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과 반말

by 운틴

수어에서 존댓말은 영어에서 존댓말과 비슷하다. 영어에 정중하게 말할 때 붙이는 단어가 따로 있는 것처럼 수어도 그렇다. 수어는 구어에 비해 짧게 줄여서 표현되는 편이다. 조사나 어미가 따로 있지 않고 명사나 동사를 중심으로 표현한다. 그러다 보니 손윗사람에게 예의를 차리고 있는지 아닌지는 말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청인은 말하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말의 내용도 중요하다. 반말을 하면서 정중한 태도를 취하기는 쉽지 않다.


농인끼리 대화할 때는 못 느끼는데 청인과 대화할 때 가끔 불편할 때가 있다. 양쪽 다 수어로 대화하면 피차 반말을 사용하니 큰 차이가 없는데 청인이 농인을 상대로 음성 언어를 사용할 때 반말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농인은 알아듣지 못하면 자기를 향해서 반말을 쓰는지 아닌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문제는 나처럼 조금 알아들을 때 생긴다.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이가 한참 어린 직원과 대화를 하는데, 그의 말을 내가 잘 못 알아듣자 그가 명사만 반복해서 말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마우스가 작동을 안 하면 배터리를 갈아봐요'라고 말하는데 내가 잘 이해를 못 하자 그는 "배터리, 배터리"라며 답답하다는 듯이 반복해 말했다. 배터리만 따로 떼어 말하니 바로 이해는 되었는데 기분이 안 좋았다. 앞으로 계속 저 사람이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할 텐데 참고 지낼 수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말이 곱게 나오지 않으면 태도도 말에 따라간다.


그래서 잠깐 말 좀 하자고 밖으로 불러냈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명사만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면 듣는 사람이 기분이 좋지 않다. 조사와 종결어미까지 갖추어 문장으로 말해달라'라고 부탁했다. 그는 처음에는 당황하는 눈치였는데 곧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다행히 험악한 분위기로 이어지지 않은 채 대화가 끝났다.


그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줘서 고마운 마음에 다음날 같이 식사하기로 약속했고 우리 사이의 일은 그렇게 잘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대체로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계속 반말을 참고 지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말하는 사람은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채 계속 말을 놓는 게 다반사다.

오늘은 어떤 청인이 같이 이동하던 농인에게 차가 지나가고 있으니 비키라고 말하는 걸 보았는데 "비키세요"라고 하면 될 것을 "비켜! 비켜!"라고 하는 걸 보았다. 급한 마음에 반말이 나왔을 수도 있고 두 사람이 아주 가까운 사이여서 말을 놓았을 수도 있다. 한쪽이 연장자여서 아랫사람이라 하대한 것일 수도 있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하대당하고 반말을 듣는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끝까지 존댓말을 쓰지 않고 중간에 얼버무리거나 처음부터 반말을 쓸 때가 있다.


그 누구도 장애인이거나 나이가 어려서, 혹은 직위가 낮아서 당연히 반말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니다. 뭐라고 말하는지 듣지도 못하는데 반말 좀 쓰면 어떠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인격이 의심스럽다. 낮에 본 사람을 반면교사 삼아 앞으로 더 많이, 그리고 열심히 존칭을 써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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