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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범 May 19. 2023

'비상선언'




전도연이 외국계 제약회사를 치러 갔을 때 이 영화의 분위기는 절정으로 다다르고 있었다. 국토부 장관이 브리콤을 찾아갔을 때, 그리고 문을 열라 했을 때 관객들은 희열을 느꼈을 테다. 그는 그 문을 열게 한다. 그건 공권력의 힘이었다. 사람들은 각종 재난에 맞닥뜨렸을 때 정부가 힘을 발휘해 주기를 원한다. 관객들은 비행기에 탄 탑승객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바람은 과연 이루어질까.



영화 '비상선언'은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던 항공 재난 영화였다. 이 이야기는 한 소시오패스의 실험적 사고에서부터 시작된다.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그는 이상한 미소를 짓고, 또 이상한 질문 따위를 하며 항공사 직원과 비행기 탑승객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임시완의 연기가 참 뛰어났던 것 같다. 영화인데도 보고 있기 힘든 표정, 그리고 그런 대사를 하니 참 난감했다. 저런 사람과 비행기를 함께 타야 하다니, 그건 너무 꺼림칙한 일이 아닌가.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 꺼림칙함이 더 발전해 큰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러나 그건 영화였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궁금해졌다. 어떤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까 상상하게 됐다. 수많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으며 살면서도, 그리고 슬퍼하면서도 영화를 볼 때는 기대가 된다. 누가 죽을까? 또 어떻게 죽을까..




예고편을 봤을 때부터 난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접하기 힘든 영화였고, 또 송강호의 분위기가 왜인지 참 멋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춘스타이거나 화려한 배우인 적 없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더 멋있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분위기 있어지는 듯하다. 송강호와 임시완은 영화에서 한 번도 맞부딪힌 적 없지만 마치 서로 대결을 하는 듯했다. 범인이 탄 비행기는 이미 출발했고 경찰은 여전히 땅에 머무른다. 그곳에서 한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이니까, 그래서 그 싸움은 점점 흥미로워진다. 범인이 더욱 광기 어린 표정을 지을수록, 그리고 경찰이 더 초조해질수록 긴장감은 높아진다. 어느 순간 국토부 장관이 등장하고 이야기는 알 수 없는 지점을 향해 달린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봤는데 최근 이렇게 몰입도 높은 영화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최근에는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까. 영화는 변한 것이 없다. 배우들의 연기는 더 깊어지고 영화의 소재는 좋은 것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재능 있는 감독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다. 이 영화의 후반부가 비록 악평을 들음에도, 또 갈수록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었어도 나는 좋은 시도라 생각했다. 요즘 영화는 길어야 하고 그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전달해야 한다. 그런 탓인지, 아니면 감독이 너무 많은 것을 담아내려는 욕심이 있었는지 곧 추락할 비행기처럼 흔들렸다. 그렇게 무사히 착륙하려고 그런 것이었을까. 관객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일까.


바이러스가 너무 치명적이라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그리고 너무 무기력해져 나는 이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원했다. 반대로 바이러스의 치명성을 조금 떨어뜨려서라도 감정의 끝과 끝 지점을 조금 조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런 밍밍한 맛을 낼 거면 뭐 하러 장사하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허무했던 건 그토록 치명적인 바이러스에도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탑승객들이 꽤 오래 버텨낸다는 것이었다. 코로나19처럼, 처음에는 사망자 수 보도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사람들이 그것에 무감각해진 것인지 아니면 면역이 생겨 그런 것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마스크를 계속 써야 하나 이제 벗어야 하나 그런 생각들로 말이다. 탑승객들은 결심한다. 착륙하지 않기로. 그 짧은 시간에 백신이 발견되고 어쩌면 살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러나 그 백신의 안정성 같은 것마저 보장되지 않아 결국 포기하려 한다. 충격이었던 건 한 아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때 그 결심은 굳혀진다. 친구들이 바이러스에 옮는 것이 싫다고 울던 그 아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말이다. 아토피 때문에 친구들에게 어느 정도 따돌림도 당했다면서. 선과 악의 차이는 그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범인은 인간들이 죽는 걸 보고 싶어하는데 그 아이는 자기 때문에 누군가가 병들거나 죽어가는 모습이 싫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건 좀 충격적이었다.



비상선언은 우리 영화계에서 새로운 모험심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동시에 스토리와 전개의 늪에 더욱 깊이 빠지는 모양새도 보였다. 비행기에 탄 것을 후회하지 말자. 그것이 좋은 비행이었든 나쁜 비행이었든, 그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말이다. 비행기 한 번 타보는 게 소원이던 시대에서 항공사를 찾고 고르는 시대로 변화했다. 세상은 진보했지만 사람들의 원성은 더 높아진 듯하다. 더 높은 곳을 날 수 있지만 사람들 컨디션은 대체로 안 좋다. 저 먼 곳의 휴식처로 가기 위해 우리 집의 아늑함을 포기하는 시대에 나는 비상선언 같은 것이라도 하고 싶다.


비상선언, 2022/ 한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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