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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Dec 15. 2021

이별

죽는 일상의 기록(10)

우리 4남매는 장례식 절차를 다 마무리하자 말자

넷이 한 차를 타고 엄마 영정사진을  껴안고 통영으로 떠났다.

아무런 계획은 없었다.

일단은 그냥 좀 쉬어 보자였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말고 바다만 멍하니 보다 오자했다.

불멍이 유행이라는 데, 우리는 바다멍, 물멍이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마치 꼭 어디론가 급히 떠날 사람들처럼

우리는 그간 엄마의 병원생활로 다져진 팀웍을 뽑내며 착착 숙소를 예약하고 집안을 단도리 했다. 공식적인 절차가 다 끝이 났다고 허무함에 빠질 새도 없이 우리들은 수의를 벗어 두고 다급하게 섰다.


여행 계획도 사실은 엄마의 발인 전 날, 새벽에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각자 개성이 강한 우리 넷의 몇 안 되는 공통점 중 하나가 즉흥적이지 않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오히려 리들은 치밀하게 하루 하루를 계획하고 사는 인데 하루쯤은 그냥 즉흥적이고 아무 계획없이 있어 보고 싶었다.

우리는 이제 모두 다같이 고아가 되어버렸으니까

이 정도의 일탈은 해 주어야, 이 정도의 도망은 가버려 주어야 우리의 치밀하고 계획적인 일상이 균형이 맞아질 것 같았다.


고속도로 운전 매니아인 작은언니가 운전대를 잡았다. 숙소는 코로나 전에 엄마랑 같이 리조트를 오빠가 당일 예약했다. 성수기는 아니라도 아직 한 여름이라 당일 예약이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또 어케 어케 하니 예약이 잡혔다.

숙소가 마땅찮으 통영 어딘가 바닷가 모텔

이라도 가서 자고 오자고 맘에도 없는 말로 시작

했는데 이상할리만치 순조롭게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몇 해 전, 우리 4남매와 엄마함께 처음으로 여행을 간 곳이 통영이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 가을이 었으니 2019년쯤이었나보다. 늘 대가족으로 다니던 복잡다단한 여행에서 벗어나 이제 이렇게 우리 다섯이서 여행을 나서보자고 계획한 첫 해였다. 그러고는 코로나덕분에 잠시 미뤄졌다가 이제는 영영 처음이자 마지막 우리

들의 가족 여행이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가장 아쉽고 애틋한 법다.

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무한대로 내 일상을 둘러싸고 있다면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기 마련

일텐데 아쉽고 애틋해서 더 귀하게 여겨지는 소소

 일상들이었다.


후회라면 후회일까, 미련이라면 미련일까.

그것이 엄마와의 마지막 여행일 줄 알았다면 이렇게 깐깐하게 방역수칙을 지켜가며 참고 기다렸시간들이 무슨 의미가 있 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여행도 가고 나들이도 가자며 미뤄 두었던 소중한 시간들이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게 되었. 어쩔  없이 갖혀 있었던 시간들이 이렇게 미련스럽고 안타까울 수가 없다.


수시로 삼남매를 데리고 드나들며 정신없게 굴던 엄마집에도, 우리집에 먼일이라도 생기면 가장 먼저 소매를 걷어 붙이고 달려오던 엄마도,

코로나 발생 이후에 우리들은 명절에조차 왕래를 지 않고 지냈다.

모여서 맛난 것 먹으며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는 것이 우리집 가풍인마냥 모여서 노는 것을 아라 하던 우리 가족이 시끄러운 집안 분위기를 잃어버린 지 한참이 되었다.


어릴적부터 감정보다는 객관적 사실만 말하기를 좋아하던 시크한 큰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쯤 언젠가 이런 얘기를 했다.

"엄마, 나는 음무할머니(친할머니)네 식구랑 놀러가는 것도 좋지만 외할머니랑 이모들이랑 여행가는 게 더 좋아." 라고 했다. 내 기분이 좋으라고 이런 말을 할 아이는 아니라서 그 까닭이 궁금했다.

"왜? 너는 진이 오빠랑 노는 것도 좋아하고 고모랑 고모부도 엄청 좋아하잖아." 했더니, 갓 열 살쯤 된 아이가 나를 쳐다보면서

" 외할머니랑 있으면 엄마가 계속 웃어.

그냥 일부러 웃는 게 아니고 진짜로 웃어.

엄마가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도 좋아. " 고 하던 아이의 말이 한참 잊혀지지가 않았다.


작은 아이의 눈에도 들켜버린 나의 행복을 앗아간 코로나를 원망한 것은 아니다.

진짜로 원망스러운 것은 나만큼이나 행복했을 엄마의 행복마저 빼앗아 간 시간들에게 화가 났다. 그리 길게도 남지 않은 시간들이었는데 말이다.


엄마는 우리 아이들을 걱정했고 사실, 나는 평소 건강한 우리 식구들은 걱정도 하지 않았다.

기저질환이 있는 70대 고령층인 엄마에게 혹시나 작은 바이러스 조각하나라도 흘려 놓고 갈까봐 그렇게 조심스럽게 발길을 끊어 왔던 시간들이 부질없이 흘러만가고 오히려 엄마를 더욱 무서운 암덩어리에게 빼앗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코로나고 뭐고 맹날 보러 갔을 꺼를... 엄마밥을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도록 깐깐하게 지켜온 규칙들이 원망스다.

 

아니다, 엄마를 수시로 보지못한 시간들보다도 더 서러운 것은 우리지역에서 코로나가 처음 터졌을 때, 우리모두 엄마한테 집 밖으로도 나가지 말라고 큰일 난다고 신신당부하며 엄마를 집안에 잡아둔 우리들이다. 장날이면 장에 야하고 집 앞 공원에도 수시로 산책나서고, 이모랑 둘이 여기저기 다니기 좋아던 엄마의 일상을 그렇게 잔소리해서 집에 붙들어 것이 더 억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훨훨 바깥 바람이라도 쐬고 기저기 더 다니기라도 했으면 엄마가 덜 억울하고 또 덜 아팠으려나.



통영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담했다.

머라고 콕 꼬집어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일부러 감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약속한 마냥 사람들처럼 움직였다. 그러려고 하다보니 먼가 급하고 서둘러 움직이게 되었다.

차안의 공기는 멍하고 공허했지만 그래도 대화는 끊어지지 않도록 의무적으로 돌아가면서 의미없는 일상의 말들로 메꾸어 넣었다. 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의미없는 대화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우리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았다.


바다가 보이기 시작할 때는 벌써 주변은 어둑어둑했다. 파장분위기의 활어회 거리에서 작은 언니와 오빠는 회를 포장하고 나와 큰언니는 바로 다음 블럭의 충무김밥 거리에서 김밥을 포장

했다. 다들 맨 몸으로 무작정 떠난지라 대형마트를 찾았다. 친절한 횟집아저씨의 자세한 설명에도 우리는 꽤나 헤맸다. 그래도 성질 급하기로 소문난 우리들 아무도 짜증내지 않았다.

마트에서 각자 원하는 대로, 필요한 대로 담기로 했는데, 리는 모두 주류코너서 만났다.

나는 설중매를, 오빠는 화랑을, 거의 2년간 금주 온 작은언니는 무슨 얄궂은 와인 한병을, 큰언니는 맥주를 골라 담았다.


우리는 새벽까지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했다.

며칠간 장례일정에 피곤할 만도 한데 각자의 주종에 흠뻑 취 우리들안하게도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그 또렷한 정신속으로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뭉실뭉실 피어 올랐다.

큰언니는 어렸던 동생들이 미처 몰랐던 엄마아빠의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증언해 주었다. 그 파란만장했던 일생에도 우리들은 악착같이 잘 살아냈고 또 자라났다. 이제는 그 일생들을 기억하고 인정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증인 되었다.

작은언니는 평생을 둘째로 살아 온 설움을, 정작 설움의 당사자들에게는 하나도 전하지 못 하고 우리들에게 털어 놓았지만, 우리는 한 목소리로 둘째의 설움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에게는 늘 작은언니가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픈 손가락 이제 우리 모두 같이 장갑을 끼우고 핸드크림을 발라 아프지 않게 잘 간직하리라.

오빠는 우리가 모르는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가만가만 얘기해 주었 우리들은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 음의 고통으로 약해진 엄마의 마지막 순간들을 타까워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철없던 막내로 돌아 때 그 어느 시절들을 회상는 방법으로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 그 때 진짜 힘들었었데이. 아빠, 그때는 왜 그랬어?"

어른이 되고 아이가 하나였나, 둘이었나가 생겨 나도 엄마라는 사람이 되어 있던 어느 날,

엄마, 아빠랑 같이 살았던 우리 집앞 횡단보도에 겨울의 길목이면 늘 서  파란색 트럭에서 파는 홍게를 사들고  아빠랑 둘이서 거나하게 소주 두어 병을 쨘쨘거리다가 문득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언제, , 라묻지도 않았다.

나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씨익 웃으며 소주잔을 들어 쨘을 하자는 제스쳐를 하며 나를 향해 들더니

돈을 2배로 벌어 너들 고생 덜 시키고
더 잘 해 입힐라고 그랬지.

아빠는 알고 있었다. 모른 척하고 우리들의 아픔 무심하게 외면하는 무책임한 아빠라고 죽도록 미운 적도 있었는데 아빠는 우리들의 아픔을 다 알고 있었다.


내가 고3이 되던 해에 집에는 빚쟁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차압딱지만 안 붙였지, 딱히 붙일만큼 돈이 될 물건도 없기도 했겠지만, 그렇게 빚쟁이가 날마다 찾아오고 우리는 쫓겨나듯 이사를 갔다. 큰언니는 결혼을 하느라 우리집 사정을 잘 모르는 것 같았고, 자식일에 특히나 자존심이 센 엄마는 첫 사돈집에 책이라도 잡힐까 맏딸 큰언니에게 내색도 안해서, 큰언니는 그 해 행복한 새색시가 되었다. 일찌감치 독립한 작은언니도 알아본 들 거들어 줄 형편은 아니었다.

공익요원이긴 했지만 군대 생활하던 오빠도 집에 있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고 그 빚쟁이들의 협박아직 어린 나는, 문제를 해결할 힘도 방법도 없이 그저 온몸으로, 그저 나의 감성으로 받아 이겨 내었다.

그냥 모른척하는 게 최고의 방법이라 결론지으면

서도 그마저도 나의 예민한 얇은 감성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남은 내 인생을 자신의 생에 실패한 아빠를 원망하는 방법으로 복수하며 살기로 굳게 다짐했는데.


그날, 아빠 ' 배로 돈을 벌어서 너들 더 좋은 거 해 주며 살 수 있을 줄 알았다'는 아빠의 모한  마디 아빠의 순진한 웃는 얼굴 나의 긴긴 원망의 시간들이 허무하게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빠가 돈을 두 배로 벌어서 나에게 더 좋은 거를 해 주기를 바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눈치밥으로 철이 일찍 들어 버린 어린 시절에 엄마의 불안함이 감지가 되는 아빠 월급날이면 아빠가 또 월급 봉투를 들고 어디론가 노름판으로 가거나 누군가의 딱한 사정에 밤새 술을 먹으며 월급 봉투를 잃어버리고 돌아 오지는 않을지 불안해 하며 아빠의 회사 앞에서 바랏코 섰던 꼬맹이 내가 떠올랐다. 아빠가 별 일탈없이 그냥 착하게 내 손을 잡고 바로 집으로 오면서 치킨을 두어 마리 사들고 오는 날이면 엄마도 아빠에게 악다구니 치며 싸우지도 않았고 누런 종이에 싸여진 양념 치킨을 둘러 앉아 나눠 먹는 시간들이 그렇게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양념치킨 한 마리면 나는 되었었다.


아빠를 따라 나도 웃음이 났다. 아빠의 말에 이제 막 아이가 둘이 생긴 나는 비록, 방법은 틀렸지만 아빠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왠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그 순간부터 어이없게도 아빠에 대한 길고 긴 원망 시간들이 끔하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오히려 정신이 더 번쩍들었다. 나도 그저 철없이 내 부족했던 환경만을 탓하며 내인생에 아무런 노력과 도전도 해 보지 않고 그저 시간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나약하게 살아 온 내 시간

들이 더 원망스러웠다.


아빠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니다.

내가 나를 여기로 이끌고 온 것이다.

나는 이제서야 진짜 내 인생을 제대로 잘 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10년 이상을 짊어지고 있던 내 미련을 이제서야 완전히 내려 놓았다.

아빠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우리를 응원하고 있었다.

늘 빈말처럼 되풀이 하던 너들이 아빠 인생의 최고라는 아빠의 술주정이 빈말이 아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리석고 가엷기만 한 엄마도 원망으로 엄마의 일생을 마감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고 초조하다. 

아빠한테처럼 엄마한테도 그렇게 다 털어놓아 볼 껄 후회가 되었다. 퍼맨보다 돌덩이보다 더 단단하던 마가 혼자 슬프게 우리들 몰래 흐느끼던 어느 날 밤에, 그 엄마의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지 못 하고 숨죽여 지켜보기만 하던 겁쟁이였던 내가 안타까웠다.

늘 곁에 있을 거라 믿고 아직 주어진 시간이 넉넉할 거란 자만심에 물어 보지 못 한 그날의 엄마 눈물이 내 눈으로 흘러 들어 와 가득히 맺힌다. 


엄마가 가는 그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일지 알 수는 없어도 마의 눈물은 나에게, 후회와 원망으로 미련해 빠진 우리들에게 쿨하게 던져 두고 가시기.

엄마는 미련없이 가벼이 훨훨 날아가시기를.

 통창을 넘어 넘실대는 통영의 바닷물 만들어내는 깊은 파도의 울렁거림을 멍하니 바라보며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사실은 알콜의 힘을 빌어 그날 새벽녁까지 우리들은 우리들의 후회와 미련과 원망들을 털어 내려 놓았다. 각자의 후회의 순간들을 내려 놓으면서 서로 위로를 하고 각자의 미련스럽던 순간들을 꺼내 놓으면서 괜찮다고, 이제는 되었다고 서로 고개 끄덕여 주었다. 이런 시간들이 진짜로 필요했다.


그래, 그걸로 되었다. 이걸로 되었다.

엄마가 어디에 있든 엄마의 마음이 편안하기만 하면 되었.

그 시간까지 나는 또 빌고 기도할 것이다.


새벽까지 부산을 떨어 대며 떠오르는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의 해는 또 떠올랐다.

내일의 해도 또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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