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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원 Jul 03. 2023

미제가 다 좋은 건 아니다

추억은 코끝에 린스향으로 남아...

“엄마, 린스 없어?”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화장실 문을 열고 주방에 있는 엄마에게 물었다. 

“아이고 내가 가게 가서 살 게 있었는데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왔더니 린스였구나!” 

“지난번에 샴푸 살 때 같이 샀는데 왜 린스만 떨어졌지? 엄마 얼굴에 바른 거 아니야?”

“내가 바보냐? 그걸 얼굴에 바르게” 

웃으며 장난으로 묻는 내게 엄마가 퉁명스럽게 말하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엄마가 아무리 치매 질환을 앓고 있다고는 해도 린스를 얼굴에 바를 정도가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예전에 린스를 얼굴에 바른 적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는 남의 집 청소를 해주면서도 다른 집의 빨래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빨아다 주는 일도 했었다. 워낙 깔끔한 성격이었던지라 세 집의 옷을 가져왔지만, 한 번도 옷을 섞어서 전달한 적이 없었다. 깨끗하게 세탁이 된 옷을 전해 받은 집에선 답례로 수고비 외에 생필품 등을 주기도 했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면 엄마는 뽀송뽀송하게 말린 옷들을 각지게 잘 접어서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우리 삼 남매는 엄마를 가운데로 양옆에 앉아서 엄마의 하얀 손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곤 했다. 


빨랫감을 맡기는 집은 대개 미군과 결혼했거나,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들이었다. 그런 연유로 가끔 우리는 미제 과자나 미제 사탕 등을 먹기도 했었다. 어느 날은 노란색 슬라이스 치즈가 엄마 손에 들려서 오기도 했는데 아버진 치즈를 한 번 먹어보곤 “에잉 무슨 맛이 이래?” 하면서 밥상 위에 놓았다. 나도 사실 무슨 맛인지 모르면서도 처음 먹어 본 음식이고, 미제라고 하니까 짠 것을 우걱우걱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이번엔 이쁜 꽃무늬가 요란한 플라스틱병을 들고 왔다. 뚜껑을 열자 기막히게 향긋한 냄새가 났다. 병을 기울여 손바닥에 조금 따랐다. 끈적끈적한 액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유 색깔 액체에 무엇이 섞였는지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진득한 걸 보니 아마 얼굴에 바르는 로션이라는 건가 보다.”

가지고 온 엄마도 막상 병 안에 든 내용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우리보다 미제 물건을 접할 기회가 더 많은 엄마의 말에 나는 손바닥에 따랐던 액체를 망설이지 않고 얼굴에 문질러 발랐다.

 “세수도 안 하고 바르면 어떡해?” 엄마는 그 와중에도 씻으라고 했다. 동생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가더니 급하게 세수를 하고 얼굴의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은 채 엄마 앞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곤 엄마가 조금씩 따라 준 미제 로션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 얼굴에 문질러 발랐다.     


아버지와 엄마는 미제 로션을 처음 가져온 날 딱 한 번 바르고 손대지 않았다. 우리 삼 남매의 피부에 양보한 로션은 한 달이 못 가서 병을 거꾸로 들고 손바닥에 두드려야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로션을 바르고 나면 촉촉함 대신 피부가 바짝 욱죄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마다 얼굴은 물기가 말라 팽팽하게 당겨진 문창호지 같은 기분으로 학교에 갔다. 그러면서도 ‘미제 로션’을 발랐다는 우쭐함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동생들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한동안 미제 로션을 안 바르면 안 되는 것처럼 매일 아침, 저녁 로션 바르는 걸 빼먹지 않았다. 얼굴의 당김은 미국 사람의 피부와 한국 사람의 피부 차이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어른스러운 해석을 하며 이해하려 했지만,  말할 때마다 얼굴이 당겨서 ‘미제가 다 좋은 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어머! 아줌마 이걸 벌써 다 썼네?” 우리 집으로 직접 빨래를 가지고 온 아줌마가 다 쓰고 난 꽃무늬 플라스틱병을 쓰레기통 옆에 세워 둔 것을 보고 말했다.

“식구들이 아침, 저녁으로 바르니까 금방이던데” 엄마의 대답에 “아침, 저녁 머리를 감아?” 아줌마가 놀라며 물었다. “무슨 머리를 매일 감아? 얼굴에 바르니까 금방 썼지.” 엄마의 대답에 “아이고! 이걸 얼굴에 발랐단 말이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엄마와 플라스틱병을 번갈아 보는 아줌마.


“얼굴에 바르는 로션 아니야?” 난감한 표정으로 엄마가 물었다. “이건 머리 감을 때 머릿결 부드럽게 하려고 머리에 쓰는 린스라는 건데. 얼굴에 발랐다고?” 린스를 얼굴에 발랐다는 말에 놀란 아줌마 앞에 당황해서 맞잡은 두 손만 비비고 선 엄마의 얼굴도 놀라웠지만, 내가 정말 놀란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 당시에 우리는 빨래할 때 사용하는 가루비누로 머리를 감았는데, 내가 밤낮으로 얼굴에 바른 로션이 머리 감는 물비누였다니? 근데 머릿결 부드러워지라고 바르는 거라면 얼굴도 부드러워져야 하는 데 얼굴은 맨숭맨숭 그대로인 걸. 정말이지 미제라고 다 좋은 게 아닌 건 확실했다.      


가끔 가게에 가서 진열된 샴푸와 린스를 볼 때마다 어린시절 나를 홀렸던 린스향이 코끝으로 스며드는 기분이 들어 나도 몰래 웃음이 나곤 한다. 

 엄마는 내가 그때를 생각하고 농담한 줄 알까? 아마 모를 것도 같다. 엄마는 방금 일어났던 일보다 예전의 일을 더 잘 기억하지만, 엄마도 엄마의 실수는 빨리 잊고 싶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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