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극복기

우리에게는 누구나 잉여 시간이 필요하다

by 이로브

사무실을 완전히 정리한 후 내게 찾아온 변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시간이라니, 감개무량하다.


느긋이 밥을 먹어 본다. 원래 나는 밥을 느리게 먹는 편이었는데 어릴 때 엄마가 애가 목구멍이 작아 그런가 하며 갸우뚱했던 게 생각이 난다.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은 뭐 해 먹을지 생각한다. 시간도 있고 체력도 있으니 마트에 가서 장을 봐 예전 스페인 여행에서 ‘이건 내 인생 음식이야! ’라고 속으로 외쳤던 ‘뽈뽀(Pulpo, 익힌 문어 요리)’를 만들어 보기로 한다.


그 당시 뽈뽀에 완전히 빠진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똑같이 만들어 먹겠다며 요리에 사용된 올리브 오일과 똑같은 것을 인근 상점에서 찾아내 사 왔다.


뽈뽀에 곁들일 바게트까지 사서 집에 돌아와도 저녁 먹을 때까지 시간이 남는다.




조용한 집안, 소파에 앉아 가만히 그저 있어 본다.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잉여의 시간에는 오로지 나와 시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계의 초심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무얼 할지 나에게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계획이란 시간에 쓰임을 부여하는 것이기에 시간이 남아도는 이 순간을 오롯이 느끼고 싶은 순간에 계획은 불필요하다.



잉여의 시간에는 계획 대신 ‘문득’이라거나 ‘갑자기’ 떠오른 것들로 채워진다.


이사 온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집앞 공원에 한 번도 못 가본 것이 생각 났다. 산책로 조성이 잘 되어 있어 주말마다 나들이객들로 붐빈다고 들었는데 정작 5분 거리에 사는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다행히 오늘은 평일이고 붐비지 않는 시간대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는 운동화를 신고 공원으로 걸어간다.


곧게 뻗은 산책로 주위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은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듯 가지런히 일렬로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잘 정돈된 느낌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아담한 규모의 호수도 있었고 호수 너머로 울창한 나무를 따라 녹음이 짙게 내린 사진 같은 풍경도 만날 수 있었다.


잠깐 멈춰 서서 일렁이는 호수의 물결과 진녹색의 나무들을 한눈에 담아 보았다.




그 순간 자연(自然)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채웠고, 나는 채워지는 그 순간, 너무나도 오랫동안 갈구해 왔던 나의 ‘안녕’한 상태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하기보다는 무엇도 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번아웃에서 벗어나는 회복력을 조금씩 얻었던 것 같다.


시간에 나를 온전히 맡겨두면 신기하게도 우리는 자신을 살리는 방법을 ‘기억’해 낼 것이다. 그 방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살아오며 나를 지탱해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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