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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Mar 12. 2023

오래된 사진들을 꺼내보지 못하는 이유


과거의 불행이 영원히 불행한 상태로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문제는 과거의 불행이 트라우마가 되어 지금까지 마음속 찌꺼기로 남아 있는 경우다. 불행했던 시절 마음속 깊이 새겨진 삶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좋은 시절이 왔음에도 여전히 삶을 지배하고 있다.


반대로 과거의 행복이 지금의 불행으로 바뀐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 십 년 동안 행복하게 살아왔더라도,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단 한 번의 사건에 의해 송두리째 불행으로 뒤덮여 버릴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들의 마음작용은 일이 발생한 시점과 순서에 관계없이 안 좋은 기억에 더 많이, 더 오래 반응하는 특징이 있다. 내가 과거의 기억을 함부로 소환하지 못하는 이유다.



여느 부모들처럼 아들의 어릴 적 사진들을 보면 짠한 마음이 일어난다. 아내는 아들의 사진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사진 속 표정들은 환하게 웃고 있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늘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하는 기억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출산과 육아에 힘들었던 아내의 , 좋은 습관을 들이겠다고 훈계하장면, 공부하라는 잔소리에 스트레스받던 아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들 중에 내가 원하는 장면들만 소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내게는 그럴만한 재주가 없다. 과거의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리면 그 시점을 전후로 발생했던 일들,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다른 일들과 인물들 까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따라 올라온다.


즐거웠던 기억들이 쭈욱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면으로 갑자기 바뀐다. 화면은 거기에서 정지되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후회와 아쉬움이 밀려온다.


오랜 기간 중국에서 근무를 마치고 귀국할 당시 나와 친하게 지냈던 중국인 동료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중국에서 겪었던 안 좋았던 기억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들만 간직하고 가세요'.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나의 기억장치는 그 정도로 첨단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분명 좋았던 일들이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기억 하나를 생각하면 안 좋았던 일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다. 안 좋은 일이라고 해서 끔찍한 사건사고까지는 아니다. 그저 해외에서 살면서 겪은 시시콜콜한 시행착오들, 나의 기준에서 부당하고 억울했던 일들,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한 인물들에 대한 불쾌한 기억들이다.


직장 동료가 친구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설사 친했던 동료라도 오랜만에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과거의 안 좋았던 일들과 관련 인물들이 같이 소환되기 때문이다. 안 좋은 일의 원인이 나에게 있으면 후회가, 상대에게 있으면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과거 얘기를 많이 하지 않는 덕분에 직장에서 '꼰대, 라떼 상사'라는 소리는 적게 듣는 편이다.


모두가 나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 힘들게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의 행복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과거의 안 좋았던 일을 소중한 교훈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는 없다. 이런 사람들은 미래의 트라우마가 될 씨앗을 뿌리지 않는 방법까지 알고 있다.


마음이 불편해질까 봐 오래된 사진 한 장도 쉽게 꺼내보지 못하는 것은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심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동고동락했던 옛 동료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은 내 마음속에 여전히 후회와 원망이 남아 있어서다.  


과거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기억력이 특별히 좋아서가 아니다. 과거에 내가 지은 인연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는 이기심 때문이다. 어리석었던 나와 마주할 용기가 있어야 진정으로 나를 용서할 수 있다.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소환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좋은 기억과 안 좋은 기억을 구분 짓는 분별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나는 언제쯤 과거의 사진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꺼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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