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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Apr 04. 2024

지우개 똥의 정체

  양아의 방으로 들어서면 유난히 눈에 띄는 게 있다. 떼처럼 밀려 나온 지우개 똥이다. 공부한다고 나온 양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많다. 아이의 문제집과 교과서를 펼쳐 봐도 필기를 많이 하는 타입은 아니다. 교과서엔 필기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몇 군데 줄이 그어진 게 다다. 여학생의 책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필기 흔적이 적다. 그러고 보면 연습장에 글씨를 써가며 공부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많은 지우개 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연습장과 노트 몇 개를 꺼내 펼쳐 봐도 이 많은 양의 지우개 똥이 나올 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물어봐야지 하면서도 양아를 보면 막상 떠오르지 않아서 여태껏 물어보지 못했다. 오늘은 웬일인지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는 양아를 보자마자 지우개 똥이 떠올랐다.     


  양아야, 방에 왠 지우개 똥이 이렇게 많아? 

       

  음, 그냥 뭐 뭘 좀 하느라고.  

   

  매일 쓸어도 다음 날 되면 또 나오니까. 

    

  수행 평가하면서 고치느라 지운 것도 있고, 심심하면 그림도 그리고…….    

 

  그림?   

  

  으음……, 몰라!   

  

  양아가 귀찮은 기색을 보이더니 서둘러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수행 평가를 숙제로 매일 가져오지는 않을 테고, 그렇다면 그림을 매일 그린다는 말이 된다. 학원 갔다 와서 숙제하고 문제집 풀면 시간도 빠듯할 텐데, 언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일까 궁금하다.     

 

  여보 양아가 요즘 그림을 그리나 봐.     


  그림? 무슨 그림?     


  글쎄, 지우개 똥이 하도 나와서 물어봤더니 그림 이야기를 하네.     


  양아가 그림을 잘 그리잖아. 

   

  잘 그리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림이야 그려도 되는데, 도대체 얼마나 그려대길래 지우개 똥 양이 어마어마한가 이거지. 당신도 한 번 봐야 하는데.     


  봤지. 나도 양아 방에 한 번씩 청소하러 들어가는데.     


  그러고 보니 양아는 미술 학원을 다닌 적이 없다. 다섯 살 되던 해에 시작한 피아노는 작년 이맘 때쯤 그만두었다. 피아노는 왠지 공부와 병행해도 좋을 것 같아서 계속 배우기를 권장했지만, 이론이 많아지면서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학원은 그만두었지만 양아의 방에선 여전히 피아노 소리가 들렸으므로 양아의 취미는 피아노 연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아의 진로를 음악 쪽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림은 예상 밖이다. 너나 남편이나 미술에는 소질도 없지만, 관심도 없는 터라 양아가 그림에 관심을 가질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공부에 지장이 없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취미 생활 정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우개 똥이 모두 그림을 그리면서 나온 것이라면 그리 달갑지는 않다. 

  거실에 앉아 남편과 지우개 똥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문자를 열어보니 양아가 보낸 메시지다. 


  ‘중등부 창의 미술 대회 참여 요강’  너와 남편이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는데 양아가 방에서 나온다. 


  양아야 이건 뭐니?


  남편이 묻는다.


  미술 대회, 교육청에서 하는 거래. 1등이 교육감상이고. 한 번 나가볼까?


  포스터도 있고, 네 컷 만화도 있네. 넌 뭘로 나갈 건데?


  네 컷 만화.


  만화?


  너와 남편이 동시에 말한다.


  응, 나 요즘 심심할 때마다 만화 그려.


  대회 나가는 거야 문제가 없는데, 시험 기간하고 겹치지만 않는다면…….


  엄마는 맨날 시험 타령이야. 시험 기간하고 안 겹쳐.


  괜히 시간 뺏길까 봐 그렇지. 신경 쓰이기도 하고.


  마감날까지 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뭘. 


  주제가 코로나 극복이나 대처 방안이네. 


  남편이 말한다. 


  음.


  주제 정해주고 그려보라고 하는 게 쉽지 않은데, 할 수 있겠니?


  초등학생이었다면 이런 대회에 적극적으로 나가보라고 먼저 권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중학교 2학년, 내신 성적 관리만으로도 제법 바쁘게 하루가 흘러간다. 그렇다고 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양아가 스스로 안 하겠다고 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떠보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다.      


  하고 싶으면 해야지. 그림 다 그려지면 엄마한테 줘. 접수는 엄마가 해줄게. 하지만 공부는 게을리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지우개 똥의 정체가 밝혀지자마자 그림 대회를 나가겠다는 뜬금없는 선언을 듣게 되다니. 이러다 갑자기 애니매이션이나 웹툰 작가가 되겠다는 건 아닌지 불길한 상상을 하게 된다. 네가 혼자 이런저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양아가 다시 입을 연다. 


  마커가 있어야 하는데, 종이랑.     


  그것만 있으면 되니?     


  남편이 묻는다.     


  응, 나는 물감으로 색칠을 많이 안 해 봐서. 마커가 좋을 것 같아.     


  그래 준비해 줄게. 대회가 며칠 안 남았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한 이삼일 걸릴 텐데, 괜찮겠니?    

 

  그동안 내용 생각하고 밑그림 연습하고 있으면 돼.


  양아도 할까 말까 고민했는지 대회 마감일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주문한 마커가 도착하는 데만 3일이 소요되면 실제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은 이틀 정도다. 지금은 양아가 무슨 꿈을 꾸더라도 한창 공부해야 할 때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이런 대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벤트에 불과하다.    

  

  남편이 주문한 마커가 도착하고 양아는 며칠 남지 않았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그림을 그린다. 밑그림을 그리고 보여주고, 말풍선 내용을 채워서 또 보여주고, 색칠 한 후 다시 보여준다. 양아가 뭔가에 집중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양아가 가지고 있는 고민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드디어 중등부 창의 미술 대회 발표날이다. 남편이 교육청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네 컷 만화 부문 교육감상 김양아’ PC를 주시하던 여섯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확장된다.   

   

  우와! 양아가 1등이야!     


  남편의 환호에 귀청에서 쩡 소리가 난다.      


  와! 내가 1등이다!     


  양아가 스프링처럼 자리에서 튀어 오른다.   

   

  오! 우리 양아 축하해!     


  너도 덩달아 신이 난다. 무엇이 되었건 1등을 했다는 게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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