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있게 걷는 이에게만 보이는 풍경들
오랜만에 걸었다.
일요일 오후, 대형마트에서 필요한 물건 한 두 가지를 사러 가는 것이었기에 자그마한 가방 하나 둘러매고,
천천히 걸었다. 영상 18도 정도에 맑고, 가을바람이 솔솔 부는 날을 만끽하고 싶은 나는 이어폰도
귀에 꽂지 않고, 오감을 열고 도시의 경치를 느끼며 걸었다.
걷다가 횡단보도에서 신호대기를 했다.
내 옆에는 소녀가 조그마한 강아지를 데리고 서 있었다. 차들도 별로 안 다니는 대체적으로
한적했던 그 곳에서 갑자기 가히 폭력적이라 여길만한 둔탁한 소리가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소녀 옆에 있던 자그마한 강아지가 불안하게 우왕좌왕하며
짖어 대기 시작했다. 건너편 인형뽑기 가게 앞에 두더지 게임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강아지를 기둥에 묶어두고 두더지 게임을 하는 게 원인이었다.
어깨 넓이로 다리를 벌린 여자는 왼발은 앞으로 오른발은 뒤에 단단히 지지한 채, 올라오는
두더지를 부셔버릴 듯 내리치고 있었다. 뒷모습이지만, 게임을 즐기는 게 아니라, 화풀이로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지막지할 뿐만 아니라, 간혹 잔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무지막지한 모습에 나는 시선을 뗄 수 없어, 그야말로 멍하니 한동안 바라봤다.
소녀가 데려온 강아지는 망치에 대한 트라우마라도 있는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안절부절 제자리를 맴돌면서 계속 짖었다.
반면, 두더지 게임하는 여자가 데려온 강아지는 늘 있었던 상황에 익숙한 듯, 편안히
엎드려 눈을 껌뻑이며 행인들을 고즈넉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계속 강아지를 달래주었지만, 진정하지 못하던 강아지는 여자가 게임을 멈추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횡단보도 사거리에서 신호 대기를 하던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요란스러운 게임을
마친 여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둥에 묶인 강아지줄을 풀고는 도도하면서도 우아하게 개를
산책시키며 사라졌다. 마침내, 사거리에는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고 약 10분을 걸었더니, 다시 신호대기를 받았다.
신호대기를 다시 받은 곳은 조명가게 앞이었는데, 조명가게와 상관없는 LG트윈스의 마스코트가
10살 아이 정도의 크기로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주인이 아마도 LG트윈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걸까?
귀여운 캐럭터는 눈길을 잡았다.
내 옆에서 엄마 손을 잡고 있던 다섯 살 쯤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도 그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는지, 엄마 손을
놓고 달려가 마스코트의 손을 잡은 뒤, 만족스러운 듯 엄마를 뒤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 해맑은 모습에 눈이 절로 갔다. 엄마는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 했다.
여자 아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취한 포즈를 유지하면서도 고개를 약간
숙이고는 멋쩍게 웃었다. 귀여운 모습에 멍하게 노골적으로 보던 나와 눈이 마주친 여자아이는
마스코트의 손을 놓고 달려가 엄마 품에 안기며 얼굴이 붉어진 채, 곁눈으로 나를 조심스레 살폈다.
난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들여다보며, 너에겐 관심 없다는 듯 아예 돌아 서서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았다.
얼마 뒤, 아이는 다시 마스코트 앞에 다가갔고, 난 최대한 안 보는 척하면서 아이의 수수한 모습이 보기
좋아 계속 흘깃흘깃 훔쳐봤다. 아이는 내가 자신에 대해 관심을 아예 끊었다고 생각했는지, 좀 더 과감하게
마스코트와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고, 포옹도 하며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사진을 찍은 후, 엄마 품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서 수줍음이 많은 아이인 듯, 쑥스럽게 미소 지으며 엄마 품에
쏘옥 들어가자, 행복하게 웃는 엄마의 모습이 나중에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만한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제 가던 길을 가려던, 모녀 앞에 아이 셋이 요크셔테리어로 보이는 작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듯 맞은편에서 오고 있었다. 강아지는 아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졸졸 따라다녔고
끝내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도망 다니다, 엄마 품에 달려들자 엄마는 아이를 안고 번쩍 들어올렸다.
이제 안전한 엄마 품에 안긴 아이는 손가락으로 강아지를 가리키며 뭐라뭐라 울음 섞인 소리를 내며
강아지를 노려봤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면서도 자신의 품에서 안심을 하는 아이와 강아지에 쫓기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아이와 달리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다.
두 모녀의 사랑이 하나씩 쌓여져 가는 그 날의 사랑스런 그 모습들을 두 사람은 훗날 기억할까?
한적한 가을의 어느 일요일 오후, 대체적으로 평화로우면서도 격동적이었던 거리의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