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 관리와 카드모집인 알바 이야기
쓰리잡 초기 두 달은 하루하루를 참 억세게 보냈다. 월초에 있었던 일이 몇 달 전 일로 느껴질 만큼 찰진 나날이었다. 몸은 많이 피곤했고 일은 가끔 꼬였지만 다행히 다른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면서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한다는 것은 역시 과욕이었다는 결론이 났다. 사실은 단순 계산만으로도 불가능한 것이긴 했다.
예를 들어 정수기 관리의 경우, 초보이므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고객과 방문 약속을 잡은 후 차를 몰고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주소지에 도착하여 주차를 한 다음 고객 집에 들어가 공을 들여 정수기 점검을 하고 필터를 가는 일련의 과정을 따져보면 건당 한 시간은 잡아야 했다. 월 200군데를 처리하기 위해선 총 200시간이 걸린다. 즉 하루 8시간씩 25일을 꼬박 써야 한다. 정수기 일만 갖고도 토요일까지 일해야 한다. 쓰리잡을 하려면 당분간 주말은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실제 일을 시작하면 이보다는 시간이 적게 걸린다. 왜냐하면 한 집에 정수기와 비데, 공기청정기 등 여러 개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고, 여러 제품의 점검 주기가 겹치면 한 번 갈 때 두 개 이상 처리할 수 있다. 그러면 개당 처리 시간이 줄고 시간당 수입도 그만큼 느는 셈이 된다. 관리 수당은 제품당 계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보자는 여유 있게 잡는 게 맞다. 내 경우는 그 계산마저 오차가 컸다.
처음엔 한 달 30일을 알뜰하게 쓰면 되리라 예상했었다. 정수기의 경우는, 선배들이 '초기에는 영업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라고 하니 실수 없이 잘 해내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었다. 카드 영업은 당장 생활비의 상당 부분을 메우고 있으니, 의무 방어 수준만 어쨌든 해 보자고 했었다. 그래도 저녁 7시 이후에는 집에 들어갈 수 있으니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해가면 어찌어찌 꾸려가리라 생각했었다. 순진하고도 어리석은 계산법이었다. '평생 영업을 해온 사람 맞나?'
현실에서의 시간은 초기 계산의 배가 들었다. 정수기는 고객과 약속을 잡는 시간만 총량 며칠을 잡아야 했다. 고객과 친해지려면 신변잡기와 같은 대화도 나누어야 하니 방문 시간 자체가 길어지기도 했다. 고객이 정수기에 문제가 생겼다고 부르면 다시 가야 하는 일도 빈번했다. 매월 교육도 받아야 했다. 결국 나는 내가담당할 고객 수를 줄여야 했다.
카드 모집은 친지 영업부터 시작했으니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친지에게 전화해서 카드 만들라는 말만 달랑 하고 끝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다를 떨다 보면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기존의 광고 영업도 해야 하고, 주부로서 아침저녁으로 집안일도 해야 하니 시간상 일정이 헝클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려했던 대로 결국 사고가 터졌다.
카드 모집에서 대필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일정 개수를 채우지 못하면 추가 지원 수십 만 원이 사라진다는 소리에 무조건 목표량을 채우려다 그렇게 됐다.
친지 한 명에게 연락했는데 자기는 그 카드가 있으니 부인 걸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부인과 통화를 했는데 좋다고 했다. 주부의 카드 발급 조건은 남편의 수입이다. 따라서 부인한테 카드가 나오려면 남편의 동의가 우선이다. 그렇다면 남편이 부인 카드를 대신 만들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무심코 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대필 사고가 된다.
기본적으로 카드 신청 시 서명은 반드시 본인이 해야 한다. 그전에 남편의 동의가 우선이지만 서명만은 부인이 해야 한다. 나는 어차피 부인이 동의하고 진행한 일이므로 남편에게 서명까지 시키고 서둘러 카드 신청을 마무리했다.
문제는 다음날, 카드 심사팀에서 부인한테 전화를 걸어 직접 서명했는지 물었다. 부인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남편이 다 알아서 했다고. 본인은 카드 같은 거 잘 몰라서 남편한테 다 맡겼다고.
결국 대필 사건으로 떴고 계약은 무효가 되었으며 나는 벌금을 물고 나에 대한 관리를 책임지던 윗분들은 회사로부터 벌점을 받아 인사고과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들었다.
일정에 너무 쫓기다 보니 나는 그 부인한테 서명은 직접 했다고 대답하라고 주지 시키는 걸 깜박했다. 물론 원칙대로 그 부인을 직접 만나 사인을 받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고객의 신용 정보와 관련해서는 아무리 선의라 해도 편법을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는 쓰리잡의 과부하가 문제였다는 생각에 카드 모집인 영업은 그만두기로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일주일에 하루도 못 쉰다는 게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정수기만 집중하기로 했다. 정수기도 수입이 충분했던 것은 아니다. 사무실의 다른 선배들은 대개 월 이삼백만 원은 번다고 하고 가끔은 오백만 원 이상 올린 누군가가 한 턱 내는 달도 있었다. 하지만 초보인 나는 시간 대비 노임을 따져보니 최저시급이 안 나왔다. 차량 운행은 비용에 넣지 않고도 그러하니 완전 적자였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내가 관리하던 고객으로부터 새로운 렌탈과 판매가 일어나 결국에는 목표액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열심히 해 보기로 했다. 아쉽지만 그 희망도 1년 후엔 접고 말았다.
카드 교육받을 때 들은 말이 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혼을 쏟아부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고 혼을 쏟아부었다는 말은 내가 나한테 감동을 받았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딴생각을 했다.
'최선을 다하면서도 지치지 않으려면 생활비는 나와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나는 영업 아르바이트에 혼을 쏟아붓지 못했다. 나의 혼은 그곳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