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속의 그대만 바라고 살다가 죽을 현실
유난히 한국 뉴스에서 접하는 문구는 "자기 관리"다. 60대 여성이 아직도 모델일을 하고 있음에 찬사를 보내며 자기 관리를 잘했다고 하고 무수한 연예인들의 몸을 극찬하며 근육을 잘 키워서, 살이 찌지 않아서, 젊음을 유지해서 칭찬을 한다. "자기 관리"는 결국 남들에게 칭찬받는 도구로 활용되어 정작 "자기 관리"를 잘 한 이들에게 훈장으로 쥐어진다. 개인의 외모가 남들에게 "인정"과 "승인"이 되어버린 것이 신기할 뿐이다.
관리의 대상은 더 이상 내가 아닌 남들의 의견으로 영역이 넓혀진다. 네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보다 더 중요한 세상은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더욱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렸다.
내가 괜찮아야 괜찮은 게 아니라 남이 괜찮아야 괜찮은 것이 되어버리자 혼동이 시작된다. 나 스스로의 가치를 남들이 정해주고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소셜미디어는 남들의 의견을 묻는데 미쳐있다.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가방을 매치할지 머리는 어떻게 할지 소셜 미디어가 묻고 대답을 하고 그 안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길 잃은 양들이 가득하다. 그뿐인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 계속 다녀야 할지 어느 대학을 가야 할지 어떤 약을 먹어야 할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할지 끊임없이 묻는다.
직접 해보며 시행착오를 겪기보다 누군가에게 묻는 것의 심리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제대로 실수 없이 잘하고 싶어서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최선의 것을 선택하고 싶은 그 마음이 너무 커서이다. 그 마음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남들이 먼저 간 길을 보고 학습한다. 몇 년에 혹은 평생에 걸쳐져 일어난 일을 쇼츠로 몇 초 몇 분 안에 파악하려 든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이십 대 초반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점은 그들이 정말 가지고 싶어 하는 건 자기 확신이라는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이 내가 사는 삶의 방식이 나의 외모가 나의 내면이 불안하지 않고 확실하고 확신으로 가득 차길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큰 줄 아는가? 그 마음을 알아주고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멘토가 소셜미디어가 되었으니 불안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몇 분 몇 초의 영상으로 불안을 달래기에 인생은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학생은 내게 말했다.
나 자신의 불안과 의심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이다.
"그거 불가능해"
"그럴까요?"
"응... 사람은 불안과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어. 살아있는 한. 그게 삶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딪혀보고 아파보고 상처도 받아보고 그러다가 네가 원하고 기대했던 일을 성취해 보고... 그럼 근육이 생겨. 어른 근육. 그런 근육이 생기면서 얻은 너의 상처도 흉터도 결국 어려움을 이겨내며 행복은 지키는데 쓰일 거야. 그러기 위해선 살아야 해. 적극적으로... 네가 원하는 삶. 네가 살고 싶은 삶"
남들이 인정해 주는 삶이 아니라 내가 인정하는 삶.
그게 진정한 승리자의 삶일 테다.
누구나 처음은 초라하다.
처음부터 화려한 사람들은 가지고 태어난 게 화려해서 가능한 일이지만 기억하라.
그들 스스로 이룬 것이 없을수록 불안의 깊이는 더욱 크다는 걸.
처음은 초라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성경도 말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