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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란 Jul 15. 2023

진정한 이별식

아버지

                                                       

   남편은 온종일 또 친구와 당구하러 갔다. 나도 낮에 친구들과 한바탕 놀다 왔지만, 집에 오니 아무도 없다. 오늘 저녁은 혼자 먹어야 한다. 자연히 아주 간단히 먹게 된다. 밥을 한술 떠 물에 말아먹고 뒤돌아서니 허전했다. ‘단백질이 부족하니 계란 프라이를 하나 해 먹어야겠구나’ 생각하며 프라이팬을 꺼내었다. 나는 늘 계란프라이는 노른자를 깨어서 계란노른자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프라이를 한다. 계란 전처럼 보이는 계란프라이다. 오늘은 잘 쓰지 않던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으로 하다 보니 뒤집기가 어려워 계란노른자를 깨지 않고 그대로 살짝 익혔다. 약간 식은 뒤에 계란노른자 윗부분에 입을 대고 살짝 ‘후루룩’ 먹었다. 순간, 어린 시절, 부모님과 우리 육 남매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밥 먹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계란 프라이 드시던 모습이 함께 어른거린다. 지금, 아버지처럼 먹고 있는 내 모습, 내 몸 어딘가에 아버지가 계시는 듯하였다. 혼자 탄식하듯 저절로 “아버지, 죄송해요.”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아버지 장례식 중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육 남매 중 맏딸인 나는 ‘아버지가 가장 믿고 있는 자식은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 힘드실 땐 내가 가장 큰 역할을 해 드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아버지가 가장 힘드실 때 나는 먼 곳에 있었다. 심지어 잠을 자면서….


  대구 사돈댁 상가에 다녀오느라, 새벽에 출발하여 밤늦게 집에 도착한 나는 정신없이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새벽에 전화 벨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전화를 받으니 셋째 여동생이었다. 울면서 전화를 했다. 

  “언니, 왜 이제야 전화를 받아. 엉엉,~~~.” 

가슴을 무엇인가가 치는 것 같았다. 어찌해야 할지. 남동생이 전화를 바꾸어 말했다. 

  “누님,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길이 멀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시고 운전 조심하시고 천천히 오세요.”

  동생들 전화에 내가 어떻게 답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말을 했는지, 말할 자격이나 있는지, 아버지가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만 답답하고 눈물만 흐를 뿐이다.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아버지, 죄송해요.” 밖에 말할 게 없다. 장례식 내내 아버지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해외에 있는 막내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전날 대구까지 가서 안동을 들르지 못하고 온 것까지 생각하니 두고두고 더욱더 죄인 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발인을 앞둔 전날 밤이 되었다. 장례지도사가 내일 아침 일정을 이야기해 준 후, 도움 주시던 모든 분들이 떠나고 가족들만 남게 되자 적막이 흘렀다. 나는 이제 정말 마지막이구나 싶었다. 장례기간 내내 밤잠을 안 주무시고 아버지 옆에 앉아있는 엄마는 내가 알고 있는 잔소리 많고 시끄러운 이가 아니라 이 상황을 초월한 의연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차분하였다.

 ‘당신 아픈 몸일랑 이제 내려놓고 편히 가시오.’ 

아버지의 먼 길 내내 배웅하시는 듯했다. 안쪽의 방으로 들어가 잠시라도 좀 누워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야기해 봐도 한사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만 있는 엄마, 나는 엄마께도 너무 죄송하기만 했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두 서성이고만 있었다. 

  “지는 장인어른께 술 한잔 올릴랍니더,”

막내 제부가 어색한 적막의 시간을 깨며 말하더니 넙죽 절을 올렸다.

  “장인어른 고생 많았니더, 인제 편안히 계시이소. 그곳에서는 아프지 마이소.”

  그는 항상 막내여동생과 결혼 허락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아버지의 잘 나가던 시절 이야기도 하고, 존경의 말도 해 주어 아버지를 흐뭇하게 해 주었다. 시간 날 땐, 자주 와서 아버지와 바둑도 두고 술동무도 해 주곤 했으니 아버지는 또 얼마나 살가워하셨을까?  

   “인자, 참말로 장인어른과 헤어져야 되니더. 마지막으로 잔 한 잔씩 올리고 인사도 드리고 싶은 사람은 인사 드리이소. 그동안 못했던 말이나 하고 싶은 말 해도 되니더”

  나와 동생들, 제부, 그리고 잠들지 않고 있는 가족 모두가 한 잔씩 올리면서 마지막 인사도 하고, 하고 싶은 말 한마디씩을 하게 되었다. 누구도 생각 못 한 아버지와의 진정한 이별식이 되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자주 못 뵈어 죄송했니더, 편안히 계시이소,”

  “아버지, 언니, 오빠, 동생들 많이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늘 자랑스러웠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함 밖에 말씀드릴 수 없었다. 초, 중학 시절 아버지와 동생들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던 때, 초등학교 학급에서 가정환경 조사할 땐 대학 나오신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던 철없었던 때가 떠올랐다. 잔소리 많은 엄마는 늘 시골 부잣집 막내아들 아버지 때문에 힘드셨다고 했지만 나는 말없이 우리를 바라봐 주던 아버지가 좋았다. 아버지의 좋은 점만 떠올랐고 나의 죄스러움에 감사와 사죄의 인사를 드렸다. 둘째 여동생이 인사하였다. 

  “아버지,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 혼자 드시던 계란프라이가 먹고 싶었어요. 한 번도 제게 좀 먹어 보거라 하시지 않았어요.” 

라고 하였다. 동생들이 하나둘 기억난다고 하며 너도나도 이야기하였다. 계란프라이 하나도 귀한 시절 이야기다. 나도 기억이 났다. 아버지가 계란프라이를 드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계란노른자 먼저 “호르륵”, 그리고 나머지를 드시던 모습이다.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늘 비상근무를 많이 하고 아버지 어깨에 온 가족이 달려 있으니 나는 당연하게 여겼지만, 어린 동생들은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 중심으로 살아왔다. 귀한 것이 있으면 항상 아버지 먼저이고 아들이 먼저이다. 여동생들이 억울했던 것 같다. 이어서, 둘째 여동생이 멋쩍은 듯 아버지께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아버지, 이젠 아프시지 마시고요. 엄마도 잘 돌봐주시고 편안하게 계시이    소. 우리가 잘할게요.” 

 부모님과 가까이 사는 둘째 여동생은 엄마의, 아버지의 수족처럼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식은 가까이 있는 자식이 최고이다. 가끔은 둘째 여동생이 나에게 언니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미안하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아버지께 가감 없는 속풀이로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 둘째 여동생, 가장 슬프고 죄송스러운 날 아버지께 못다 한 이별을 진정한 이별식으로 만들어 준 제부, 아버지 편찮으실 때 먼 길마다 않고 장거리 운전하며 목욕 봉사 해 주었던 남편과 제부, 우리 이가네 가족들 모두 모두 고맙기만 하다.      

  너무너무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께 못다 한 효도, 엄마께 더 많이 해 드릴게요. 편히 쉬세요. 다시 태어나도 아버지, 어머니의 딸이 될게요. 제 몸에는 아버지처럼 계란프라이 먹는 모습도 있잖아요. 다시 만날 때까지 편안히 계셔요,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202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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