했던 그 시절의 순수하고 떨리던 순간들, 그리고 그 좁은 골목길을 나란히 걸으며 느꼈던 따뜻한 체온입니다.
'꽃반지 골목'은 물리적 장소를 넘어,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의 서랍장이 되었습니다.
그 길 위에 새겨진 이야기는, 세월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의 시작'이라는 서정적이고 긴 여운을 남기며 당신의 마음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