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하원 도우미 알바 이야기
등하원 도우미 일을 그만둔 후, 나는 한참 동안 내가 돌보던 아이들이 그립곤 했다. 집에서 밥을 안치려고 쌀을 씻다가도 문득 쌀을 자기가 씻겠다며 조그마한 왼손을 펴서 쌀을 막고 오른손으로 그릇을 기울이며 물을 조심스레 쏟아붓던 큰 아이의 모습이 생각나서 혼자 빙그레 웃곤 했다.
참 영리한 아이들이었다. 알바 하면서 가장 마음 편했고 즐거운 일도 많았고 또, 나에게 반성도 많이 하게 해 준 아이들이었다.
둘 다 여자 아이였는데 유치원생인 큰 아이는 씩씩하면서도 똑똑했다. 어린이집에 다녔던 둘째는 언니와 달리 숫기가 없고 조용했다. 하지만 다섯 살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깊은 아이였다.
큰 아이는 놀이터에 나가면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놀이터에서 잠깐 작은 아이를 돌보다 보면 큰 아이가 어디로 튀었는지 안보였다. 자기보다 큰 초등학생 오빠나 언니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참견을 하고 있곤 했다. 성격이 감성적이면서도 호방해서 펑펑 울다가도 단 1초 만에 깔깔 웃곤 했다.
큰 아이가 유치원 친구들 다섯 명과 놀다가 운 적이 있었다. 대장 역할을 하는 친구가 우리 큰 아이만 제일 낮은 졸병을 시켰다는 것이었다. 여러 명이 놀이터 둘레를 뛰다가 홈에 들어오는 선착순으로 졸병 순서를 매겨야 하는데 자기가 두 번째로 들어왔는데도 꼴찌 졸병을 시켰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친구들이 아이를 둘러싸고 울지 말라며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큰 아이는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지 계속 울먹이며 놀이터를 걸어 나갔다. 내가 쫓아갔다.
"그렇게 울다 가버리면 친구들이 미안하잖아. 친구들하고 화해한 다음에 가자."
"싫어."
"지금 집에 가서 심심하게 노는 것 하고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노는 것 하고 뭐가 더 좋아?"
"..."
"꼴찌나 2등이나 그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우니? 할머니가 보니까 네가 두 번째로 들어올 때 대장 애가 다른 데 보고 있었던 것 같아. 그 친구한테 다음번에는 그러지 말라고 말해. 다음번에도 그러면 그때 우리 집으로 가버리자."
"... 알았어."
바로 활짝 웃으며 놀이터로 돌아갔다. 화를 바로 풀어버리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 같았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자기가 갖고 싶은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길거리가 떠나가라 울어재껴서 나는 이것만은 반드시 고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한번 실컷 울어 봐. 너 그칠 때까지 할머니 여기 서 있을게."
길거리에서 누가 이기나 서로 고집을 부렸다. 나는 우는 아이를 달래지 않고 무심한 척 바라보기만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둘을 유심히 쳐다봤다. 아이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울다가 어느 순간 울음을 뚝 그쳤다. 내가 말했다.
"다 울었어? 아유 착하다."
"나 아까부터 그치려고 했어."
"그래? 잘했어. 앞으로는 길거리에서 울지 말자. 집에 똑같은 장난감 있잖아. 그걸 못 산 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창피하게 길거리에서 울겠니?"
"..."
"할머니는 돈이 별로 없어서 네가 떼를 써도 못 사줘."
"알았어."
그날 이후 아이는 길거리에서는 절대 떼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이는 집에서 목욕을 하지 않겠다고 다시 떼를 썼다. 놀이터에서 들어온 터라 목욕을 꼭 시켜야 했는데 아이가 싫다며 고집을 부렸다. 아이를 설득하다가 포기했다. 아이가 말했다.
"할머니, 나 TV 볼래. 과자 줘."
"안돼. TV도 안되고 과자도 안돼."
"왜?"
"너 머리 안 감고 목욕도 안 한 벌이야."
아이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참나, 그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바로 일어나 TV를 틀고 과자를 챙겨 아이들에게 주었었다.
둘째 아이는 큰 아이와는 정말 달랐다. 큰 아이는 신나게 달리다가 넘어지면 와앙 울면서 나한테 달려와 안겼다. 둘째는 찬찬히 뛰기 때문에 잘 넘어지지도 않았지만 어쩌다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서 나를 보며 황급히 말했다.
"할머니 나 안 아파. 괜찮아. 걱정하지 마."
주변을 살피고 배려하는 마음도 타고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속으로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둘째 아이는 숫기가 없었다. 나하고 손을 잡고 아파트 안을 걷다 보면 저 앞에 친구들 엄마 몇 명이 얘기를 하고 있다. 놀이터에서도 자주 보는 엄마들인데 이 아이는 인사를 못했다. 그들 앞을 지나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곤 했다. 내가 인사를 시키면 내 뒤로 몸을 숨기곤 했다.
어느 날, 그 엄마들이 또 서 있길래 아이에게 말했다.
"오늘은 아줌마들한테 꼭 인사드리자."
"지금 속으로 연습하고 있어."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정작 그들 앞에 다다랐을 때는 여전히 몸을 내 뒤로 숨기고 인사를 못 했다. 할 수 없이 내가 엄마들에게 말했다.
"우리 아이가 아줌마들한테 인사하려고 저 밑에서부터 연습하면서 왔어요. 근데 말이 안 나온대요."
엄마들이 웃으며 '잘 가.' 하고 인사해 주었다.
그들을 지나친 다음에 물어봤다.
"오늘도 못했네. 연습까지 했는데."
"속으로 인사했어."
거의 매일 보았던 그들에게 아이가 인사하기까지 두 달이 걸렸었다.
숫기는 없지만 자신의 생각은 아주 분명한 아이였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아침 일찍 언니를 유치원에 보내느라고 둘째도 함께 언니의 유치원 버스 타는 곳으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거리가 꽤 되고 오르막 길이어서 다섯 살짜리에겐 힘든 코스였다. 이날은 시간에 쫓겨서 아침부터 뛰었기에 내가 아이에게 말했다.
"오늘은 날씨도 추운데 우리 둘째가 고생 많이 했네. 수고했어."
"응. 할머니도 수고했어."
내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유, 우리 아가가 할머니한테 수고했다는 말도 할 줄 알고. 우리 아가 이젠 다 컸네."
아이가 무심한 어투로 대답했다.
"다 큰 건 아니지."
나는 웃음이 빵 터진 채 아이를 안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요즘도 아이들 엄마가 보내주는 아이들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웃음 짓곤 한다. 나중에 나의 자식들도 아이들을 낳는다면 내 인생에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들어오리라. 결혼들을 할까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