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전염

항체 없음

by 이로브

소송은 대개 일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계속되는데, 치열하게 싸우면 싸울수록 변호사는 의뢰인을 대신하는 것을 넘어서서 의뢰인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 상태에 이르면, 감정의 전염이 일어나며, 이에 대항할 항체는 없다.


대개 의뢰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5가지 정도다. 분노, 불안, 후회, 억울함, 회피.


이 중 내가 취약한 지점은, 억울함과 불안이었다.


의뢰인의 떨리는 목소리,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에서 전달되는 억울한 감정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게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러나 억울한 감정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변호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꽤 도움이 된다. 전의(轉意)를 불러일으켜 소송에 몰입하는 데 촉매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송 중후반으로 갈수록 주장을 쏟아내고 나면 어찌 되었든 점차 감정은 잦아들었다.


문제는, 불안이었다.


불안은 억울함이 연소될 즈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재판이 끝날 때까지 어느 때고 불쑥 찾아들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불안의 근거가 미약할지라도 그것에 휩싸인 순간에는 토네이도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해 나를 꼼짝 못하게 하였다.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듯, 만에 하나 잘못되면, 만에 하나 패소하면, 만에 하나 구속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꽤 힘이 셌다.


특히 일하는 시간이 아닌 때 더욱 자주 찾아들었다. 머리를 감을 때 문득, 변기에 앉아서 문득, 잠자려고 누워서 문득. 예고 없이 찾아온 이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나를 아래로 끌어당겼는데 이를 뿌리치고 다시금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데 적잖은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되풀이될수록, 나는 새로운 사건을 맡기가 좀 두려워졌다. 새로운 사건은 곧 또 다른 감정의 진폭을 가져오는 것임을 잘 알기에. 또 다른 이의 삶에 걸어들어가 그 이의 억울함과 그 이의 불안을 겪어내는 것이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사건에 몰입할수록, 사건에 진심일수록, 감정의 진폭은 더 크기에 나는 점점 더 힘이 들었다. 나중에는 힘이 든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수없이 자문하고 자답하며, 내 불편한 감정을 헤집고 파고 들어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를 들여다본 결과, 나는 버거워하고 있었다.


이제는 인정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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