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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2: 겨울과 봄>, 아무 일도 없더라도

by 피큐

어느새 가벼워진 옷차림을 보고 계절이 바뀌어 감을 눈치챈다. 이제 곧 온갖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연분홍빛 제품들을 출시하면 봄이 왔음을 비로소 실감하겠지. 봄이라고는 하지만, 출근길엔 여전히 같은 아스팔트 냄새가 났다. 며칠째 피지도 지지도 않은 벚꽃이 도로변 가로수에 매달려 있었다.


그래, 도시의 계절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알려지는 것이었다.




부지런히 봄보다 한발 앞서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람들 덕분에 봄이 오고 있음을 알아챈다. 시즌 오프 클리어런스니, 봄맞이 할인이니, 봄 한정 상품이니 하는 것들.


어디선가 보니 봄이 오는 속도는 시속 1~1.2km라고 한다.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걷는 속도로 찾아오는 봄. 서운할 정도로 빠르게 왔다가는 봄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봄은 사람들이 느긋하게 즐기라고 여유 있게 찾아온다. 그런 봄에 비해 봄이 오기도 전에 봄이 옴을 알리는 사람들은 너무 빠르게 살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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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아파트에서 산 나도 이럴진대, 산골에서 직접 농사지어 먹고살던 이치코는 도시 생활이 더 답답했을 것이다. 결국 이치코는 도호쿠 지역의 고향 마을 코모리로 돌아간다.


영화는 계절별로 이치코가 농사짓고, 손수 요리해 먹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으로 치자면 계절은 부, 하나의 요리는 장으로 볼 수 있다. 이치코의 생활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먹는 음식 하나에 얼마나 많은 손이 필요한지 알 수 있다. 시골의 생활은 바쁘고 치열한데 영화를 보는 우리는 오히려 여유로움을 느낀다. 배려 있게 놀라지 말라고 천천히 지나가는 계절이 순간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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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5년이 넘는 세월을 지금 한집에서 살고 있다. 작은 마을에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모두 있어 모두 아는 사이였다. 25년째 같은 집, 같은 길, 같은 얼굴들. 학교가 바뀌어도 친구는 바뀌지 않았고, 이름을 부르기 전에 이미 반응이 오는 동네였다. 익숙함은 끝내 내게, 벗어나야 할 무언가가 되었다.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면서 친구들이 하나둘 동네를 떠나갔다. 여전히 동네에 머무르고 있는 내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치코도 아마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한번 마을을 떠났던 이치코는 고향으로 돌아와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간다. 누가 봐도 부지런히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이치코에게 소꿉친구가 말한다.


"혼자서 열심히 살아가는 거 대단하다 생각하는데, 한편으론 제일 중요한 뭔가를 회피하고 그 사실을 자신에게조차 감추기 위해 열심히 하는 걸로 넘기는 게 아닐까 싶어. 그냥 도망치는 거 아냐?"

이치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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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고 이치코는 다시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후 시점으로 영화는 넘어간다. 힘겹게 마을을 떠난 이치코가 남편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다. 영화에서 5년간의 시간을 설명해 주지 않으나 자신만의 답을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 노력 끝에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 이치코의 선택은 제자리 걸음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치코 엄마의 말을 빌려 하고 싶다.


"뭔가 실패를 하고 지금까지의 나 자신을 되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일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 같아서 좌절했어. 하지만 인간은 '나선' 그 자체일지도 몰라. 같은 곳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위로도 아래로도 자랄 수 있고, 물론 옆으로도…. 경험을 쌓았으니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같은 장소를 헤맨 건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좀 더 힘이 나더구나."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 쌓여, 문득 달라진 내가 있었다. 시간을 따라 흘렀다기보단, 그 위에 조금씩 나를 얹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written by. 생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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