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온 지 3년 만에
캐나다가 영주권이 잘 나온다 잘 나온다 하지만 캐나다 내부에서 반발이 많아져서 제약이 생기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어서 그와 함께 진행했고, 캐나다에 온 지 3년 만에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감사하게도 정말 평탄하게 영주권 신청을 진행한 케이스고, 딱히 마음 고생하지 않고 신청할 수 있음에 고맙고 또 감사하다.
캐나다 컬리지 과정 2년 졸업 후 1년 이상의 경력을 쌓고 영어 점수를 만들어서 진행하는 EE(Express Entry). 내가 아마 EE로 진행해야 했다면 아마 한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코로나 이후로 하루가 다르게 치솟아 가는 EE 점수는 물론, 나는 중간에 정리해고를 당했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캐나다 내에서 1년 이상의 경력을 채우지 못했을 것이고, 미국 회사에서 일하는 지금, 내 경력은 인정이 되지 않았을 거다. 날로 높아져만 가는 EE 점수를 맞추기 위해서 영어 점수는 아이엘츠 기준으로 8 정도를 받아야 했을거다(만점이 9이고, 인도나 필리핀 쪽 애들이 8~8.5 정도 받는다, 한국에선 7만 나와도 잘하는 편). EE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특정 직업군 안에서만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프리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직업이다. 남자친구와 함께 영주권 진행을 했기 때문에 직업에 대한 구애를 받지 않고, 정리해고 후 나의 신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더 자주 본다고 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 역시도 그랬던 것 같다. 직업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 신분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 외국인으로 살아보지 않으면 모른다. 만약 나의 남자친구가 없었다면, 말도 안 되는 연봉에 보험도 없는, 온 직원이 이민자들로만 이루어진 곳에서 일해야 했을지도 모른다(매니지먼트 팀만 백인 - 돈은 자기들이 다 먹는 구조). 출근 시간은 '예의상' 정해져 있는 곳, 8시부터 일하기도 하고 종종 아침 6시에 나가서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하는, 퇴근 시간도 '예의상' 5시인, 점심시간도 따로 없는 곳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1년을 버텨야 했을지도 모른다. 1년을 버티고 EE 신청을 하더라도 점수가 낮으면 영주권은 꿈도 못꾼다. 캐나다 대기업 파이널에서 떨어지고 나에게 선택권은 그곳 밖에 없었을 때, 나에겐 나의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대기업 파이널에서 떨어진 상처가 아물어지기도 전에 나의 고급 인력을 '착취'당하는 곳에서 일해야 했을 거다. 언니가 놀러 왔을 때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상사 눈치를 봐야 했을지도 모르고, 내 인생을 비관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것도 다 경험이지'하고 나 스스로를 위로했을지도. 직업이 없던 지난 5개월 동안 아마 남자친구가 없었더라면 끝나가는 나의 비자를 걱정했을 거고, 엄마 아빠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겨울에 기온이 -40도까지 떨어지는, 아직 영주권을 주고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서 한국인 사장님 밑에서 서버를 했어야 했을지도(그 분들을 비하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단순히 '영주권'만이 아니었기에 하는 말).
그 당시에는 내가 처해진 상황에만 몰두해 있어서 우울하기만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의 남자친구 덕분에 나의 노동이 착취당하지 않았고, 사업자도 내보고, 프리랜서이자 한 회사의 소속으로 나름 안정적으로 일하면서 달러를 벌고 있다. EE보다 더 안정적으로 영주권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고(물론 영주권이 나오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안전하지 않다), 중간에 무슨 일이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영어가 모국어인 그와 상의할 수 있다.
나는 아직 너무 어리석어서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걸 보지 못한다. 양손에 가득 쥐고 가지지 못한 것만 목에서 피가 나도록 이야기하고 억울하다고, 우울하다고 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 상황은 훨씬 달라졌을 텐데, 대기업 문 앞에서 넘어졌다고 우울하고, 안정적인 곳에서 일하지 않게 됐다고 투덜거렸다. 조금 더 밝은 면을 보도록 하는 내가 되어야지, 하고 영주권 신청을 하면서 깨달았다. 조금 더 감사한 마음으로 이 짧은 생에를 살아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