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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Jul 03. 2023

OT-일곱. '스칼드'가 누구야?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스칼드, 음유시인, OT

▷ 북유럽 지역의 음유시인


 '스칼드(Skald : 대체로 시인이란 뜻)'는 북유럽 지역의 음유시인을 말한다. '목소리', '외침'이라는 뜻의 옛 단어 'skal'이 그 어원으로 여겨진다. 처음에는 '스칼드(Skald)'는 '시(詩)'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 중 하나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시를 짓는 이', 즉 '시인'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북유럽 지역의 음유시인을 '스칼드(Skald)'라고 하며, 켈트 족의 지역에서 활동하던 음유시인을 '바드(Bard)'라고 한다.)


 스칼드는 북유럽 신화를 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설이나 설화, 신화 등은 '구전(口傳 : 입에서 입으로 전해짐)'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주로 시나 노래의 형태로 전해졌는데, 당연히 스칼드는 음유시인이었기에 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이들과 함께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또 하나의 이들이 집안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은 어른들이다.) 구전으로 전하는 것만 아니라, 기록으로 옮긴 것도 스칼드였다. 이는 스칼드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활동한 '음유시인'들 모두에게 해당한다. 그들이 옛이야기를 전하고, 기록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이 이야기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스칼드 '브라기 더 올드', 칼 월봄 그림(1883.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Bragi_Boddason )


 스칼드는 '궁정의 시인'을 뜻하기도 한다. 스칼드 중 상당수가 왕이나 귀족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 궁정의 시인들을 통해서 왕과 귀족을 기리는 시와 노래, 왕실과 귀족가문의 계보를 전하는 시와 노래 등이 많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시와 노래도 많다. 물론 모든 스칼드가 다 궁정의 시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민간의 음유시인이나 이야기꾼도 많았다. 또한, 당시 어느 정도 세력을 지닌 이라면, 시를 짓거나 노래를 배우는 일이 흔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명하지는 않아도 스스로 스칼드를 자처하는 이들도 많았다.


 흔히 스칼드를 묘사하는 그림을 보면, 하프 같은 악기를 든 모습이 많다. 그러나 실제 스칼드가 악기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이 하프를 든 모습으로 묘사가 되는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시인의 모습에 중세 이후, 음유시인들의 모습이 더해지면서 후세에 창작된 모습이다.




▷ 스칼드와 시


#01. 케닝과 기본 지식


 단순히 글을 알거나 시나 노래를 짓는다고 해서 스칼드로 불리지는 않는다. 글을 아는 것은 기본이고, 단어나 문장, 운율 등을 독창적이거나 상징적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했다. 흔히 '케닝(Kennings)'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시나 노래를 짓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자, 가장 중요한 지식이며 능력이다. 케닝은 '단어', '표제어'라고 번역되거나 '단어의 조합'이나 '나열'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단순하게 보면, 정말 단어의 조합이나 나열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상당히 상징적이면서도 복잡하고, 어렵다. 케닝에 대한 맛보기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 케닝에 대한 예시

 'baru fakr' = 'baru(파도)'+'말(fakr)' → '파도의 말', '파도를 타는 말' → '배(船, Ship)'라는 뜻이 된다. 물론 모든 케닝이 이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eyðendr arnar hungrs' = 'eyðendr(파괴자, 파괴하는 것)'+'arnar(독수리)'+'hungrs(굶주림)'이라는 단어의 조합이다. 단순하게 해석하면 '독수리의 배고픔을 빼앗는 자'가 되는데, 여기에는 언어적인 지식에 더해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독수리의 배고픔을 빼앗다'는 것은 '독수리가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이다. 독수리는 '사체(死體 : 사람이나 동물의 죽은 몸)'를 먹는데, 일반적으로 사체를 만드는 것은 '전사(戰士, Warrior)'다. 전사는 평소에는 사냥으로, 전시에는 적을 죽여 사체를 만든다. 그리고 그 사체를 독수리가 먹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독수리의 배고픔을 빼앗는 자(eyðendr arnar hungrs)'='전사'라는 뜻이 된다.


- 스노리도 유명한 스칼드였다. 크리스티안 크로그 그림(1899.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Skald )


 케닝은 너무 과해도, 너무 모자라거나 어색해도 문제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케닝을 적절하게 잘 사용하는 것은 스칼드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현재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스칼드들은 이 케닝을 아주 잘 사용한 이들이었고, 가장 대표적인 이가 '스노리 스트룰루손(Snorri Sturluson, 1178~1241)'이다.


 이에 더해 스칼드는 북유럽 지역의 신화와 전설, 이야기를 알아야 했다. 또한, 사회, 경제는 물론 각 지역의 유력인사와 그들의 가문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다. 이런 제반 지식이 없이는 제대로 된 시나 노래를 지을 수 없었고, 제대로 된 스칼드라고 인정받지도 못했다. 또한 시나 노래를 듣는 이 역시 그만큼의 지식이 있어야 했다.


 한 스칼드가 '대지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하자. 그런데 듣는 사람이 그게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었다. 그러자 스칼드가 다시 '거인의 살해자'라는 표현으로 바꿔서 들려주었다. 그럼에도 못 알아들었다면, 아마 그 스칼드는 화를 내거나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지의 아들' = '거인의 살해자' = '천둥신 토르(Thor)'를 뜻하는 기본적인 은유이고, 이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02. 스칼드의 시와 노래는 형식적으로 '스칼딕(Skaldic)'과 '에딕(Eddic)'으로 나뉜다.


 '스칼딕(Skaldic)'은 주제가 다양하다. 그리고 상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며, 시인의 기교(말장난을 포함해서)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해석이 가능하고, 이는 현대에 옛 시를 연구하는 이들을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에딕(Eddic)'은 주제가 신화, 영웅, 전통과 규칙 등에 대한 것으로 정해져 있다. 대화의 형식이 많고, 예언이나 꿈, 환상 등을 빗대어 노래하는 시가 많다. 이런 에딕에 대표적인 것이 '고(古) 에다'이다.


 추가로 '방패 시(Shield Poem)'이라는 것도 있다. 시의 형식은 아니고, 말 그대로 '방패(shield)'에 '시(poem)'가 적힌 형태를 말한다. 스칼드를 후원하던 왕이나 귀족이 방패를 하사하면, 스칼드는 후원자의 업적이나 가문의 업적, 또는 후원자가 좋아하는 신화의 이야기를 주제로 시를 지어 방패에 적었다. 시는 그림이나 문양, 글로 새겼는데 이를 '방패 시'라고 부르게 되었다.  



▷ 멀티 엔터테이너, 학자 그리고 언론

 

 동서양에서 활동한 다른 음유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칼드도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먼저 시와 노래를 짓는 것이 주역할이었고, 이런 시와 노래는 궁정이나 잔치, 행사장 등에서 불렸다. 시인이자 이야기꾼이고, 가수이자 배우인 멀티 엔터테이너의 역할을 했다. 또한, 전설이나 신화, 옛이야기와 역사를 전하고 기록하는 기록가이자 문학가이며, 역사가의 역할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이 있는데 바로 '언론'의 역할이었다. 현대의 '언론'과 완전히 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정보전달, 여론의 형성과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스칼드는 언론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모든 스칼드가 왕이나 귀족의 궁정에 소속되거나 후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설령 궁정에 소속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종신계약도 아니다. 오늘은 이 궁정에서 노래를 하고, 내일은 다른 궁정에서 노래를 하는 경우는 흔했다. 어제는 궁정에서 노래를 하다가 오늘은 마을 잔치나 시장, 술집에서 노래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스칼드 중에는 한 곳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곳을 돌며 여행했다.


 또한, 스칼드는 혈통보다는 능력이 중시되었다. 스칼드 중에는 귀족이나 사제, 성직자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농부도 있었다. 스칼드는 계급과 혈통, 사회적으로 다양한 계층에서 탄생했고, 이것은 그들의 시와 노래의 기본적인 소재가 되어주었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혈통과 신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이들이 언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토양이 된 것이다.


 지배층에게 스칼드는 단순한 엔터테이너가 아니었다. 때때로 스칼드는 왕이나 귀족 등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나 법, 규범 등을 피지배층에게 전하는 역할을 했다. 스칼드는 지배층의 뜻이나 명령을 피지배층에게 전달하고, 그 진행사항이나 결과 등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효과적인 통로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스칼드로 '토르뵤른 호른크로피(Torbjørn Hornklofi)'나 '시그바투르 토르다르손(Sigvatr Þorðarson)' 등의 많은 스칼드가 있다.


- 스칼드 '군로그르', 안드레아 브로흐 그림(1898.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Gunnlaugr_ormstunga )


 동시에 스칼드는 이와 정반대 측면으로 언론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스칼드는 백성의 생활이나 생각, 민심 등을 지배층에게 전하거나 피지배층 간의 연락과 의사를 모으는 역할을 했다. 스칼드는 지배층이나 정책 등에 대한 피지배층의 불만이나 비판 등을 담당했다. 왕이나 귀족의 부정, 부패, 무능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일반 대중의 민심이나 생각이나 생활을 노래함으로써 지배층을 견제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스칼드로 '군로그르 오름스툰가(Gunnlaugr ormstunga)'나 '에기르 스칼라그림손(Egill Skallagrimsson)' 등의 많은 스칼드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칼드는 그 역할을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스칼드가 사라지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기독교였다.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전설이나 신화, 옛이야기는 이단이 되었고, 스칼드의 시와 노래에도 변화가 생긴다. 이들의 시와 노래에서 전통적인 이야기와 가치관이 삭제되었고, 기독교의 이야기와 가치관으로 대체되었다. 그나마도 기독교의 힘이 강해지면서 성직자의 몫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중세 이후, 인쇄술을 통한 서적이 발달하고, 직업적으로도 세분화되면서 스칼드는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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