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선생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란 Dec 19. 2023

둘레길

    가을이 깊어지는 날이다. 퇴직 후 이제 1년을 넘기게 되자 나의 일상은 점점 더 느려지고 있다. 출근도 하지 않게 되었는데,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되고 보니  그것을 핑계로 운동도 나가지 않게 되고, 성당조차도 가지 않게 되었다. 집에만 거의 칩거하다시피 하고 있다. 


가끔 줌을 통한 화상강의, 화상모임에 빠져 ‘오가는 수고로움이 없어 더 좋구나’ 하며 오히려 더 집안에서 노는 재미에 묻어있게 되기도 한다. 심지어 운동도 노트북 유튜브 따라 하기로 재미를 붙이곤 했다. 당연히 혼자 하는 운동이다 보니 꾸준히 하기란 쉽지 않다. 마음 내키면 하고 TV에 빠지거나 책 속으로 빠지는 날이면 헤어나기 힘들다. 간혹, 모임 약속이 있긴 하지만 코로나라는 것을 만나게 될까 봐 망설이게 되고 개인적인 만남은 안 하려고 한다.  점점 운동조차 안 하게 되고 혼자만의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그나마, 매주 월요일 성당에서 하는 성경 40주간이 가장 큰 정기적인 외출이며 근처 장 보러 나가는 게 유일한 외출이다. 가끔, 손녀를 돌 봐 달라는 긴급 SOS가 있으면 가장 바쁜 날이 되기도 한다. 


  퇴직을 하자, 나의 느림을 잘 알고 있는 바지런한 여고 동창 영수기가 재경여고 둘레 길에라도 나와서 운동하고 어울릴 것을 추천한다. 한 달에 한 번 매월 2주 수요일이다.  11월의 둘레 길을 참가하기로 하였다. 우리 29기에서 세 명 참석이다. 나와 영수기, 남수기이다. 


  둘레 길을 가기로 한 날 아침 일찍 서둘러 준비를 하느라 하였지만, 몸이 느려 질대로 느려진 것 같다. 머리손질도 잘 안되고 내 행동이 굼떠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이런 몸으로 이런 행동으로 42년간이나 아이들 키우며 출근시간에 서둘러 출근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매일 출근할 땐 6시에 일어나 7시 30분이면 머리손질 끝내고 옷 차려입고 식사준비, 식사하고, 가족들도 챙기면서 출근했다. 그 많고 많은 날들, 한결 같이 출근했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내가 그런 일들을 모두 쉽게 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아침시간에 일상의 나갈 준비에 대한 일의 진척이 잘 안 된다. 머리손질을 하다 보니 이렇게도 저렇게도 잘 되지 않았고 일의 두서도 없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옷을 챙겨 입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코로나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모처럼 버스를 타고 집결지를 향했다. 버스를 타고 내가 좋아하는 한강을 건너며 보니 더 넓게 더 멀리 볼 수 있고 한강을 가슴에 품어 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승용차로 운전하며 보던 한강과는 격이 다르게 보이니 가슴 벅찬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집결시간 10시가 거의 되어서야 겨우 집결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지런한 영수 기와 남수 기는 벌써 여고 둘레길 깃발을 들고 안내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경상도 역양의 인사말들, 여고동창들이 학교에서 만났을 때의 어투로 재잘재잘 거리는 듯했다. 

 “00아. 옛날, 그대로 내….”


 몸은 모두 60, 70대이지만 만나면 너 나 할 것 없이 여고 시절로 돌아간다. 나는 어쩌다 참가하는 둘레길이지만, 거의 30~40여 명이나 되는 선·후배들은 자주 만난 듯 정겹고 반갑다. 기수별로 팀을 이루어 하하 호호 신나는 표정이고, 서로서로 친근해 보인다. 그들이 부러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진행팀에서는 둘레길 걷기 전 특별한 이벤트도 준비했다. 안산 둘레길 자락에 있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방문이다. 독립을 맹세한 특별한 태극기와 다양한 자료들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60~70대 할머니들이 나라를 생각하고 후손들의 미래를 다시 그려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다. 


여고시절 “대 안동여자고등학교” 학생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것처럼 「대」 자를 하나 더 붙일 만하다는 마음에 미소도 지어진다. 졸업생으로서 건강을 위한 단순한 둘레길 걷기 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의 한 꼭지를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그날의 감동이 더해진다. 나의 동기 두 명만 알면서, 함께 그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특별한 장소를 만나면서 서먹서먹한 선·후배들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직장생활을 할 때보다, 퇴직 후에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귀어야 몸 건강, 정신건강에 이롭다 한다. 둘렛 길을 걸으며 건강해지고 선·후배라는 울타리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이벤트가 있기도 한 둘레길 걷기 모임이다. 일석 삼조, 그리고 여고시절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2022년 11월


매거진의 이전글 가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