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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원 Jun 27. 2023

목숨 걸고 먹는 수박

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기억 한 조각!

 된장찌개에 넣을 두부를 써는 엄마의 손이 떨린다. 두부 써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것 같아 안쓰럽다. 예전엔 두부보다 더 크고 단단한 수박도 한 번에 가르던 엄마였는데. 세월은 참 야속하게 엄마의 힘마저 야금야금 빼앗아 갔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우리 집은 작은 가게를 했었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편의점이나, 대형 식료품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작은 가게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채에는 주인집을 비롯해 여섯 가구가 세 들어 살고, 우리는 그중 한 집으로 바깥채에 딸린 작은 가게가 우리 가게였다. 콩나물, 두부 등의 간단한 반찬거리와 공책, 연필 등의 문구류도 팔았다. 규모가 작아서였는지 입구가 작아서였는지 사람들은 우리 집을 구멍가게라고 불렀다.

 학교 갔다 오면 나와 동생들은 진열대에 있는 각종 과자를 몰래몰래 먹는 재미로 가게 일을 거들어 주곤 했다, 엄마는 가게를 하면서  남의 집 빨래도 맡아서 하던 때라 알면서도 속아 주며 우리에게 가게를 맡기고 잠깐씩 쪽잠을 잤다.


 어느 해 여름, 엄마가 수박을 옮기던 중 잘못하여 금이 갔다. 어차피 금이 간 수박을 팔 수는 없었으니, 안채에 사는 가족들을 가게에 딸린 작은 방으로 불러 수박을 조각조각 잘라 나눠 먹었다. 내 돈으로 수박을 사 먹을 수 없는 고만고만한 처지인지라 모두 고맙다는 말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엄마도 모처럼 남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어서인지 흐뭇한 웃음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수박 잔치를 즐겼다. 

 그런데 잔치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밖에서 놀던 남동생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들어오더니 두어 쪽 남은 수박을 보고 대성통곡을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동생은 안채의 가족들과 여럿이 나누어 먹었다는 생각을 못 하고, 누나들과 엄마만 수박을 먹은 것이란 서운함으로 그러는지, 떼를 쓰며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방안에 남아 있던 안채의 가족들은 먹던 수박을 슬그머니 손으로 가리고 죄인처럼 한 명, 두 명 방을 빠져나갔다.


 다른 가족들이 모두 나가자 웃으며 동생을 달래던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만 울어, 누나들도 한쪽씩밖에 안 먹었어. 그러기에 학교 끝나면 일찍 집에 오지 어디서 놀다가 이제 와?”

남동생은 한번 울면 좀체 그치질 않아서 울음 끝이 길기로 동네에 소문이 나 있었는데 그날도 예외 없이 찔찔 찔 계속 울어댔다. ‘저러다 한 대 맞지’ 싶은 생각이 막 들던 찰나, 엄마가 갑자기 가게로 뛰쳐나갔다.

나는 엄마가 회초리로 쓸 파리채나, 먼지떨이개 등, 그와 비슷한 것을 갖고 올 거란 불안한 마음에 남아 있던 수박 한쪽을 들고 동생에게 그만 울고 먹으라고 했다. 

“엄마 들어오면 너 맞게 생겼다 그만 울어. 우리도 다른 사람들하고 먹어서 하나씩밖에 안 먹었어.”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시작한 울음이니 끝을 봐야겠다는 심보인지 동생은 내가 건넨 수박을 힐끗 보더니 더 큰 소리로 울었다.


 그때 엄마가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에 엄마 손에는 커다란 수박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우리 가게에서 제일 큰 수박인 것 같았다. 엄마는 그 큰 수박을 말없이 쟁반 위에 놓더니 칼로 단번에 반을 갈라 쓱쓱 먹기 좋게 썰었다. 나와 여동생은 ‘이게 무슨 일이지?’ 서로 눈치만 보고 앉아 있었다. 수박 한 통이 통째로 담겨있는 은색 양은 쟁반을 본 남동생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울음을 그친 것은 물론이다.

 수박 한 통을 다 썰어 동생 앞으로 밀어주면서 엄마는 비장한 목소리로, 

“너 오늘 이거 다 못 먹으면, 죽을 줄 알아” 한마디 하고는 수박 자른 칼을 쟁반 옆에 탁! 소리와 함께 내려놓았다.


남동생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앞에 놓인 쟁반을 자기 쪽으로 더 가까이 당기더니 수박을 양손으로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나와 여동생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엄마 눈치만 살피고 앉아서 ‘이걸 같이 먹어줘야 하나? 아니면 저러다 쟤가 배 터지는 걸 봐야 하나?’ 온갖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욕심을 부리기는 했지만, 열 살짜리 어린아이 혼자 수박 한 통을 다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생의 먹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우리는 이제 걱정보다 웃음이 나왔다. 남동생은 배가 불러 수박을 더는 못 먹겠는데, 힐끔힐끔 쟁반 옆의 칼을 훔쳐보는 게 죽을까 봐 잔뜩 겁을 먹은 얼굴이 보였다.

그전에는 수박을 못 먹어서 울더니, 이제는 수박 때문에 배가 불러서 울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 거기에다 수박 단물까지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흐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오고 말았다. 나와 여동생의 웃음보가 터지자 그때까지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엄마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꾸역꾸역 수박을 먹던 남동생이 들고 있던 수박을 쟁반 위로 던지며 소리쳤다.

“으아앙! 차라리 나를 죽여!”


어린 남동생은 죽여 달라고 무릎 꿇고 우는데 우리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때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수박은 우리 집에서 ‘목숨 걸고 먹는 과일’이 되어 해마다 여름이면 수박을 보며 웃음 짓게 했다.      

그야말로 ‘웃기지만 슬픈’ 전설(?)이 아닐 수 없다. 그때 흐뭇하게 웃던 엄마의 모습이 어찌나 좋던지.

지금 내 앞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위태롭게 두부 써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엄마가 이쁘게 웃던 그 시절이 못 견디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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