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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좋아해 준 정수기 고객님들

정수기 관리 알바 이야기

by 이상은

정수기 일은 처음 예상한 대로 관리만 해서는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최저 시급이 안 나왔다. 수입을 늘리려면 역시 영업을 잘해야 했다. 렌탈 만기가 된 고객들로부터 연장 계약을 하거나 신규 설치 건을 많이 해야 돈이 되었다.


영업을 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과거에 많이 생각했었다. 내 결론은 '성심성의껏'이었다. 성심껏 하다 보면 신뢰가 생기고 매출로 이어진다는 논리였다. 영업을 아주 잘 하진 못했지만 평타는 쳤다.

다른 방법을 구사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접대를 잘한다거나 커미션을 확실히 준다거나 어떻게든 윗사람을 동원하는 등 나보다 영업을 잘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각종 편법들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영업 체질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의 일이 영업이니 내 깜냥에 맞는 영업 노하우를 정립했었는데 그게 성심성의껏 하는 것이었다.


현재 광고 영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요즘에는 기업들이 온라인 위주로 광고를 많이 하므로 가장 중요한 건 데이터다. 요즘의 편법은 '데이터 속이기'일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기업들은 온라인 광고 중에서도 퍼포먼스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매체를 위주로 집행한다. 광고비 얼마를 써서 몇 건의 회원가입을 시켰는지와 같은 확실한 피드백 데이터가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오프라인 광고 전문이었고 오프라인은 명확한 데이터가 없다. 그러니 겨우 '성심성의껏'이라는 전략이 나왔던 셈이다.


정수기 영업도 나는 성심성의껏 관리를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시간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항상 웃는 얼굴로, 정수기를 원칙대로 점검하고, 정수기 겉면도 깨끗하게 닦고,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물이 나오는 구멍까지 면봉을 넣어 닦아냈다. 그래서 고객들한테 칭찬을 많이 들었다.

"어머나, 이렇게 깨끗하게 닦아준 경우는 처음 봐요."

내가 처음 방문한 집들은 대개 이렇게 얘기했다.


정수기만이 아니라 비데 역시 다른 사람들은 대충 1분 안에 점검을 끝내고 나오는데 나는 변기 속까지 닦아주고 왔다. 그랬더니 항상 변기가 더러웠던 고객들이 어느 날부터 내가 가기 전에 변기를 깨끗하게 닦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 대해 나는 아무 소리도 안 했지만 덕분에 비데 관리하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속으로 좋아하곤 했다.


내가 한 달간 담당하는 고객 수는 약 180명이었다. 그중 100명 정도는 나를 다 좋아했다. 꼼꼼하게 관리한 나의 방식을 선호한 사람들이다. 나머지 중 60명 정도는 시큰둥했다. 내가 잘 하든 못하든 관심이 없었다. 혹은 조금 귀찮아했다. 왜냐하면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20명은 나를 싫어했다.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를 좋아한 100명 정도와는 얘기도 많이 했었다. 고객은 내가 정수기를 닦고 있는 동안 옆에 앉아서 집안 얘기며, 자랑이며, 누군가의 흉을 보았다. 나도 내 얘기들을 하며 맞장구를 치곤 했다. 나는 고객들과 나눈 대화 중 내가 꼭 기억해야 하는 사항들을 엑셀에 기록해 놓았는데, 다음에 갈 때 그 기록을 먼저 보고가서, 전에 얘기했던 일이 어떻게 됐냐고 물어보면 신이 나서 그 후속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말하자면 정통 영업 활동을 했고 착실하게 내 고객을 만들어갔다.


나하고 수다를 떠는 시간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그분은 내가 가기로 한 시간이면 아파트 정문을 바라보며 20분씩 기다리시곤 했다. 정수기와 공기청정기, 비데를 다 쓰고 계셨는데 서로 점검 주기가 다르다 보니 매월 그 집에 가게 됐었다. 그분은 내가 갈 때마다 자기가 갖고 있던 영양제나 과자, 신발까지 나를 주기 위해 뭔가를 꼭 준비하고 계셨었다. 그 집에 갈 때는 아예 시간을 배로 잡아놓곤 했었다. 내가 정수기를 그만둔다고 말했을 때 얼마나 낙담을 하시던지, 눈물이 날 번했다.


한 집의 경우는 내가 맡기 전에는 남자 직원이 다니고 있었다. 대형 얼음 정수기가 자꾸 고장이 난다고 그 남자 직원이 아예 바꾸라고 했다고 한다. 어쩌다 내가 대타로 가게 됐는데 나는 얼음 정수기를 원칙대로 점검하고 고장 난 부분을 고쳐서 그냥 쓰시게 했다. 그랬더니 그분은 내가 정직해서 좋다면서 나에게 자기 집을 맡아 달라고 했다.

정수기 렌탈 만기가 가까운 경우, 직원들은 매출 수당을 올리기 위해 고객한테 렌탈 연장보다는 정수기를 바꾸라고 권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성격상 그러지 못했던 셈인데 그게 복으로 돌아온 케이스였다.

그 고객은 자기 올케가 정수기 영업을 하고 있는데도 나한테 공기청정기 두 대에 비데까지 연장 계약이나 신규를 주문했었다. 내가 그만둔다고 했을 때 그분은 거의 화난 표정으로 섭섭해했었다. 아마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또 다른 한 집은 내가 점검을 하러 가면 반갑게 맞으며 항상 같은 얘기를 했었다.

"그렇잖아도 요즘 정수기 물맛이 안 좋아져서 아줌마 올 때가 됐구나 했어."

주변 사람을 많이 소개해준 고객이었다. 내가 정수기를 그만둘 즈음 자기 딸의 친구를 소개해 주었었다. 그 친구라는 사람은 우리 회사와 경쟁사인 정수기를 쓰고 있었는데 친구 말 듣고 나한테 우리 정수기로 바꾼 것이었다. 나를 소개한 이유는 관리를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집의 설치가 끝나자마자 내가 정수기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정말 미안했던 집이 되고 말았다.


나를 좋아해 준 고객들은 모두 이들 세 곳과 비슷한 관계를 나와 맺고 있었다. 나를 좋아해 주었으므로 나 역시 그들을 좋아했다. 일정이 안 맞으면 일요일이라도 나는 기꺼이 갔고 서로 속 깊은 얘기도 하고 마치 옆집처럼 싱싱한 채소나 음식을 나누곤 했다. 나름 뿌듯한 관계였다. 정수기를 그만둘 때 일일이 고별인사를 한 사람이 100명을 넘었었다.


그런 지지를 뿌리치고 그만둔 이유는 고객들이 그렇게 도와주는데도 여전히 나는 생활비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명목상으로 보면 신규 건당 수당이 10여 만 원은 나와야 하는데 실제로는 몇 만 원 정도였다. 회사 간 경쟁이 심해져서 할 수 없이 우리도 할인을 많이 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직원들끼리도 경쟁적으로 깎아 주기도 했다. 판매 조직들이 대량 구매해서 인터넷으로 싸게 공급하는 일도 있다 보니 나는 몇 만 원도 안 되는 수당으로 고객에게 선물까지 해야 하는 경우들이 생겼다.


정수기를 시작한 지 1년 여가 되는 시점인데, 한 달 정산을 해 보니 내 손에 쥔 돈은 처음 시작할 때나 마찬가지로 평균 100만 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내가 영업을 아주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중간 정도는 하는 걸로 나왔었다. 하지만 자동차 운영비와 각종 보험료, 전화비, 고객 관리비 등을 제하면 남는 돈은 처음과 똑같은 수준이었다.


물론 오래 일한 사람들은 판매도 나보다 잘했고 한 집당 처리 시간도 빨라서 월간 250군데 이상 300군데까지 처리했기 때문에 나보다 많이 벌었다. 선배들은 대개 순수입 250만 원은 되는 걸로 들었다. 500만 원 이상 버는 사람도 두어 명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정수기를 포기했다. 내 생활이 여유가 있었다면 좀 더 오랜 기간 정수기 일을 해서 마침내는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게 되었을지 모른다. 처음 교육받을 때 들었던 대로 정수기는 '하면 할수록 쉬운 일'인 것만은 틀림없으니까. 나는 시간을 버틸 여력이 없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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