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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반맨 Feb 16. 2023

자유

49금 인문학 사전 13.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패트릭 헨리라는 미국 분이 비장하게 외치셨단다.
이분은 죽어본 경험과 자유롭지 못했던 경험을 두루 해본 결과(?) 자유가 죽음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는 걸 마침내 깨닫고 일갈하셨던 듯하다.
근데 이 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우리 속담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이다.
아무리 험하게 살더라도 죽는 거보다는 낫다는 말일 텐데, 도대체 어떤 말을 믿어야 하는가?
아무래도 우린 한국인이니 우리 속담에 좀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자유를 위해 죽음도 불사했던 전 세계 모든 선열들께 죄송)...
도대체 패트릭 헨리가 그토록 갈구했던 자유란 게 무엇일까?
혹시 나처럼 이것저것 집사람 눈치 보지 않고 내 뜻대로 말하고, 내 맘대로 놀고먹고 할 수 있는 그런 자유를 원한 걸까?
그렇다면 나도 이 사람 말에 절대 동감이다.
근데 설마 이런 유명한 분이 그런 쪼잔한 자유와 죽음을 맞바꾸려 하진 않았을 터...

우리나라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계 문학 선호도 조사에서 1위 작으로 꼽히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 쓰여있는 글은 이렇다. 
'Den elpizo tipota. Den forumai tipota. Eimai eleftheros.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말인즉슨 자유롭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하고, 어떤 고통이나 질곡도 내가 선택한 것이면 의연하게 견딜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조르바는 정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의 정신 상태로 삶을 놀이로 즐기며 살아간다.
혹시 이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마다 제각각의 소감이 있겠지만, 나는 이런 비현실적인 자유를 갈구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하는 생각을 줄곧 하며 읽은 기억이 있다.
시쳇말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란 말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있는 우리 생활인들이 꿈꿀 수 없는 상태가 소설에서 펼쳐진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 실존 인물이라니, 소설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던 내가 얼마나 사회화되고 시스템에 길들여진  인간인지를 알 것 같다.  

자유는 2가지 형태로 말해진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즉 소극적 자유와  '무엇을 향한 자유' 즉 적극적 자유로 나뉜다.
사르트르가 말한 '저주받은 자유',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있다'라고 말할 때의 자유는 적극적인 자유를 말한다.
삶에는 아무런 고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그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
자기의 삶을 매 순간 선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가축화된 생활인들(당연히 필자를 포함)에게 이런 자유는 오히려 형벌이다.
이렇게 인간이 선택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비극이다. 

우리가 바라는 자유는 통상 소극적인 자유다.
예를 들면 '돈으로부터의 자유' '배우자로부터의 자유' 등등 한마디로 '규율과 구속과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하여 우리가 원하는 자유는 별거 아니다.
그냥 내 맘대로 생각하고 내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여건에 구속되거나 문화적, 종교적 억압 없이 살아가는 삶이 자유로운 삶이다.
그러나 이조 차도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는 타인의 자유와 상충되지 않아야 하며, 일정한 경제적인 조건이 허락되어야 한다.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어디 있든 그는 사회적으로 구속을 받는다.'라고 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에 있으나, 인간들이 모여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를 원할 때 그 유일한 방법은 '타협'이다.

© giorgiotrovato, 출처 Unsplash

당연하게도 일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율과 구속이 부과되고, 일정한 조건이 전제된다. 
특히 경제적인 조건은 가장 크게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요소다.
그래서 'Money maturity' 즉 '돈에 대해 평온한 상태'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제1의 조건이다.
돈에 대해서 편안하고 자유롭고 싶은 바람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이거나 상관없이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다'라는 말을 실천하려면 역설적이게도 풍부한 돈을 소유해야만 한다.
비극이지만 현실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유는 니체가 말한 '사자'의 상태다.
낙타의 질곡에서는 벗어났지 만즉 사회적 관습과 누군가가 만든 기준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하는 상태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위에서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의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
적자지심이란 말이 있다. 대인의 가장 궁극적인 상태는 적자 즉 어린아이의 마음 상태라고 했다.
니체와 맹자 님은 상통한다.  
자유로움의 극치에 대해서는 역시 장자를 넘어설 수 없다.
장자께서 '소요유'편에서 말씀하신 경지는 이러하다. 

今子有大樹(금자유대수) 患其無用(환기무용) 何不樹之於 無何有之鄕 (하불수지어 무하유지향) (何不樹之於) 廣莫之野 (하불수지어 광막지야) 彷徨乎無爲其側(방황호무위기측) 逍遙乎寢臥其下 (소요호침와기하) 

지금 그대 큰 나무 가졌는데, 쓸데없다고 걱정하나.
왜 그 나무를 모든 장애가 사라진, 아무런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무하유지향' 드넓고 텅 빈 곳인 ‘광막지야’에 심어 그 주위를 하는 일 없이 오가며, 즉 편안하게 산책하거나 소요하다가, 그 아래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자도 좋지 않은가?


'어린 왕자'에는 장미에 길들여진 어린 왕자의 얘기가 나온다.
관계에 길들여지고, 질서에 길들여지고, 익숙한 것에 길들여진 우리의 모습을 빗댄 것 아닐까?
진정한 자유는 길들여지지 않는 것에 있다.
야생의, 날것의 상태가 자유다.
새장 속에 길들여진 새는 문이 열려도 날아갈 줄 모른다.
반려견보다는 들개가 개답고, 형형색색 교배된 장미보다는 잡초가 훨씬 꽃다운 것은 '자유' 즉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잡초란 말은 틀렸다. 신이 만든 자연엔 잡초란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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