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보호사 알바 이야기
등하원 도우미 일을 그만둔 후, 나는 몇 달간 아르바이트를 쉬기로 했다.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이력서도 올리고 등하원 도우미 면접도 세 집 봤는데 최종 연락이 한 군데도 안 왔다. 더 이상 면접 보려고 애쓰지 말고 이 기회에 자격증이나 하나 따자고 생각했다.
이젠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은 내가 네 식구의 가장이었지만 딸아이까지 졸업하고 취업을 한 후 첫째인 아들과 둘째인 딸을 둘 다 독립시켰다. 아이들은 생활비를 각자 지출해야 하니 돈이 많이 들겠지만 이젠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할 나이가 됐다. 나와 함께 살 때보다 자유롭고 재미있을 테니 그 비용으로 생각하면 되겠지. 덕분에 나는 짐을 덜었다.
95세이신 친정 엄마만 돌보면 되었다. 엄마는 단기 기억상실이 심하긴 하지만 비교적 정신이 맑으시니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기력이 너무 없으셔서 식사를 혼자 챙겨 드시질 못했다. 집안에서 거동하는 것도 위태위태해서 누군가는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만일 내가 아르바이트를 계속한다면 낮시간 동안은 엄마를 데이케어센터에 맡기든가 해야 했다. 문제는 엄마가 사람들 많은 곳을 아주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한편으로, 혼자 있는 것도 불안해하셔서 내가 일하러 가고 나면 30분 단위로 시간을 재면서 나를 기다리곤 하셨다. 엄마를 위해서는 내가 바깥일을 줄이고 차라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가족요양 급여를 받으며 가벼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건강보험공단에 엄마의 장기요양 등급부터 신청했다. 데이케어센터를 이용하든 내가 엄마를 돌보며 급여를 받든 우선은 엄마가 등급을 받아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조사를 나왔고 두 달의 심사 기간을 거쳐 4등급을 받았다. 거동이 불편하지만 치매는 아니어서 그렇게 나왔다고 들었다.
4등급이든 1등급이든 내가 요양보호사 자격증이 있어서 엄마를 돌볼 경우 월 33만 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공단에서 직접 받는 건 아니고 공단에 등록돼 있는 민간 재가요양센터를 통해 받는다고 했다. 민간 센터가 요양보호사 관리를 대행하는 시스템이었다.
엄마를 돌보는 대가로 내가 급여를 받을 경우, 나는 종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해선 안된다고 했다.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시에 엄마를 돌본다는 건 거짓으로 본다는 것이다.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엄마를 데이케어센터에 보내거나 다른 요양보호사를 불러야 한다. 나는 당분간은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불만은 없었다.
엄마의 등급이 나왔으니 요양보호사 자격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학원 등록을 하고 책 한 권과 기출문제집 한 권을 뗀 후 시험에 응시했고 붙었다. 한 달 후 자격증이 나왔고 다시 한 달 후부터 돈이 나왔다. 나중에 내가 소속된 재가요양보호센터에 물어보니 새로 등록한 요양보호사 대부분이 나처럼 가족 중 누군가를 돌보며 돈을 받기 위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요양보호사 시험은 서울의 경우 구별로 시험을 치렀는데 응시자 수가 우리 구에서만 500명은 되는 것 같았다. 중학교 2개 층이 꽉 들어찼었다. 요즘엔 90% 이상이 합격한다고 하니 1년에 4차례씩 전국적으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요양보호사가 불어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이 대개 가족 요양을 목적으로 한다면, 장기요양보험 적립액이 금세 동날 것 같아서 문득 걱정이 되었다.
월 33만 원은 나에게 큰돈이었다. 어차피 엄마를 보살펴야 하는데 공돈이 생긴 듯했다. 그동안 내가 내온 장기요양보험료보다 훨씬 많은 돈이니 한편으론 고마웠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으로 약간의 수입을 확보한 후, 그다음으로 뭘 할지 고민 중이었다. 본업이 월간지 광고 영업이지만 이젠 그만두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 매출도 안 좋고 나이도 끝낼 때가 됐다. 이제라도 내가 잘할 수 있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투잡을 뛰느라 시간이 없었을 때도 뭐든 배워 보려고 시도는 했었다. 나는 내가 손재주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들의 망가진 의자를 고친다거나,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걸 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격증도 손재주를 쓰는 일을 찾았었다.
그중 하나는 카빙 데코레이션(carving decoration)이었다. 카빙에는 수박 카빙, 과일 플레이팅, 야채 카빙, 칵테일, 아이스 카빙, 스티로폼 카빙, 비누 카빙 등 종류가 많다. 자격 등급은 각 분야별 2급, 1급, 마스터급으로 올라가는데 마스터급은 그 분야에서 남을 가르쳐도 되는 수준을 말한다. 일단 배우기 시작하면 전부 마스터까지 따곤 한다. 국가자격증은 아니고 민간 자격증이지만 조리, 외식학 쪽에서는 쓸모가 많은 자격증으로 보였다. 부수입도 좋다고 들었다.
나는 수박과 과일까지 마스터 자격증을 딴 후 멈췄다. 마스터 자격증을 딴다고 당장 강의를 할 수 있거나 아르바이트를 많이 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작은 역할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활동하고 배우면서 전 분야로 자격증을 확대해 가야만 기회도 많이 오고 마침내 대학 강단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나를 가르치신 명장님은 내 재주가 아깝다고 했지만 나는 카빙으로 성공할 때까지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했다.
매번 하는 변명이지만 당장의 수입이 목표에 못 미치면 나는 포기했다. 혹은 내 일이 아니라고 포기했다.
떡케이크에 올리는 앙금 꽃도 배워 봤다. 앙금 꽃은 재미는 있었는데 이건 또 팔이 아파서 못했다. 색색가지 물감을 섞은 앙금을 비닐 주머니에 넣고 작은 구멍으로 앙금을 밀어내면서 꽃을 만드는 작업인데 손목 힘을 이용해서 정교하게 꽃을 만들어야 해서 하루 3시간만 연습해도 손목과 팔과 손가락까지 아팠다. 결국 포기했다.
몸으로 하는 일 말고 머리로 하는 일은 없을까. 머리도 서서히 굳어가고 있지만 최선을 다해 배우고 일하다 보면 조금씩이라도 발전해갈 수 있지 않을까. 잠깐, 나는 한 번도 최선을 다한 적은 없었다. 최선을 다했다 함은 뭐라도 목표 이상을 이룬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적이 없다. 말을 수정하여, 깜냥껏 노력하다 보면 나의 재능이 호응을 하여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건 없을까.
이야기할머니, 색채심리치료사, 미술작품 해설가, 근대문화 기록요원, 사회복지사, 커피 바리스타 등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일들이 몇 있었다. 하나 선택해서 시도해 볼까 생각 중이었다. 최악의 경우 요양보호사로는 언제든 일할 수 있었다. 그러다 브런치에 들어왔다. 내 인생의 한 시기를 정리하고 싶어서 아르바이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 몇 가지 쓰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으니 좀 더 글을 쓰면서 나한테 적합한 자격증을 찾아보려고 한다. 죽는 순간까지 일도 하고 글도 쓰는 삶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