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라슈보단 검둥이

by 질풍가도

「어느 마을에 한 농부가 개를 무척 애지중지하였다.


하루는 농부가 개를 데리고 장에 갔다가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고갯마루에서 쉬었다. 술에 취한 농부는 그곳에서 잠이 들었는데, 아래쪽에서 산불이 나서 고갯마루 쪽으로 번져왔다. 개는 주인을 흔들어 깨웠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개는 자기 몸에 물을 묻혀 풀밭을 필사적으로 뒹굴어 불길을 잡았다. 그러나 힘을 다한 개는 주인 옆에서 죽었다. 깨어난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비통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개를 장사를 지내주고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경기도 가평 상색리에 내려오는 설화다. 가평뿐 아니라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비슷한 설화들이 구전되어 오고 있고 우리도 어릴 때 한 번쯤은 이 이야기를 듣거나 읽어본 적이 있다.

인류는 예로부터 여러 동물을 키우며 생활해 왔다. 그 용도야 다양했겠지만 인간과 동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특히 요즘에는 반려로의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반려동물의 종류도 다양해 흔한 강아지나 고양이는 물론이고 도마뱀이나 물고기, 거북이, 앵무새 심지어는 저기 큰 대륙에서는 사자나 호랑이도 집에서 키운다는 뉴스를 본 적도 있다.




“엄마, 껌둥이 때메 내 학교를 몬가겠다. 학교 갈 때만이라도 엄마가 좀 잡아노면 안되나?”


검둥이는 내가 중학교 1학년때 밖에서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었다. 큰 숙모가 키우다 못 키우겠다고 우리 집에 맡기고 간 녀석이다. 어릴 때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옆구리 쪽에 화상 같은 자국이 있어 어린 마음에 처음엔 썩 정이 가진 않았다.

엄마에게 우리 집에 강아지가 온다고 들었을 때 너무 좋았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도 하고 같이 놀기도 하는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이 녀석이 오니 내 생각과는 너무 달랐다. 검은색 부스스한 털에 흉터 때문에 이쁘지도 않았고 그냥 시골에 흔히 볼 수 있는 똥강아지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래서 이름도 그냥 검둥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참 물건이었다. 충성심인지 아니면 그냥 친근함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정이 든 때부터 내가 매일 아침 학교 갈 때마다 학교까지 날 바래다주고 집에 다시 돌아가는 거였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자전거로 20분 거리니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가 학교를 갈 때면 어김없이 날 따라 나왔다.

더 신기한 건 항상 교문 앞에 멈춰서 그 이상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주 사람이 따로 없었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재밌었다. 혼자 가는 것보다 심심하지 않았고 누구에게 배웅받는 느낌은 사람이 아니라도 나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 동물인지.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이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는 중학교는 당시에 몇 없는 남녀공학이었고 당연히 등굣길에는 여학생들도 많았다.

등굣길에 자전거를 타고 강아지를 뒤에 달고 같이 가는 모습이 여학생들 눈에는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보였을 것이다. 몇몇이 웃으면서 지나가는 것을 본 후 뭔가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검둥이는 다른 집 강아지처럼 족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털이 윤이 나거나 덩치가 좋지도 않은 그냥 동네 똥강아지에 위에도 언급했듯이 옆구리엔 흉터자국이 크게 있어 딱 봐도 보기 싫은 모습이라 생각하니 더 그랬나 보다.


그때 이후로 나는 등굣길에 자전거를 정말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일부러 빨간불에 신호등을 통과하기도 하고 검둥이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숨 멎도록 페달을 돌려가며 따돌리려 노력을 하곤 했다.


“아휴, 집에 좀 가라고 인마”


중간에 신호를 받아 서 있을 때면 검둥이를 발로 밀어내면서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으나 항상 실패였고, 그래서 결국 난 타의 100%로 검둥이의 배웅을 받으며 중학교 1학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검둥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나를 바래다주고 집 오다 다른데 들러서 노는가 싶어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 당연히 묶어두고 키우는 강아지도 아니었기에 그냥 동네 마실 갔구나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도 이 녀석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도 말이다.

처음 며칠은 너무 신났다. 어린 마음에 난 검둥이가 어디 가서 며칠 놀다 온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럼 학교를 혼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좋았다.

그런데...

결말은 다들 예상하겠지만 그 이후로 더 이상 검둥이를 볼 수 없었다.

조심스레 생각해 보면 아마 개장수에게 잡혀갔거나 아니면 집으로 오는 길에 사고가 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예전에는 동네 개들을 전문적으로 훔쳐가는 개장수들도 있었고, 매일 다니던 길을 검둥이가 갑자기 잃어버리진 않았을 테니깐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내 목숨을 구해줄 만한 충견이 있었다.


검둥이는 분명 설화 속 이야기의 상황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해 이 글의 결말을 이렇게 담담하게 적으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분명 검둥이가 나에게 보여준 행동은 주인에 대한, 함께하는 이에 대한 사랑이었고 친밀함이었을 텐데 나는 그것을 내 상황과 필요에 의해 거부했고 이제 와서야 그때를 반성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 약간은 가증스럽다는 느낌도 있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이렇게나마 사과를 해야 될 것 같다.


‘보고 싶다 검둥아, 그리고 형이 그때는 미안했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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