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지내고 있어
이별을 한지도 벌써 3개월이 넘어간다. 그는 잔인하게도 그리고 또 고맙게도 우리의 기념일이자 그의 생일인 전 주에 헤어짐을 얘기했다. 내가 선물을 챙겨주는 게 싫다고 했다. 평소에 그는 나에게 물건을 사주면서 사랑을 보여주는 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별을 앞둔 나는 그에게 너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물질적으로 받은 게 정말 많았고, 이렇게 물질적으로 사랑을 받은 연애는 처음이었다. 우리의 3주년이자 그의 생일을 앞두고 우린 헤어졌다. 항상 안경테를 가지고 싶다는 그에게 LA의 젠틀몬스터에서 안경테를 사줬다. 그리고 그도 나에게 선글라스를 선물했다. 우리의 이별 선물이자 마지막 선물인 셈이었다.
이상하게도 슬프지만은 않았다. 5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는 10개월은 힘들어했던 것 같은데, 그때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마음이 아리도록 슬프지 않았다. 아니면 그때보다 조금 더 나은 이별을 했던 걸까? 아니면 내가 그때보다 더 온전한 나로 성장한 걸까? 아니면 우리가 다시 만날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혹은 우리가 진짜로 헤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나를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건가? 나도 잘 모르겠다. Y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과 고마움이 동시에 든다. 내가 더 많이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나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선물해 줘서 고맙기도 하다. 그와 헤어지고 난 후 원하던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지난 3개월 간 바쁘게 살았다. 나의 루틴을 만들고 친구들을 만나고, 또 토론토의 계절이 바뀌고 눈이 왔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어쩌면 그는 나보다도 더 잘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어쩌면, 나를 더 빨리 잊었을지도 모른다.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다.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않고 나를 예뻐해 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헤어진 기간을 따지지 않고 만나고 싶다. Y였다면 그렇게 했을 거다. 5년을 만나고 헤어지자고 말할 용기조차 없어서 나에게 헤어짐을 떠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만나던 그 사람처럼, 그냥 나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않고, 나의 방식대로 우리의 추억을, 관계를 추억하고 애도하고 싶다. 이른 시일 내에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그전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닌데, 왜인지 미안하고 죄책감이 든다. 이게 그를 아직 못잊었다는 건 아닌데,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하다.
Y와 함께하면서 찍었던 사진을 보니 낯설다. 너무 오래전 일 같기만 하고, 한 때 가장 친했던 사람인데 지금 만나면 누구보다 어색할 것 같다. 우리는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 혹은 종종 연락하고 안부라도 묻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러길 소망한다. 그는 어떨지 모르겠다. 아마도 나와 같은 마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존중해 줄 수 있고, 그의 마음이 어떤지 충분히 이해한다. 굳이 전 여자친구를 친구로 둘 만큼 외로움을 타는 사람도 아니고 미련이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어쩌면 7월 이후로 너무 바빴던 내 삶이 조금이라도 쉬어가라고 말해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바빠서 헤어졌다는 것은 핑계일 거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이어나가기에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던 것뿐. 인정하기 싫었다.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냥 쉽게 부서질 그런 아슬한 사랑이었달까. 그래서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내가 아는 보통의 그라면 그 또한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다른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그것까진 알고 싶지도 않고 이제 알 필요도 없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나에게도 좋은 사람이 생길 것 같다. 이렇게 환승연애 같은 느낌을 주는 건 또 처음이라서 나 스스로가 너무 낯설다. 나는 항상 내가 상대방에게 충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우린 끝났고 내가 그에게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이른 시일 내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해도 그전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를 정말로 사랑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건강한 이별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누가 보면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좋은 이별은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나쁜 이별만도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이별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 이별은 나에게 항상 많은 배움을 주고, 나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게끔 해준다. 이별을 즐긴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
세상에 영원한 게 없다는 것이 얼마나 속상하고 다행인지 모르겠다. 내가 힘들 때는 한 줄기 빛 같다가도, 내가 행복할 때는 언제나 겸손할 수 있게 해 주니까. 어쩌면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이별 뒤에 조금이나마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어가고 있으니까.
이별은 슬프기만 한 게 아니다. 좋은 것, 나쁜 것으로 나눌 수 없다. 나는 나로 가득 차고 있다.
이별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