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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가 사는 별

책상에만 앉아 있는 사람

by 담서제미

어린 왕자를 따라나선 나는 지리학자의 별에 도착했다. 그 별은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책장 넘기는 소리마저 메아리처럼 퍼졌다. 그는 낮은 탁자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 겨를도 없이 끊임없이 뭔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낡은 지도, 구겨진 종이, 오래된 나침반이 놓여 있었다. 그곳은 삶이 아니라 정보만 가득한 공간이었다.


"나는 지리학자요. 이 별의 산과 바다, 강과 사막을 모두 기록하지."

그는 말했다.


"직접 가보신 적은 있나요?"

어린 왕자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 돌아다니지 않아. 탐험가들이 보고하면 나는 적기만 해."


그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 있었다. 눈은 모니터에, 귀는 이런저런 소리를 따라가며 세상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굴었다.


보고서는 많이 썼지만, 내 마음을 직접 느껴본 적은 적었다. 듣고, 읽고 계산만 하며 나는 진짜 살아있는 삶을 유예해 왔다.


많이 아는 것과 깊이 아는 것은 분명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치 많이 아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긴 적도 비일비재했다.


어린 왕자가 다시 물었다.

"그럼 꽃은 기록하지 않으세요?"

지리학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꽃은 덧없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아. 금방 시들어버리잖아."


그 순간, 어린 왕자도 나도 고개를 떨구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이 두고 온 꽃을 떠올렸고, 나는 가슴속 어딘가가 저리도록 아파서였다.


덧없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 사무치게 와닿았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덧없는 것을 잃고 살아왔던가.


"남지 않을 거니까."

"곧 시들어버릴 거니까."


그렇게 지나친 많은 나날들, 따뜻한 눈길, 길을 걷다 우연히 들은 노래 한 구절, 나는 애써 그것들을 보지 않았다. 젊은 날에는 오래가는 것만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쥘 수 있는 것들, 숫자로 확인할 수 있는. 지금 돌아보면 정작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것들은 모두 덧없다 여겼던 것들이었다.


덧없다는 건 가치 없음이 아니라 금방 지나가기에 더 간절한 것이었다.


덧없는 것들은 영원을 바라진 않았다. 대신 덧없기에 지금 이 순간을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고 깊게 파고들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덧없다는 것은 가치를 희색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깊게 만드는 것이었다.


지리학자는 큰 것들만 기록했다. 산, 바다, 사막, 강. 움직이지 않고 남는 것들. 그에게 의미는 그것이었다.


어린 왕자는 조용히 말했다.

"꽃이 시들어도, 내가 사랑했던 건 변하지 않아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꽃은 기록될 수 없지만 마음에 늘 피어 있다는 것을. 덧없기에 그 덧없음이 오히려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예순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나는 책상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 있었던 순간들을 되돌려 놓기라도 하듯, 하루에 천천히 한두 걸음씩 걷기 시작했다. 산책을 하며 손끝을 꼭꼭 눌러 하늘색이 변하는 모습을 적고, 시장에서 대파를 고르는 할머니의 어깨를 바라보며 마음 안에 꽃잎을 하나씩 남겨두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잠시 멈춰 그 순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기록은 또렷해졌다. 삶은 무작정 적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에서 더 많은 영감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풍경이었다.


지리학자의 별을 떠나며 어린 왕자는 말했다.

"중요하지 않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들, 그게 사실은 가장 중요한 거였어요."


그랬다. 살아보니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던 그 모든 것들이 중요했다. 덧없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내 마음속에 들어 있는 잔 가지들이 불쏘시개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마음에 적는다.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


나는 오늘 덧없음을 다시 받아들인다. 피고 지는 꽃이기 때문에, 한 번의 눈빛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소중했던 그 모든 순간들을. 삶의 무늬는 종이에 새겨지기보다 가슴속에 살아 숨 쉰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리학자의 별을 떠나며 말했다.

"박사님은 책상에 별을 그리고 있지만, 나는 별빛 아래서 꽃의 향기를 기억할 거예요."


이제 나는 종종 나만의 지도에 이런 표시를 남긴다.

이곳에서 마음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여기서는 누군가를 그리워했다.' '꽃향기가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네.'


삶은, 너무 단단해 들어갈 틈 하나 없는 바위보다, 바스러지듯 시드는 꽃의 숨결을 믿는 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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