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고통, 불안, 고통, 위산과다
제대로 아프기 시작한 건 나흘 전쯤이다. 병원일을 하며 학교 개강을 맞추려니 잠은 부족하고 체력은 바닥이 나서 카페인을 연료처럼 주입해줬다. 올 것이 온건가 싶어 코로나 테스트를 해보지만 계속 음성이 나온다. 약을 털어 넣고 영양제를 먹고 비타민C를 먹고 다시 카페인을 들이마시는 일을 반복하니 좋아지려다가 다시 나빠지기를 반복한다. 쉬질 못하니 당연 몸은 피곤하다.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나이지만, 생각해보면 피곤이란 단어는 아프고 잠을 못 잔 상태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일상의 태도처럼도 쓰이는 것 같다.
실질적으로 누군가와의 대화 속에서 혼자 내뱉는 깊은 한숨에서 집중할 수 없는 머릿속에서 피곤함은 태도로, 생각으로, 말투로도 담긴다. 쉼이 없는 사회에서 피곤과 긴장은 찰떡궁합처럼 늘 함께 다니고 그걸 견뎌주는 건 체력인데 그 체력이 바닥나면 몸은 아프다. 그게 지금의 내 상태다. 피곤과 긴장은 몸도 마음도 머리도 쉬지 못하게 한다.
감기에 걸린 체 골골 거리며 줄줄 흐르는 코를 풀다 문득 리얼리티 쇼에 나왔던 참가자와 심사위원들의 대화가 생각난다. 참가자가 아프기라도 하면 심사위원들은 네가 아픈 건 자기 관리를 못해서라고 쌀쌀맞게 쏘아붙이고 참가자는 자기 관리도 못한 무능한 사람처럼 카메라에 비친다. 마치 냉정한 경쟁사회에서 감기는 무능하고 관리 못하는 사람들이나 걸리는 나쁜 것처럼 말이다. 열심히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아서 그 열심과 긴장감이 감기로 몸살로 왔다고 안쓰럽게 봐주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 스스로가 짠해진다. 정말 온몸의 힘을 싹싹 긁어 모아 짜내서 살아가고 있는 내게 자기 관리를 못해서 아픈 거라 누군가가 쏘아붙인다면 그의 멱살이라도 붙잡고 흔들어버릴 것 같으니까 말이다.
감기에 걸려 온갖 다양한 약을 입에 털어 넣다 보면 작가 Beverly Fishman의 작품이 생각난다. 사실 그녀의 작품을 알고 난 후부터 내게 알약은 그냥 약이 아닌 하나의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유난히 깡마르고 깐깐했던 작가는 일상의 알약을 모티브로 여러 종류의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세상에는 수천수만 가지의 약이 있고 그들 고유의 모양과 색상이 있지 않는가. 작가는 그런 약들의 모양과 색상 그리고 그들이 지닌 고유의 기능을 매우 매력 있게 표현한다. 유리로 여러 색상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알약은 실제 모양보다 훨씬 크고 색을 강렬하다 못해 현란하기까지 하다.
실제 저런 색감의 알약이 존재한다면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 약일까?
대부분 사람들이 약을 찾는 이유는 육체적인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이지만, 사실 현대 사회에서 약이 지닌 의미는 치료에서 더 나아가 육체를 쾌락으로 이끄는 방법으로 쓰여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미국 응급실에 오는 이들의 대부분이 약물중독자라는 말이 있을 만큼, 약은 그 목적에서 벗어나 더 이상 완화와 치유의 목적으로 쓰이지 않을 때, 중독으로 이끌고 파멸로 이끈다.
무엇이든 자신의 목적과 기능을 벗어나면, 그것은 위험한 일에 쓰인다.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발명품들 중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연장하는데 쓰였지만, 그 선을 벗어나면 생명을 죽이는 데 사용되지 않나. 작가 만든 작품은 단순히 약이 지닌 기능을 넘어서서 약이 지닌 상징적인 의미를 두는 것 같다.
그래서 Beverly Fishman의 작품은 자극적으로 아름다운데 위험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예쁘지만 알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궁금한, 복용하지 않으면 모를 어떤 신비한 마법의 알약처럼 관객을 모은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기초적은 도형에다 형광색을 겹겹이 둘러 단순하지만 톡톡 튀는 매력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조심스럽다. 이건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쓰일 것인가?
그녀는 알약의 이름 대신 이렇게 작품 제목을 지었다.
고통, 고통, 불안, 고통, 위산과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제목인가. 진심 제약회사들이 이렇게 알약 이름을 지었다면, 수많은 의대 약대생들이 밤을 지새우며 어려운 이름과 기능 외우느냐 고생을 덜했을 것 아닌가!
Untitled (Pain, Pain, Anxiety, Pain, GERD), 2022
내 알약은 피곤, 콧물, 콧물, 기침이다.
코는 헐었고 훌쩍임을 끝이 없다.
내가 복용한 감기약은.... 별 효과가 없는 모양이지만 글을 쓸 만큼의 체력은 만들어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 약도 해결해 줄 수 없는 호사스러운 잠을 청하려 한다.
모두 꿀잠 꿀잠 돼지꿈 꿀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