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강한 개에 얽힌 추억
“이거 눈 딱 감고 얼른 다 마시라”
엄마가 커다란 그릇에 간장을 가득 부어서 내밀었다.
“이렇게 짠 간장을 어떻게 다 마셔?”
난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망설였다.
“이거 다 마셔야 니 개한테 물린 곳 덧나지 않고 낫는 기라”
어느 날 왕래가 잦았던 이웃집 작은 강아지가 돌연 내 허벅지를 물었다. 피를 철철 흘리며 엄마에게 달려갔다. 물린 곳을 빨간약으로 소독하고 한숨 돌린 엄마가 내게 내린 처방이다.
아직도 그 흉터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 당시엔 재래간장을 마시면 개한테 물리고도 멀쩡해진다는 민간 처방이 있었나 보다. 죽을 수도 있다는 엄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간장 한 그릇을 쭉 들이켰다. 다행히 그 강아지가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아서 난 무사히 살아남았다.
어려서부터 난 개를 좋아했다. 키우고 싶었으나 엄마가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못했다. 내 집에서 개를 키울 수 없으니 자연스레 옆집 개들에게 관심이 갔다. 한 번은 잘 생긴 커다란 이웃집 개를 과감하게 끌고 나갔다가 잃어버린 적이 있다.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는지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아마도 개와 함께 걷고 싶었나 보다. 그 시절 TV 만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나 <프란다스의 개>에 등장하는 커다란 개를 흠모하여 그랬나 보다. 개와 나란히 걸으며 느긋하게 사직공원을 산책하려 했는데 나보다 덩치가 큰 개의 힘에 달려 얼마 못 가서 그만 목줄을 놓치고 말았다.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개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개가 보이지 않자 울며불며 개를 찾아달라고 경찰서까지 갔다.
엄마는 남의 집 귀한 개를 잃어버렸다고 정말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말뿐만 아니라 매서운 등짝 스매싱과 더불어 한동안 닥치는 대로 때렸다. 평소 같으면 제 빨리 도망쳐 많이 맞지는 않았겠지만 그날은 나도 큰 잘못을 했다는 자책감에 그냥 매에 몸을 맡겼다. 밤새도록 울어서 눈이 벌게진 다음날 다행히 이웃집 개를 찾았다. 전날 매 맞은 곳이 아파서 억울했지만 남의 집 귀한 개를 다시 찾은 안도감이 더 컸다.
사직공원 옆 작은 한옥 집에 살다가 옥인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때는 좁은 골목길을 여러 번 지나서야 초등학교에 다다를 수 있었다. 평소처럼 하교하는 어느 날, 사람 두 명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에서 커다란 개 한 마리에 딱 마주쳤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너무도 놀라서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숨까지 들이마시며 가만히 서 있으니까 그 개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쓱 지나가는 것이다. 휴~ 살았다. 한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개가 저만치 골목길을 돌아나가는 것을 본 후에 빠른 걸음으로 갈 길을 재촉했다.
동네 강아지에게 물려서 간장 한 대접을 마셔야 했을 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강아지들은 특히 움직이는 물체에 민감하다. 개 앞에서는 뛰거나 손을 휘젓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거나 천천히 걸으면 된다.
“우리 강아지나 고양이 키울까?”
뜬금없이 옆지기가 툭 말을 던진다. 아들이 대학 가서 시가에서 지내니 적적한 모양이다.
“고양이보다는 강아지가 좋아, 근데 키우고 싶진 않아. 손이 많이 간대”
강아지를 좋아하지만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이 더 무겁게 다가왔다. 옆지기는 그 후로도 끊임없이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며 나의 반응을 살폈다.
“이 강아지 예쁘지 정말 귀여워. 이런 개 키우면 살맛 날 것 같아.”
일 년을 버티다 결국 난 항복했다. 옆지기는 집 안에서 기르기 좋은 품종인 포메라니안을 택했다.
진돗개나 셰퍼드 특히 안내견인 레트리버를 좋아했지만 마당 없는 아파트에서 키우기엔 무리였다.
개는 마당에서 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흙이 있는 마당에서 개가 자유롭게 뛰어놀며 자라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면서 소형견이 인기가 있다. 물리적으로 대형견은 어렵다. 우리 집 아파트 같은 라인에 송아지 만한 허스키가 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 탈 때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큰 개를 산책시킬 때 개 물림 사고가 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한 번은 루나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무심결에 구석이 아닌 문 앞쪽에 서 있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더니 큰 개가 갑자기 컹컹 짖어댔다. 난 깜짝 놀라서 루나를 안아 올렸다. 루나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속담처럼 왈왈 짖었다. 대형견 견주가 미안하다면 얼른 엘리베이터 문 뒤쪽으로 물러섰다.
"먼저 내려가세요. 저희가 다음 엘리베이터 탈게요."
강아지들의 행동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엘리베이터에 목줄이 끼어서 따라 올라가는 사고도 종종 보도된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갈 때는 항상 조심하면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낯선 개에게는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