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별에서 살고 있는 술꾼
세 번째 별에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빈 병과 아직 열지 않은 술병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왜 술을 마셔요."
어린 왕자는 물었다.
"잊기 위해."
술꾼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무엇을 잊으려는 거죠?"
"부끄럽다는 사실을."
"무엇이 부끄럽나요?"
"술을 마시는 내가."
대화는 짧았고 왕자는 침묵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술을 안 마시면 되지. 이게 말이나 돼. 술을 마시는 내가 부끄러우면 안 마시면 되는 거잖아"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순이 되어 다시 만난 술꾼, 나는 그를 보면서 가슴 어딘가가 아릿해졌다. 술꾼의 짧은 대화 속에는 인생의 수레바퀴가 들어있었다. 끝없는 순환 속에 갇힌 인간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잊기 위해 마시고, 마셨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다시 마시는 삶. 그것은 우리 모두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부끄러움. 그것은 내가 나를 부정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타인의 기준에 내 존재를 맞추며 살아온 나날들. 그것이 부끄러움이 되었고, 그 부끄러움을 숨기기 휘해 더 단단한 가면을 쓴다.
술이 아니더라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현실을 피하려 한다.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거나, SNS에 기대거나, 끊임없는 중독에 자신을 던지기도 한다.
그것은 위안이 아니라 그저 현실도피였다.
니체는 말했다.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세상의 눈앞에서, 또 한 번은 자기 자신의 눈앞에서.'
술꾼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힘이 없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채,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살아야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우리 삶의 모습이었다.
술이라는 매개만 달라졌을 뿐.
술꾼처럼 살아온 시간이 많았다. 일에 취했고, 자존심에 취하기도 했다. 세상과 나 사이에는 늘 투명한 벽이 있었다. 그 누구도 진짜 슬픔에 닿지 않게 보이지 않은 벽에 갇힌 채 살았다.
그 삶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었다.
어린 왕자는 그저 바라봤다. 슬프게. 어떤 판단도 하지 않은 채.
그것은 연민이었다. 비난도, 동정도 아닌, 그저 이해하려는 시도.
어린 왕자는 아무 말없이 묻고 또 물었다. 짧으면서도 단순한 질문들이 내 안에 가로 막고 있던 벽들을 하나씩 걷어냈다.
우리가 슬픈 이유는 어쩌면 여전히 우리 자신에게 진실하기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술꾼의 별을 떠나며 나는 그를 가만히 다독였다. 오래도록 부끄러움 속에 갇힌 별을 혼자 지키고 있는 술꾼을.
술꾼은 자신에게 무너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으로 버티는 사람.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런 사람을 비난하며 지나쳤던가?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상처를 판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는 변명을 한다.
예순의 나는 이제야 그를 이해한다. 무너졌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조차 없었던 그를. 숨기고, 삼키고, 외면하면서 술을 마시며 별을 지키고 있는 술꾼 속에는 어쩌면 내 모습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 왕자가 나에게 말했다.
"그는 술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했던 거야."
그의 말은 내 예순 인생 구석구석에 퍼졌다. 깊숙이 들어 있는 상처를 도려내 햇살에 올려놓았다. 꺼내 놓은 상처가 하나씩 봉합이 되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척을 하느라 진짜 감정을 잃어버렸다. 강한 척, 괜찮은 척, 무심한 척.
술꾼은 혼자였다. 그를 비난하는 이도, 그를 위로하는 이도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혹독한 재판관이었다. 동시에 유일한 방관자였다.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삶을 회복하는 첫걸음임을.
술꾼의 별을 떠나는 어린 왕자는 내 손을 잡았다.
"이제, 다음 별로 가도 괜찮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왕자를 보내고 가벼워진 내 마음을 보았다.
내 안에는 더 이상 감춰진 술병이 들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