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 관리에서 힘들었던 것
정수기 관리 알바 이야기
정수기 관리의 기술적인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처음 고객을 방문했을 때는 진땀을 뺐었다. 안경점이었는데 주인은 뒤에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이 겨우 점검을 끝마쳤는데 정수기에서 물이 안 나왔다. 점검 절차를 다시 되짚었지만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안경점 주인에게 내가 초보자라고 양해를 구하고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팀장이 달려왔다. 나는 내가 엄청난 실수를 한 줄 알았다. 팀장이 와서 스위치 하나를 올리니 물이 좍 나왔다. 점검 전에 막아놓았던 수도꼭지를 다시 틀어놓지 않아서 물이 안 나온 것이었다.
이런 사소한 실수는 초보자일 땐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자 정수기 점검 관리 정도는 더 이상 버겁지 않았다. 6개월이 되니까 고객과 수다를 떨면서도 손은 자동적으로 점검을 하는 수준이 되었다. 정수기 관리를 하면서 힘든 점은 대개 고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원래 고객은 정수기를 관리해 주는 직원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는 요구를 할 권리가 있다. 반대로 정수기 관리 직원이 고객을 골라 갈 수는 없다. 홀로 사는 할아버지 고객 중에는 집안을 온통 쓰레기 더미로 해 놓고 사는 분들이 가끔 있었다. 휴지나 라면 봉지, 쓰레기봉투, 소주병들이 방바닥에 쌓여 있어서 진짜 발 디딜 틈이 없었던 집도 있었는데 나는 계속 갔었고 어느 날 그분이 정수기 해약을 해서 겨우 그만 간 경우도 있었다.
직원이 고객을 골라 갈 수는 없지만 도저히 못 하겠다고 생각될 때는 회사에 부탁할 수는 있었다.
내 경우는 고객으로부터 세 번의 교체 요구가 있었고 내가 특정 고객을 빼 달라고 회사에 요청한 경우가 두 번 있었다.
나를 다른 직원으로 바꿔 달라고 한 고객은 내가 작업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이해했고, 꼼꼼하게 점검한다는 게 언제나 바람직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또 하나의 교체 건은 고객이 이전 관리자와 아주 친해서 요청한 케이스였다. 입사하면서 배정받은 지역에 내가 새로운 관리자로 가니까 그 고객이 이전 관리자를 계속 보내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경우, 직원들이 반기는 일은 아니다. 이미 다른 지역을 맡았는데, 이전 지역에 있는 단 하나의 고객을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는 건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객이 원하니 바꿔줘야 했다.
마지막 케이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객이었다. 나 이전에도 세 번이나 직원을 교체해 달라고 했었다는데 이유가 전부 불분명했다. 나에 대한 이유도 시간을 안 지켰다고 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담당을 바꿔 달라는 고객의 요구는 오래 일을 한 선배들도 1년에 한두 건씩은 받는 것 같았다. 사소한 일이 발단이 되어 순간적으로 언성을 높이게 되면 가차 없이 교체 요구가 들어오곤 했다. 고객관리는 역정을 잘 내는 성격일수록 힘든 일이다. 어쨌든 나는 비교적 선방했던 셈이다.
다만, 다른 측면에서 나는 좀 문제가 있었다. 고객 중에 유난히 싫은 사람을 견디지 못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그 사람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서 도저히 못 가겠다고 회사에 부탁했었다.
두 사람이었는데 한 사람은 혼자 사는 30대 여성이었다. 처음 그 집에 갔을 때 부엌에서 손을 씻으려니 개수대가 너무 더러웠다. 거름망은 몇 년을 씻지 않은 듯 시커멓게 떡개가 앉아 있었고 개수대 바닥도 누랬다. 비누는 더러움이 타서 울긋불긋했다. 그래서 내가 갖고 다니는 손소독제로 손을 씻었고 일회용 비닐장갑을 낀 후 작업을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그녀는 나에게 손 씻고 작업하라고 했다.
"소독제로 씻었어요."
"그래도 비누로 다시 씻어주세요."
"알겠습니다."
할 수 없이 개수대에서 비누로 손을 씻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정수기가 높은 곳에 올려져 있어서 의자를 옮긴 다음 의자에 올라가 정수기를 점검하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정수기 내려놓고 하세요. 전에 오던 ㅇㅇㅇ 선생님은 오자마자 손 씻고, 정수기도 내려놓고 했어요."
정수기를 내리려니 방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빨랫줄이 있어서 그녀에게 부탁했다.
"그러면 빨래를 좀 걷어 주시겠어요?"
"그냥 조심해서 내려 보세요. 전에 오던 ㅇㅇㅇ 선생님은 그냥 잘 내리던데."
그 후로도 그녀는 팔짱을 끼고 옆에서 내가 하는 작업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계속 지적을 했다. 나는 기분이 아주 안 좋았지만 잘못하면 싸움이 될 것 같아서 끝까지 해 주고 나오면서 말했다.
"다음번엔 다른 직원이 올 거예요."
이런 경우 고객을 빼겠다고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나는 회사에 강력하게 요구해서 뺐던 고객이다. 나는 내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하고는 얼굴도 마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싫어한 또 다른 고객은 내 생각에는 나쁜 고객으로 분류해야 하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자기 집에 정수기를 새로 바꿀 예정이고 공기청정기도 두 대를 들일 계획이라면서 나에게 부푼 기대를 갖게 했다. 며칠 후엔 자기가 운영하는 피시방에도 공기 청정기를 두 대 넣을 예정이라 했다. 내가 정수기 관리를 성실하게 해 주기 때문에 자기는 무조건 나하고 계약하려고 하니, 최대한 할인을 해서 견적을 뽑아 달라고 했다. 나는 신이 나서 내 수당의 반 이상을 깎은 금액을 제시했다.
그 후로도 일요일마다 세 번이나 그의 피시방에 불려 가 설치 위치에 대해 자문을 해주고 각종 모델을 다른 회사 모델과 비교 설명해주면서 공을 들였다. 그런데 모델을 최종 결정하기로 한 날, 결정을 하셨느냐고 전화를 하니, 황당하게도 이미 다른 사람과 계약을 하고 설치도 끝났다고 했다. 다른 직원이 더 싼 가격에 공급하겠다고 한 것 같았다. 나는 너무 속이 상해서 그 집은 절대 안 가겠다고 회사에 통보하고 말았다.
회사에서는 내가 관리를 맡은 지역이어서 다른 사람을 시킬 수 없다고 했지만 나는 판매한 사람 시키면 되지 않느냐며 버텼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경우 '빌어먹을' 하고는 관리를 그냥 해준다고 했다. 분통은 터지지만 일종의 관례라고 했다. 그러니 뺏기지 말고 빼앗으라는 말이었다.
정수기 일을 그만둔 이유는 수입이 목표에 못 미쳐서였지만 이처럼 너무 심한 경쟁 풍토가 싫었던 것도 있다. 그동안 공을 들여서 점검을 해왔던 곳에서 새로운 계약을 다른 직원하고 했을 때, 나는 유난히 배신감을 느꼈다. 고객보다는 같은 회사 직원한테 더 화가 났다.
초보자였을 때는 내가 혹시 만기 고객들을 놓쳐서 다른 회사에 뺏길까 봐 선배들이 미리 단속을 했나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느 정도 고객관리를 잘하게 되었을 때도 그런 일들이 발생했다. 고객이 먼저 나한테 전화해서 '누가 계약하자고 전화 왔는데 아줌마하고 계약할 거라고 말했다'면서 전화한 직원의 전화번호를 불러주기도 했다. 나는 그 전화번호의 주인을 알고 있었지만 계약을 뺏기지는 않았으므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련 없이 정수기를 그만둔 이유다.
정수기 일은 회사마다 운영 정책이 다 달라서 규정들을 잘 보고 선택해야 한다. 어디나 나름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그 회사에 다니는 선배들의 말을 잘 들어보고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