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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Oct 23. 2022

노지월동! 그 거칠고 외로운 의연함

가을 국화의 초연한 매력


월동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철새들의 자리 바뀜이 시작되고, 동면을 준비하는 동물들은 부지런히 살을 찌운다. 나무들은 잎과 가지의 수분을 뿌리 쪽으로 내려야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 년생 화초들은 서둘러 씨앗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짧았던 여정을 마무리한다. 가을 들녘에는 수확이 한창이다. 상점에는 두꺼운 겨울 옷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모두가 월동준비에 바쁜 가운데 이제 막 개화를 시작한 국화는 여유가 넘쳐 보인다. 서둘러 시즌을 마감하는 일년생 화초들을 하나씩 배웅해주고 다. 그동안 같은 화단에 있어줘서 고마웠다고, 그리고 고생했다고..

며칠 후면 썰렁해진 화단에 홀로 남게 되겠지만, 이제부터 국화는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장례식장에서는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고, 각종 전시회와 행사에서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입구에 노란 국화 화분 두 개가 놓여있는 동네 설렁탕 집 국물 맛은 깊어진다.

 

국화는 노지에서 월동하는 대표적인 화초다. 노지월동 화초들은 수 십종이지만 내가 직접 재배하는 화초는 국화와 패랭이 두 종류뿐이다. 작년부터 가꾸기 시작한 초보 정원사의 화단에는  송엽국, 스프레이 국화, 메리골드, 카네이션 패랭이가 자라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일년생 화초들이다.


노지에서 월동이 가능한 국화라도 화분에 옮겨 심어 놓으면 그 느낌이 달라진다. 어딘가 모르게 약해 보이고 뭔가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실내로 옮겨진 화분은 그야말로 온실 속의 화초가 되어 야성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화단에 자라는 국화는 화분으로 옮겨지는 것을 단연코 거부한다. 화분 국화는 관상의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 버려지지만, 거친 노지에서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는 국화에게는 자기 터전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보상이 주어진다.


국화들 중에서도 송엽국의 생명력은 잡초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정기적으로 물을 줘야 하는 다른 국화들과 달리 송엽국은 사막에서도 버텨낼 정도로 가뭄에 강하다. 노지에서 월동하 강인한 화초들도 송엽국 옆에 서면 손이 많이 가는 이 같은 느낌이 든다. 내년 새로운 노지월동 화초들을 맞이 할 화단의 모습을 미리 그려본다.




며칠 전 아침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국화 꽃잎 위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않을까 걱정했지만 낮 기온이 올라가면서 서리로 갈증을 푼 국화의 꽃잎은 가을 햇살에 한결 생기가 돌았다. 올해에도 작년처럼 한겨울까지 노란 꽃잎을 꼿꼿하게 유지하며 가을의 정취를 오래도록 선물해 줄 것이다.


노지월동! 나는 이 네 글자를 떠올릴 때마다 굳세고 단단한 기운이 전해진다. 엄동설한의 들판에 홀로 서서 담담하게 온몸으로 찬바람을 맞고 있는 듯한 의연함이 느껴진다. 척박한 환경에서 모진 인고의 시간들을 견뎌내는 결연한 모습이 그려진다.


찬바람에 노란색이 더욱 선명해 보이는 국화는 유리벽 안쪽에 서 있는 나를 보며 쓸데없는 걱정을 뭘 그렇게 많이 하냐고 나무란다. 소심하게 웅크리고만 있지 말고 거친 들판으로 나가 당당해지라고 한다. 어릴 방목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랐던 나는 그동안 노지월동하는 화초들과 같은 부류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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