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혜주 Sep 29. 2021

1217호

죽는 일상의 기록 (1)

가로 약 1.9m, 세로 약 2m 가량의 공간에 환자용 침대 하나, 냉장고 겸 긴 선반장과 접으면 의자, 펼치면 침대가 되는 신기한 보호자용 간이침대가 놓여져 있다.

은 줄과 파란 줄이 번갈아 희미하게 그여진 흰 커튼이 곡선으로 따라 돌아가며 각 침대마다 어설프게라도 공간은 분리해 준다. 각 공간에는 반드시 환자 1명과 보호자 1명만이 자리해야 한다는 규칙이 정해져 있다.

모두가 잠들어 몹시도 고요한 밤 12시에 갑작스레 "맛있는거 좀 꺼내나 봐." 하는

엄마의 당황스러운 애교에 적응된 지도

딱 2주하고 5일째다.

 

 번째 입원

 

첫 번째 입원. 지난 몇 주간 내내 기운이 없고 속이 울렁거리고 더부룩하다며 한동안 소화제를 달고 지내고 있는 엄마를 억지로 끌고서라도 정밀검사든 뭐든 해보자고 엄마의 동의는 없었지만 큰 병원에 예약을 잡아놓았다.

“안 간다. 소화제 묵으면 개안타. 내 맹날 댕기는 내과에서 사진도 찍어보고 다 했다. 개안타 카드라.”며 한사코 거절하는 엄마에게 관장이라도 하고 오면 속이 후련할거라고 설득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그 날 새벽이었나, 그 다음날 새벽이었던가 엄마는 아파서 도저히 못 참겠더란다.

"이러다 죽나 싶어 한참을 가만 있어 보니,

안 죽더라. 그래서 안 죽을 꺼면 살아야지 싶." 하면서 엄마는 혼자 스스로 119에 전화를 걸 구급차를 불러 병원 응급실에 들어와서야 우리  호출했다.

코로나 시대인지라 응급실 들어가기도 쉽지가 않더라며 구급차가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을 두 군데나 돌아도 자리가 없다고 까이고서, 엄마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 내 조카가 ○○소방서, 너네 소방서 18년차 소방관이라고 거들먹거렸더니 그래서였지싶다면서 그제서야 소방관들이 병실이 없다는 의사들과 전화로 막 싸워대더니, 이곳, Y대 대학병원 응급실에 겨우 들라 주고 갔다며 파란만장했던 입원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나서 엄마는 엄마의 2, 3호들과 병원에서 서너 날들을 사진이란 사진은 다 찍어 대고 수시로 피를 뽑아 대며 오만가지 검사를 다 하고 나서, 우리들 4남매의 79세 엄마는 느닷없이 간암말기 판정을 받았다.

병원에 번갈아 있으면서 제일 먼저 소식을 접한 엄마의 2호와 3호는 그럴 리가 없다며 레지던트처럼 보이는 의사에게 진짜 의사를 데리고 오라고 오진일 꺼라고 침착하게 아주 이성적으로 말도 안되는 요구했단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엄마는 40대 후반, 50대 초반부터 혈당이 높아 거의 30여 년을 인슐린과 함께 79세까지 생존해 왔다. 그런 동안, 엄마는 식단이며 운동이며, 건강과 당뇨를 함께 관리하며 살아온 팔자였고 한 달에 한 번은 당뇨약을 받으러 꼭 병원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일찍부터 의료기관의 관리를 받던 사람이었,

술주정뱅이 남편이 성시럽다고 술은 단 한방울도 입에 대지도 않는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암, 그것도 우리 가족은 술주정뱅이들만 걸린다고 믿고 있었지만 술주정뱅이 우리 아빠도 걸리지 않은 간암이라니.

누구나 그런 진단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엄마와 연결해 보지 않은 카테고리 안의 병명이었기에 특히, 더 믿기지 않는 이 비현실적인 진단을 당연히 부정이 먼저였다. 


헌데, 스스로 수련의이 어설픈 초보의사라고 먼저 밝히는 성 좋아 보이는, 성격은 몰라도 최소한 거짓말은 안 할 거같이 생 담당의가 몹시도 어설픈 자기가 보기에도 이것은 분명 간암 말기가 분명한 사진들이고 치료는 많이 힘들어 보인다 했단다.


우리는 이렇게 진짜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갑작스레 암환가족이 되었다. TV드라마같은 일이 진짜 나의 일이 되기는 생전 처음이다.

그 수많은 드라마같은 일 중에 하필 간암이 나의 일이라니. 

그런 낯설고 억울한 사실에 적응할 새도 없이, 우리는 가엷고 불쌍한 엄마를 살려 내야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엄마 몸 속의 이 몹쓸 간암덩어리들과 격렬하게 싸우기로 작정했다. 사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었다. 싸울 수 밖에.

의사 니놈들이 머라고 겁을 줘 싸도 엄마는 우리가 지켜낸다고 독수리 5형제보다는 숫자가 하나 부족하지만 더 강력하고 징한 생명력으로 똘똘 뭉친 우리 4남매가 정신을 번쩍 차려서,

지구를 지켜내는 독수리 5형제처럼 우리들의 지구인 엄마를 지켜내기로 다짐했다.

 


첫 번째 퇴원


그렇게 정신없이 독수리1호, 2호, 3호, 4호들이 번갈아 병원을 오간지 일주일째 되던 어느날,

느닷없이 주치의선생님께서 퇴원을 하랜다.

엥? 아니, 간암이라면서 일주일만에 퇴원이라니. 의사님아~ 엄마는 정녕 치료할 방법이 없는 거냐고, 엄마를 포기하시는거냐고, 우리는 엄마를 살리야된다 아직은 몬 보낸다고 사코 퇴원을  거하며 뭐라도 해달라 했다.


그간 사실은 엄마가 이 어이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감당이나 될까해서 며칠은 엄마에게 간암 사실을 쉬쉬하고 있었다가, 치료를 위해서는 본인도 알아야 한다는 의사님들의 말씀에 어렵게 어렵게, 간암 진단이 나온 5일되던 날 쯤에, 엄마에게도 사실을 알렸다.  5일간이 우리에게는 5년같이 길게 느껴졌다.

우리들 중에 그래도 가장 강단이 있는 2호 작은언니가 이 어려운 역할을 맡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엄마는 간암이란다," 고 시작했지만 조금 각색

"말기는 아니고 초기라서 치료를 잘 받으면 나을 수 있단다."했단다.

황당해하는 엄마에게 앞으로 의사님한테 화도 내지말고 말도 잘 듣고 병원생활도 열심히해서 치료를 잘 받아보자고 겨우겨우 설득시켜 놓았던 참이다.


엄마는 평소에도 늘, 당신은 아무리 아파도 병원서는 안 죽는다고 아프면 아픈대로 그냥 조용히 갈테니 혹시나 내가 아프더라도 애쓰지마라고 우리에게 신신당부를 하던 엄마였다. 그것이 마지막 순간을 대비하는 79세 엄마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신념이었다.


그런 신념갑자기 다 수정하여 현실을 받아들이고 아무리 몹쓸 병이라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마음을 고쳐 먹은지 하루? 이틀만이다. 병원에서의 시간은 어찌나 정신없이 지나가는지 어제인지 오늘인지 내일인지 아득한 시간들의 연속이다. 

이제는 정신줄을 제대로 잡고 의사님 말씀을 잘 받들어 반드시 다시 건강을 되찾으리란 열정으로 진료 및 모든 치료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리라는 다짐을 한 엄마였다. 그런데 갑자기 또 퇴원이라니. 응급실로 입원하여 간암말기 진단을 받은 지 딱 일주일 되는 날에 우리는 퇴원당했다.

 

표적항암치료제라는 것이 있단다. 요즘 의술은 희한하게도 약이 딱 암세포만 찾아내서 고넘만 죽인단다. 아침, 저녁으로 그 표적항암약을 2알씩 챙겨 먹는게 엄마에게 주어진 치료법이니 퇴원하고 집에 가서 편히 푹 쉬고 잘 먹으면서 고 독하고 영리한 약을 단디 챙겨먹으라는 처방을 받았다. 독한 약이니 기운이 몹시 빠질 것이라고 뭐든지 좋아하는 음식으로 야무지게 잘 챙겨 먹이라는 의사님의 당부를 받았지만 그 기운이 몹시 빠지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는 퇴원준비를 했다.


젊은이도 완치가 어렵다는 말기 간암환자가 된 엄마는 나이도 많고 당뇨, 고혈압도 있고해서 수술은 엄두도 못 다 했다. 쪽으로 나뉜  중에 반쪽는 아예 못 쓸 정도로 망가지고 반쪽은 다행히 기능이 남아 있다는데 이식 엄두를 낼 수 없다 했다. 다만 다행인 것은 수많은 검사들에서 간 이외에는 전이 없고 의사님이 보기에 엄마가 나이에 비해 단단하고 체력이 좋아서 항암치료는 가능할 것 같다고 항암을 열심히 해보자 했다. 

려워서 차마 우리들은 입밖으로 아무도 꺼내어 묻지 못 했지만 언제까지 생존이 가능할까에 대한 질문에 의사 아직 그런 얘기를 논할 단계가 아니라고 분명, 우리에게는 몹시도 희망적답을 했다. 그렇게 듣고 싶었 건지 몰라도 우리는 엄마의 치료에만 집중해서 최선을 다한다면, 엄마를 살릴 거 그때까지도 굳게 믿고 있었다.


퇴원 소식을 전하자, 믿지 못할 진단에 아직도 적응이 안되서인지, 참으로 더 개구리같아지신 엄마는

“인제 나는 죽어도 병원서 죽을라 캤는디 왜 나를 집에 보내냐”고 하며

“의사가 나는 그냥 죽어라하디? 손 쓸 방법도 없는 거면서 왜 그렇게 오만가지 검사를 다 한거냐”고 승질머리를 냈다.

며칠 우리가 쉬쉬하는 동안의 병원 생활에 눈치만 늘어서 없이 눈만 데굴데굴 굴리면서 우리와 의사 사이에서 승질만 날카로워 가던 엄마를 어루고 달래서 일주일만에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독한 표적항암제, 넥사바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엄마를 살려 것이라 굳게 믿 귀한 넥사바 2주일 치를 품에 고 불안하게 집으로 왔다.

 

나, 외래진료가 잡힌 2주 채우지 못하고 다시 일주일만에 새벽에 119를 타고 응급실 가서 복수를 뺐고, 다시 일주일이 지난 어느날, 정해진 외래 진료를 갔더니 의사님이 이래서는 안 되긋다고 갑자기 급격하게 환자의 상태가 너무 안좋아졌다고 다시 입원을 해야겠다는 날벼락같은 소식이 또 떨어졌다.

 첫 퇴원후 우리 독수리 4남매에다가 엄마의 남아있는 유일한 혈연지기인 이모까지 포함해 우리 다섯이서 돌아가면서 엄마옆에 24시간 붙어서 회복만을 굳게 믿으며 약이며 식단이며를 나름 야무지게 챙기고 있었는데 엇이 잘못되었 던 건지... 상태가 더 나빠졌다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래, 솔직히 완치는 아무도, 전혀 바라지 않았다.

완치기준을 5년으로 잡는다는 암을, 79세의 엄마에게 바라면 그것은 욕심이지. 우리도 그정도로 욕심을 내지도 않았다.

다만, 한 2년? 아니, 한 1년? 내년 10월에 엄마 80살 생일 파티때까지만 엄마와 함께 할 수 있기를, 다들 그 정도의 소박한 으로 먹고 사는 생업이외의 모든 일상은 잠시 접어두고 엄마병 치료에 집중하던 날들이었다.


의사님의 말씀이 첫 일주일은 넥사바효과가 에법 있었데 2주 차에는 간수치도 더 올라가고 무엇보다도 체력이 너무 떨어져서 이대로는 몸이 버텨내지 못 한다고 지금 당장, 오늘 저녁약부터 넥사바 먹기를 멈추고 입원 준비를 해서 들어 오고 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70키로에 육박하던 건장한 엄마의 몸이 넥사바 복용 후, 먹는 것도 힘들어하고, 암세포와 싸워내는 독한 약 운을 이겨 내느라 체력이 축나고 있었다. 암세포도, 암세포와 싸울 항암제까지 함께 견뎌내느라 매일을 독한 진통제를 달고 지내고 있었고, 그 바람에 단 2주 사이에 엄마는15키로의 체중이 빠져서 55키로의 앙상한 몸이 되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팔다리로 기운이 없어서 화장실을 가는 최소한의 걸음도 부축을 받아야 가능했다. 그러한 엄마를 지켜보며 우리의 정신도 말라 가던 때에 또 다시 입원명령이 떨어졌다. 다행인건지 불행인건지 우리는 가늠하기도 어려울 만큼 정신이 없던 때였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었으니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는 의사님의 지시가 최선이었다. 부랴부랴 또 병원 보따리를 쌌다.

 


두 번째 입원


그렇게 두번째 입원을 한지 2주일하고도 5일차.

절대 적응될 거 같지 않은 병원생활이더니, 어쩔수 없이 우리 독수리4남매엄마 암환자로써, 보호자로써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적응해 나갔다. 절대 그럴리없다고 부정하던 게 한 달되었나 싶은 데 말이다. 환자 보호자의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이고나니, 나는 어쩌면 엄마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이 나날들이 기록하고 싶어졌다. 돌이킬수 없 이 시간들이 간절해질 순간이 언젠가는 오겠지. 그때마다 지금의 엄마를 오롯이 다 기억해 내고 싶을 것이다. 것이, 엄마 모든 순간을 제대로 기억기 위해 지금을 기록하기, 이것이 내가 엄마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마지막 나의 임무같았다. 나는 그때서야 제대로 엄마 배속에 있는 암덩어리를 현실로 받아 들였던 것 같다.

 


1217호


그제서야 6인의 환자가 함께 치열하게 생존해 있는 내과 1217병동이 눈에 들어 왔다. 6인의 환자와 6인의 보호자가 생활하는 1217호실은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화장실하나, 왼쪽으로 간이 세면대 하나가 있고 양옆으로 세 칸씩 두 줄로 나뉘어 침대 6개가 놓여 있다. 가장 안쪽 면은 위쪽 전면이 통창이고 그 아랫쪽에 작게 A4용지만하게 여닫을 수있는 창이 있다.

거의 20여 일째 병원생활 중인 엄마의 자리는 1217호 왼쪽 줄에 창가쪽 3번 자리였다. 창가쪽 자리 아니면 안된다는 엄마의 고집에 더 좁고 불편한데도 의료보험 혜택이 안 되어10배 이상 비싼 2인실에서 이틀을 보낸 후 6인실 창가자리를 힘들게 사수했다.


우리와 마주보고 있는  침대의 환자는 지난 주에 들어왔는데 치매끼가 있는 만 93세, 일천구백이십팔년생.  일제강점기시대에 생존하셨던 할머니다. 낮에는 존재감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용하시다가 새벽 2시만 되면 병실 최고의 이야기꾼이 된다. 잠깐의 막힘도 없이 90여년의 인생사가 마치 한편의 대하소설처럼 줄줄 이어진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남의 인생사보다 지금 당장의 꿀잠이 더 급한 피곤한 보호자의 일상에도 당신의 기가 찬 인생살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물론 아침녁에는 피곤한 코골이들 속으로 다 잊혀져 사라져버릴 이야기들이지만은 마치 쇼미더머니에 나오는 화려한 랩퍼처럼 쉬지 않고 쏟아 내는 이야기들에 잠시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늘 같은 얘기면 또 시작이네, 싶은 지루함도 있으련만, 레파토리 그때그때마다 다르다. 몹시 다채로운 이야기꾼이시다.

 

건너건너 1번자리의 환자는 우리랑 같은 날에 들어 왔는데, 들어온 첫날부터 밤새 코를 골아서 우리 독수리4남매 단톡방에 (엄마의 간암 진단 이후로 우리집 단톡방에서 엄마를 빼고 따로 4남매만 단톡방을 열어 의사의 지시나 엄마 건강 상태를 공유해왔다. 처음에 엄마를 뺀 다른 방이 생겼다는 사실을 들켰을 때, 엄마는 극대노했지만, 이내 엄마는 폰을 할 기운도 없어 핸드폰을 거의 꺼져 있었다.) 그러한 비밀 단톡방에 그 날은

[진상할머니출현~ 오늘밤 잠은 다잤음. 다들 집에서 충분한 수면을 취하시길] 이라는 안내를 띄우고 정황 보고를 해대며 툴툴거렸다.


그러나 이틀 만에 이 할머니가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코를 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저렇게 잘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코를 고는 것이 분명히 정상은 아니다싶은 이상한 기분이 몰려 왔다. 잠깐 딸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렸는데 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드르렁드르렁거리고, 

심지어는 간호사가 혈관을 찾기가 힘들다며 가는 환자의 팔뚝에 수차례 주사바늘을 찌르고 있는데도 드르렁드르렁, 계속 코를 골았다.

건너편 가운데에 5번 자리 24시간을 거의 의식이 없는 환자 링거 주사바늘을 다시 꼽을 때면 아프다고 신음 소리는 내는 데 말이다.


저렇게 잠을 잘 수가 있나싶어서, 옆에 옆에서 듣고 있는 우리가 다 걱정이 될 쯤에 그게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사는 신경정신과로 보낼려고 하 보호자인 딸은 우리 엄마는 정상인데 왜 이상한 사람 취급하냐 쨘한 다툼이 있은 이후로 3주차인 지금까지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 아직도 주무시고 계신다.

열흘 되는 어느 날인가 잠시 길게 깼는데 마침 옆에 있던 딸과 아들을 보자 영문도 모르고 24시간

을 자고 있는 환자 그렇게 서럽게 흐느끼며 울서 나까지 숙연해졌다. 잠도 잠이지만 그렇게 길게 오랫동안 코를 골다 보면 몸도 분명 어딘가는 지치고 힘이 들 것이다. 힘겹게 들리는 그 흐느낌 옆에 옆에 누워 있는 79세의 간암말기 환자의 보호

자인 나도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잠깐 얘기한 건너편 가운데에 5번 자리에 의식이 없는 환자는 서울서 큰 병원에서 무슨 어마무시한 수술을 여러 차례하고서는 딸의 집과 가까운 이 병원에서 잠시 지내기로 했다는데,

무슨 사연인지 다시 3일 만 서울의 유명하다는 어느 병원으로 아직 의식이 돌아 오지 않는 환자를 데리고 다시 떠났다. 

병실생활과 어울리지 않는 멋쟁이 옷 입고 있던 딸은 "돌파리의사들!" 이라는 서글프고 불안한 한마디를 1217호 나머지 환자와 보호자들의 뇌리에 박아두고서 모질게 떠났다.


그래도 급한대로 119 구급차를 환자인 엄마 홀로 타고 온 것치고는, 이 병원이 간암으로는 우리 지역내에서는 젤 낫다는 소문이 있는 대학병원

 물론 암만 전문으로 한다는 암센터가 있는 대학 병원 있지만 암환자만 오롯이 모여 있어 정신적으로 암울했었다 시누들이 암환자

였던 큰언니가 알려주었고 그 대학병원은 지금 코로나 전담 병원인 것도 신경쓰이니, 암센터가 있는 병원을 옮겨서 엄마를 힘들고 번거롭게 할 일은 하지 기로 했다. 다시 시작할 그 수많은 검사들이 진이 빠질 것이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여기 Y대 대학병원의 의사님을 무조건 전적으로 믿고 따르기로 결심했는데, 돌파리들! 이라는 불길하고도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 붓는 상처를 주고서 5번환자는 떠났다.


그후로 가운데 5번 자리의 주인은 자주 바꿨다. 요란스럽고도 고요한 1217병실에 딱 이틀있다가 퇴원한 썬구리할머니는, 사실은 멋쟁이가 아니고 무슨 눈수술을 해서 대낮에도 선그라스를 끼고 생활해야 하고 낮에 불을 켜 놓으면 짜증낸다. 자의는 아니지만 어쨋든 멋쟁이로 지정된 썬구리 할매는 첫  밤부터 강력한 포스로 1번자리 24시간  고는 딸에게 시끄랴 죽긋다며 한숨도 못잤다고 언성을 높였다. 고개를 옆으로 뉘여라도 보라고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자, 1번 환자의 보호자인 딸은 옆으로 뉘이면 호흡이 곤란해져서 안된다고 맞섰다. 저리도 시끄러우면 양심껏 1인실을 가야하지 않냐믄서 코골이 환자와 딸의 마음을 할퀴었다.


1번과 5번 자리의 신경전이 있거나 말거나 우리들은 이제 며칠 새 적응이 되어 그 24시간의 코골이 속에서도 잠깐씩 졸 수 있게 되었을 때인지라, 나는 오히려 그 썬구리 할머니의 덩치 좋은 보호자, 아들이 지나갈 때마다 슬리퍼를 제대로 신지 않아 뒷 발에 탈탈탈거리며 끌고 가는  소리가 너무 신경쓰이던 참이었는데, 이틀만에 퇴원해 주셔서 부럽기도 하지만 참 다행이었다.

더 이상 무의미하고 보는 사람도 진이 빠지는 신경전도 없을테니 1217호가 잠시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썬구리할머니가 나간 뒤에는 할머니라기엔 젊고 아줌마라기엔 나이든 곱은 할머니가 사박사박 걸어서 그 5번 자리에 입원을 하셨는데, 의사님들께서 수시로 왔다갔다 하며 하는 이야기들이 담낭암에, 매독에, 머시라머시라 무시무시한 검사들이 줄지어 해봐야 한단다.

헌데 그 모든 검사를 보호자없이 혼자서 하려고 나서는 할머니에게 간호사와 의사가 내일은 검사할 것이 많아서 보호자가 꼭 있어야한다고 당부하고 간다. 곱은 할머니가 아들과 딸들에게 번갈아 통화를 하며 의사의 당부를 전하는데,

“보영아, 내일은 바쁘냐, 내일 병원에 좀 와 있어주면 안 되겠어? 아, 내일 바닷가 놀러 간다고? 알았어. 그러믄 필요한 일 생길때 다시 연락할께.”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그러곤 바로 앞에 있는  2번 자리의 간병인에게 간병비는 하루에 얼마냐고 꼬치꼬치 캐어 묻더니, 그 후로 며칠간은 꼼짝 않고 누워만 있어서 우리 모두는 그새, 엄마처럼 거동이 불편한 상태가 되어 버렸나 했다.


그러다 어느 밤에 화장실 다녀오다 곱디 고은 5번 할머니랑 딱 마주쳤고 여전히 사박사박 잘 다니시고 있었다. 며칠간 정없는 자식들땜에 혼자 속않이하신 듯해서 쨘했다. 그래도 그 할머니는 젊어 그런가 수술이 가능하대고 모레로 수술 날짜까지 잡혔다고 해서 쨘한 마음은 잠시 내려놓았다. 얼릉 나아서 돌아가서 정없는 자식놈들에게 복수해주기를 바라며 잠시 딸이 아닌 엄마의 마음이 되어 보았다.


하지만 오늘 다시 사연을 들어보니 그 복수도 녹록치가 않아 뵈 것이, 당장에 내일 수술을 하려면 수술동의서를 써 줘야 해서 보호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아들과 딸들이 비협조적이었다. 자식들은 딱 시간을 정해, 정해진 한, 두 시간정도만 병원에 와 겠다고 하고, 의사님은 많은 수술 일정때문에 딱 정해진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며, 수술도 몇시간이나 걸릴 지 모르니, 내일은 보호자가 종일 상주해야

한다고 한다. 아들과 딸들은 언제 가야하나고 화를 내고, 의사, 간호사는 모른다고만 하니 곱디곱은 할머니가 다시 고민에 휩싸인 듯 보다. 고민은 잠시 접어두고 또 언제 뵐 지는 모르지만 수술 무사히 잘 받으셔서 남은 여생곱게 잘 마무리하시면 좋겠다고 오지을 떨면잠시 졸아 본다.

 

1217병실에서 남편이 찾아 오는 할머니는 코골이할머니뿐이다. 엄마는 남편이 - 우리 독수리 4남매의 아부지가 7년 전 젊디 젊은 70세에 갑작스레 떠나셨고 다른 할머님들은 남편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아무튼 24시간을 코고는 할머니의 남편은 종종 찾아오시는데, 잠만 자는 아내의 손을 꼬옥 붙잡고서

“혜원아, 혜원아~ 사랑한다. 내 왔다. 사랑한다고, 사랑해. 눈을 떠바. ” 를 몇 분씩 절절하게 외치다 가신다. 참 사랑꾼이시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던 어느 날, 저녁에 집에서 오랜만에 만난 남편에게 1217호의 로맨티스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편, 니는 몇살까지 살꺼고?” 하니 남편은 잠시 생각하다가

“어... 한 80살 정도 살면 안되긋나.”한다.

그 대답을 듣고 나지막히 나는,

“그럼 나는 75세까지만 살래.(남편과 나는 딱 5살 차이이다.) 나는 당신하고 같이 죽을란다. 내가 아프믄 애들 시키지 말고 내 병간호는 당신이 해도이. 내 기저귀도 갈고 똥도 닦아주고 당신이 하는 기 내 맘이 편큿다. 해 줄수있긋나?” 했다.

“내가 니 아플 때까지 살아있으믄 당연히 내가 해주야지. 암, 그래야지.”

“우리는 애들 고생시키지말고. 우리는 우리 둘이 아프고 치우자, 마. 우리 둘이 서로 병수발들어 주며 같이 늙고 같이 죽어뿌자.” 하며 나는 남편에게,

“당신한테는 병수발을 좀 받아도 한나도 안 미안할 거같다.” 며 웃었다.



두번째 입원 후, 3주를 꽉 채운 어느 월요일.

주말 토요일, 일요일을 집에서 보내고 월요일 오후에 다시 병실에 왔다.

보호자 출입증을 2호, 작은 언니에게 건네받는데

“엄마 지금, 기분이 많이 안좋데이. 혈당이 높다캐서 카는가, 옆에 할머니때메 잠을 못자서 카는강, 아침부터 기분 안 좋았는데, 오전에 배가 먹고 싶다해서 언니 오는 길에 사오라 캤는디 안 사와서 삐칫어.”한다.

“요즘에 배가 있나, 없응께. 안사왔긋지. 알았다. 내 잘 달개보께.” 하면서 출입증을 건네 받았다.


이틀만에 병실에 오니 그새 앞자리 95세 랩퍼 할머니는 퇴원하시고 낯선 환자도 보이고 병실이 살짝 낯설다. 엄마 옆에 2번 자리에 새로온 환자는 아래 금요일 밤에 오는 것만 봤는데, 병실에 오자말자 시원하게 토를 한판하면서 신고식을 하는  정신 없는 사이에 오빠와 교대했다.


그날 낮에 2번자리 환자 침대가 도착하기 전에 간병인이 먼저 와서1217호 병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옆자리인 우리에게 와서는

“여는 조용한 병실이네, 우리 할매는 치매끼도 있고 마이 아파서 소리도 지르고 시끄럽고 카는데 우짜지, 클났네.” 함서 살살 약을 치고 간다.

병원생활 일 주 차에는 순진하게 웃으며 “편찮아서 그러신데요. 뭘요.” 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전혀 괜찮치 않지만, 겉으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주었었겠지만, 병원 짬밥도 서너 주차 되고 나니, 이제는 나도 같이 실실 웃으며

“아이고, 울엄마도 아파서긍가, 옆에서 시끄릅게하믄 막 씅질부리고 같이 소리지르고 카는데, 우짜지예?” 카미 찡긋 웃어보였다.


24시간을 병원에서 생활하는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간병인 사이에는 얽키고 섥힌 은근한 기싸움이 존재한다. 불을 끄는 타이밍, 에어컨 강약 조절, 창문 환기, 화장실 순번 등등. 특히나 누군가의 작은 소음이 나의 짬짬이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가에 다들 몹시도 예민하다. 가득이나 아프고 지치는 병원생활에서 특히 불필요한 소음에 서로 날카롭다. 허나 날카로움 속에서도 나름의 규칙은 생긴다. 그 규칙의 첫 번째 원칙은 아픔에는 장사없다는 것이다.

꾀병아니고 진짜 파서 밤새 끙끙 앓는 소리에는 아무도 불평할 수가 없다.


새벽내내 시끄럽던 95세 랩퍼 할머니도 다음날 오전에 간병인에게 간밤의 행패를 전해 듣고는 나머지 5명의 환자를 향해 허공에 대고 정중하게 사과를 하곤 했다.

“아이고,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죄송합니다. 밤에 지 때문에 잠들 설치셨지예? 이일을 우얄꼬?” 하시며 송구스러워하시면 밤새 잠을 설친 붉은 눈을 쓱쓱 비비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격려와 응원을 속으로만 한다. 그 응원과 격려는 절대 밖으로 드러내놓지는 않는다.

밖으로 드러내어 놓는 순간, 당신들의 이 허망한 고통의 순간들을 현실로 인정하게 될 거 같아서 그저 속으로만 지금은 좀 아프고 불편하여 원래의 당신들이 아닌 다른 모습들로 여기 모여 이 병마와 싸우고는 있지만은 이내, 곧 당신들의 가장 화려하고 찬란했던 시절들로 돌아가리라. 지금의 이 고통의 시간들은 다 낫기만 하고 나면 바람결에 잊혀지고 사라져 버릴 신기루같은 것이기를 깊 간절하게 응원만 보낸다.

 


토사물과 함께 등장한 우리 옆자리 2번 할머니는 주말 이틀간 내가 겪어보지 못해서 몰랐는데,

독수리 3호인 오빠가, 순하디 순해 빠진 48세 노총각인 울 오빠- 최근에 엄마덕분에 기저귀 착용법에 관 연구를 시작한 뽀시랍디 보랍은 엄마의 하나뿐인 4대 독자 아들 - 오빠가 카톡으로

[옆침대 할매랑 눈 마주치지마래이. 아들이 몇 인교? 카믄 시작되는거니까 피해라. 무조건 조심해라. 말이 많고 시끄럽은 것은 개안은데 싸납드라. 소리도 잘 지르고 무서버~]하면서 주의를 주었다.


그러고보니 그전에 2번 자리에 있던 환자도 말이 거칠어서 욕쟁이로 통했는디, 그 자리는 거친 할머니들의 자리인가.

그 할머니 나가자말자, 다들

“욕쟁이 할매갔네~ 인자 밤에 하는 소리 안 들려서 좀 자긋네.” 하며 웃었더랜다.

하기사 우리 엄마도 거칠기로는 어데 뒤질 사람이 아닌데 간암말기라는 흉악한 진단을 받고 정신없이 아파보기도 하더니, 살짝 소심해지기도 하고 성질도 많이 순해지셨다. 지금 1217호에서는 안쪽 자리를 조용히 지키고 있는 가장 점잖한 환자였다. 가끔 커튼이 열릴 때면 다들 궁금한 듯 엄마쪽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면 엄마는 고개에 힘을 딱 주며 아프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단정한 모습을 보여 주려 애쓰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힘을 빼지 않고 다른 이에게 깊은 관심을 이내 거둔다.

첫입원 때만해도 온 병실을 다 휘저으며 모든 환자의 가정조사를 하고 다니며 거침없는 입담으로 주변 환자에게 괜히 애먼소리 하는 것을 우리가 말리느라 애를 먹었었더랬는데 말이다. 암진단을 들은 이후에 엄마는 다른 환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거침없이 남에게 함부 말 잘하기로 소문난 엄마도 이렇게 점잖해 졌는데, 아직도 싸납은 할머니들은 보면 진짜로 정신줄을 놓을 만큼 몸이 많이 상했거나 아니면 아직은 살 만해서 기운이 남아서 진상을 직이거나 딱, 둘 중에 하나이다.


엄마의 경우는 다행히 지금은 둘 다 해당이 없지만 새로운 진상이 생겼다. 복수가 차올라서 배가 산만큼 부풀어 오르면 돌아눕기도 힘들고 배가 부르니 약을 먹는 것도 고역일 정도로 먹지를 못 하고 있다가, 주사기를 배에 꼽아 복수를 몇 리터씩 내어 배가 다시 납작해지면 어김없이 먹는 것에 집착하는 식탐이 생기기 시작했다.

평소에 먹는 낙으로 사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탐을 이렇게 조절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독수리4남매와 눈만 마주치면 시도 때도없이 "맛난거 사와~", "만난 거 머 가지고 왔어?"한다.

이성을 잃은 식탐이라도 머든 잘 먹을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죽만 겨우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허약해진 몸이라 맛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많지가 않다.


 와중에 혈당관리도 해야 해서 단 것을 먹을 수 없는데 식혜를 내내 찾으며 집착한다든가,

복수가 차는 간암환자는 하루 1그램이하의 소금을 섭취해야 하는데 짭쪼름한 명란젓을 찾는다든가, 새벽 2시에 질긴 도가니탕을 먹지도 못 하면서 내놓으라고 한다든가,

그런 새로운 진상이 생겼다. 그러면서 병원에서 제공되는 환자가 먹기 좋게 영양균형을 딱 맞춰 준비해주는 병원죽과 반찬은 간이 되지 않았다고 거의 먹지 않았다.


복수가 빠지고 먹는 게 편할 때 단백질 위주로 고기를 잘 먹여야 근육도 생기고 근육이 생겨야 복수도 덜 찬다해서 좋아하던 미역국, 소고기죽, 전복죽, 이것저것 고단백식을 먹기 좋게 준비해와봐도, 쉬이 먹지 않고 먹을 수 없는 여러 가지 것들만 찾으신다.

며칠전 93세 할머니는 자식들이 잘 안사준다며 귀하게 아껴 먹는다는 뉴케어 환자식을 집에 박스채 재어 놓아도 엄마는 환자식을 무슨 독한 약인 양 먹기 힘들어한다.




오늘은 다진 소고기370그램, 돼지고기270그램과 온갖 야채들을 다져넣어 떡갈비를 심심하게 구워서 들고 왔다. 3일 전에 복수를 4.7리터 뽑았는데  단새 또 복수가 차올랐는지 배가 에법 다시 불러왔다. 작은 숟가락 크기의 떡갈비 한 조각을 채 다 먹지 않고 죽 서너 숟가락 뜨고는 식판을 물린다.

낮에 큰언니가 배를 안 사왔다고 극대노했다기에 배를 꺼내 주려니 다시 넣으란다. 딱딱해서 못 먹겠더라고. 그러니 요즘 철에 말하고 물 많은 배를 어디서 찾누. 돌배뿐이지.

독수리 3호, 오빠가 엄마한테 배를 못 주고 나서니, 출근 길에 발길이 안 떨어진다고 근처 시장을 두어 바퀴 돌돌아 어디선가 배를 하나 구해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갔단다.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 즙으로 내서 먹어보자해도 뒤돌아 눕는다.


러고 있는 와중에 옆환자는 또

“이 봐요, 아주매? 여기가 어딘교? 여기가 무슨 공장입니까?” 한다.

오늘만 벌써, 아니지. 내가  지 2시간이 채 안되었는데 그새 벌써 10번 넘게 한 멘트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주매~ 아주매요 내  일으켜줘보소~”하고 소리친다. 옆에 있던 간병사가 

“일나믄 안돼요. 허리 아파서 일나믄 또 허리에 수술해야해.” 하니

“승찬아~~~~ 승찬아~~ ”를 목 놓아 외치며 꽥꽥 토악질까지 해대며 침대서 내려오려고 바둥바둥 안간힘을 쓰는 소리가 들린다. 심상찮은 외침과 실갱이를 눈치챈 간호사 급히 달려와

“할머니 이러시면안되요. 다른 환자분들 주무시는데 조용해해요.” 하니 목소리는 더 거칠고 높아지고 토악질도 심해진다. 간병인이 빠르게 승찬이에게 전화를 걸어 귀에 대어 주니

“누고? 승찬이가? 어디고? 내 여 갇혀있다. 여가 어딘지를 모르긋다. 내 좀 구하러 온느라~” 하고 온 병원이 떠나갈듯 다급하게 외쳐댄다.

수화기 넘어 승찬이는

“엄마, 엄마. 또 왜이카노, 내 힘들게 안하기로 약속했잖아. 좀있다 퇴근하고 갈께. 조금만 기다리라.”하고 달래도

“여가 어딘지를 모르겠다. 내 잡히있다. 내 좀 살리도~”하고 소리치고 수화기너머 남자의 목소리는 더 단호하지만 혼이 쏙 빠진 채로

“엄마, 거기 병원이다. 잡힌거 아니다. 내 지금 가니까. 기다리라.”

“여 병원아니다. 여 여염집이다. 내 잽히가있다고, 지금.” 그러고는 꽤애액액액~~~ 토악질을 하며

“나는 내 집에 갈란다. 와 여서 나를 자라카노? 나는 내 집에서 잘란다. 이것들아~~”하는 외침이 1217호 병실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그러고도 그  , 승찬이는 오지 않았고 승찬어매는 30여 분을 더 끝이 안 뵈는 듯한 실갱이를 벌이다가 막 잠이 든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미 생사의 고비에서 간신히 힘을 내어 사보다는 생을 붙들겠노라 다짐하고 있을 우리 엄마가, 이 서글픈 모든 소리를 다 듣고 있을게 걱정이다. 간간히 한번씩 쌩뚱맞은 소리를 하기도 하고 괜한 억지 식탐이 부려 정신줄까지 놓으시려나 싶어 우리 독수리4남의 심장을 덜컥 내려 앉게 하기도 하지만은, 아직까지는 정신은 너무나 온전한 엄마이기에 이대로 이 아프고도 험한 말들을 가감없이 바로 옆에서 스테레오로 듣는 게 너무 싫었다.

“엄마, 너무 시끄럽은데 찬원이 노래 틀어서 귀에 꼽아주까?”귀에 대고 속삭였다.

“괜찮다. 저런 정신 없는 할매 소리들은 하도 들어서 인자 적응이 다 되었다. 니나 좀 자라” 하는 엄마.

참 희안한 일이다. 간병인들이나 간호사들이 수다를 떨거나 먼가를 한다고 뽀시락거리는 소리에는 그렇게 날카롭게 소리지르고 쌩짜증을 내는 엄마인데, 찬이어매의 저 처절하고 끝도 안 보이는 허망한 외침은 같은 아픈 이의 입장이다 싶은지, 병원 전체를 떠나갈 듯한 행패 커튼 한 장을 사이에 둔 바로  침대에서 펼쳐 내 놓아도 한없이 너그럽다.

 

눈치도 없이 오늘따라 병실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몹시도 찬란하면서도 동시에 서글프도록 고요하다.

주책없이 멍하니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

이놈의 비는 언제 그치려나...

매거진의 이전글 프롤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