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원 Jun 14. 2023

가짜 뉴스 유포자

검증되지 않은 말에 울고 웃는다.

저녁 먹으면서도 그러더니 커피잔을 앞에 두고 동생은 또 힐끗힐끗 내 눈치를 본다. 

뭔가 할 말이 있어서일 텐데 입을 떼기 거북한 소린가보다.

엄마는 상 치우는 사이 슬그머니 잠이 들었다. 잠든 엄마 머리맡에 자매가 앉아 소리 낮춘 TV 화면을 응시하며 커피만 홀짝였다.

“언니~ 가람이가 무슨 말 안 해?”

더 이상 못 참겠는지 눈치 보던 동생이 먼저 말을 건다. 가람이는 나의 첫째 아들이다.

“무슨 말?”

“어제 엄마한테 들은 건데... 걱정스럽기도 하고 어떡하나 싶어서 오늘 언니 기다렸지.”

“뭐가?”

“가람이 말이야....”

“가람이 무슨 일 있대?”

주중엔 회사 출근 시간에 쫓겨서, 주말과 휴일엔 엄마와 지내느라 아이들과 제대로 얼굴 볼 시간이 없다. 스무 살 넘으면 다 컸으니 웬만한 일은 알아서 하겠거니 하며 지냈는데 동생이 저리 뜸 들이는 걸 보면 필시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가람이 여자 친구가 아이 가졌다고 하던데...”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없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나이로야 옛날 같으면 벌써 아이 두엇은 두었을 나이지만 이렇게까지 내가 모르고 있었단 말이야? 

평소에 ‘나는 일찍 할머니 되기 싫으니 알아서 하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더니, 그 말을 믿고 엄마인 나에게 말을 못 한 건가? 그건 그렇고 정말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멍하게 앉은 나에게 동생이 다시 묻는다.


“정말 못 들었어? 언니 걱정할까 봐 말 안 했나 보네.” 

“서로 얼굴 볼 시간이 없어서 말할 기회가 없었겠지.”

“근데... 아까 엄마 얘기 들으니 아이를 지우려고 한다던데.”

“뭐? 왜?”

“몰라 엄마가 한 소리니까.”

“그런데 왜 할머니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가람이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아이들을 돌봐줘서 두 아이 모두 할머니를 무척 따르기는 해도 그런 내밀한 얘기는 부모와 하는 거 아닌가? 엄마인 나는 일을 핑계로 아이들에게서 순위가 밀려난 건가? 아니면 여자 친구와 안 좋은 일이 생긴 건가? 그것도 아니면, 경제적인 문제인가? 

할머니한테 먼저 걱정거릴 털어놓았다는 생각에 큰아이에게 서운해서 감정이 복잡하고, 아이를 지운다는 말에 가슴이 벌렁대며 심란할 때, 잠들었던 엄마가 부스스 일어났다. 


 엄마는 일어나자마자 장롱 서랍을 열고 수건을 한 장 꺼내더니 방을 나가려고 했다.

“엄마, 아까 씻었잖아 오늘은 세수 그만해도 돼.”

“아까 씻었어?”

“응, 세수 안 해도 이쁘니까 괜찮아.”

방을 나가려던 엄마는 엉거주춤 돌아서서 조심스럽게 찻상을 피해 앉는다.

“엄마, 가람이 왔었어?”

“오늘? 모르겠는데 왔었대?

“가람이 여자 친구가 아이 가졌다고 했다며?”

“그러게 말이다. 아이를 안 낳겠다고 해서 내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

“진짜야?”


몸은 엄마 옆에 있어도 마음은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얼른 가서 큰아이에게 직접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조바심에 입이 바짝바짝 말라간다.

“근데 걱정 안 해도 되겠더라.”

엄마는 내 마음과 달리 태평한 얼굴이다. 나는 대답도, 되묻지도 못하고 엄마 얼굴만 바라봤다.

“아까 대통령이 와서 자기가 아이 길러주겠다고 그러더라. 고맙지 뭐냐.”


엥? 이게 무슨 소리야? 대통령이 왜 남의 자식 아이를 키워줘?  나랏일도 바쁜데.

“아까 아침에 왔길래 내가 하소연을 했지. 우리 손자가 여차저차한데 어떡하냐고 했더니 걱정 말라구 하더라. 자기가 키워준다고,”

저녁 내내 눈치 보느라 애쓰던 동생이 들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고 하더니 내가 그랬다. 잠깐사이 하늘과 땅을 두어 번 왕복달리기한 후 축 늘어진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없이 방바닥으로 떨어진 느낌이다. 안심되면서 약이 올랐다.


“그이가 하루 세 번씩 우리 집에 와서 회의하더니 미안했나 봐. 그렇기도 하겠지. 그 넓은 청와대를 두고 하필 이 시골구석 내 집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염치는 아는 사람이네.”

TV뉴스에 등장하는 대통령과 엄마가 진지하게 대화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대통령에게 얘기해서 문제를 해결한 게 잘한 것이란 생각에서인지 엄마는 어깨에 힘을 주며 반쯤 커피가 담긴 내 잔으로 손을 뻗었다.    


알면서도 엄마의 편집된 기억에 속는다. 잠깐이지만 타들어 가던 속이 시원해졌다. TV 뉴스와 드라마를 교묘하게 엮은 엄마가 만든 기발한 악마의 편집 덕분에 우리는 또 오래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전 05화 목숨 걸고 먹는 수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