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려가 준다는 선택.

옛사람 죽이기

by 김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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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이나 사회의 불공평한 세상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편함, 억압, 때로는 부당하다는 감정을 느낀다. 그런 감정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이어가며 ‘순수함’을 잃어버린다는 건 단순히 마음의 청결함이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쩌면 이 구조 속에서 끌려다니며 삶에 대해 체념해 버린 것 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체념한 체 순수함을 잃은 채 살아간다는 건 슬픈 일이다.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슬픔을 극복하려 그 구조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 준다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 강제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허용한 결과라는 말이다. 수동적 무력감과 능동적 선택 사이의 차이는 아주 크다. 끌려가 준다는 태도에는 여전히 내 주체성이 살아 있고, 나의 존엄을 지키려는 의지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끌려가 준다고 해서 구조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구조는 여전히 불공평하고 불편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내가 구조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그 구조가 나를 지배하도록 ‘허락한다’는 점이다. 겉보기에는 똑같이 순응하는 것 같지만, 내면에서는 여전히 선택의 주체로 서 있다는 사실이 나를 살아있게 만든다. 이런 태도가 유지될 때 나는 구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내 존엄을 지켜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어른스러운 길이다. 불공평한 구조속에서 몸부림치기보다 차라리 그것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내 중심을 세워가는 것. 어쩌면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다듬어내는 과정일 것이다.


그 과정은 세모인 내가 동그라미의 틀에 맞추어 가는 과정이기에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과 마주한다.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왜 이 지점에서 고통을 느끼는지, 또 그 고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에 대해 하는지 질문하고, 또 대답해 가는 과정을 속에서 나는 성장한다.


이 다듬어짐은 옛사람을 죽이는 과정이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이르는 과정과 유사하다. 옛사람을 죽이는 것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이르는 것도 모두 고통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왔나 보다. 고난이 있어서 자신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마주할 세상의 불공평하고 불편한 구조 속에서도 기꺼이 끌려가며, 세모 같은 내 모습을 동그라미로 바꾸어 가고자 한다. 신앙 안에서도 세모 같은 나의 옛사람이 동그라미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길 바란다.


결국 이 여정은 내 성품을 다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닮아가는 데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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