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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내 Sep 11. 2024

이곳은 살아서는 못 나가 는 곳이야

아빠의 오래된 지병으로 병원이라는 그 특유의 풍경에 점점 무뎌졌던 것 같다. 12년이 지나고 재발한 암세포로 권위자를 찾아간 대학병원에서 시한부 선고 비슷한 걸 받던 날 엄마와 아빠와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곳 로비의자에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서로 마음을 챙기느라 목놓아 울지도 못한 채 속으로 눈물을 삭히고 있었다.


"엄마 우리 어제 갔던 병원에서 치료받자! 거긴 치료해 보자고 했잖아"

내 말에 적막이 깨졌고 겨우 정신을 차리고 힘이 빠진 다리를 서로 부축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전날 S대학병원에서는 어렵겠지만 전이가 되지 않았고 치료를 손 떼기엔 너무 젊은 나이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고 이야기하셨기에 오늘 더욱 희망을 가지고 그 병의 권위자라고 하는 병원 교수님을 찾아갔던 터였다. 희망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에 우리 가족은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병원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이 지푸라기가 동아줄이 되어주길 기도하면서)




방사선 치료이력이 있어서 많지는 않지만 두세 번 정도 방사선치료를 해볼 수 있겠고, 항암치료도 약하게 들어가자고 하셨다. 단! 치료 중에 피가 터지면 더 손쓸 수 없다고 하셨다. 이게 무슨 말인지 그때는 몰랐다.



아빠는 선물로 현금을 가장 좋아하셨다


언젠가부터 옷이며 신발 어떤 것도 새로 사지 않으시는 아빠였다. 동생은 그런 아빠가 답답했는지 첫 직장에 들어가 첫 급여를 받은 날 아빠선물로 미리 봐두었던 브랜드 점퍼를 사서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아이고 이걸 뭐 하러 사 왔어! 아빠 창피해서 입고 나가지도 못해 가서 바로 환불해"

"아빠 그냥 입으면 안 돼? 이 옷이 왜 창피해?"

동생의 짜증스러운 말투에는 속상함이 묻어있었다.

결국 백화점으로 가서 그대로 환불을 하며 다시는 아빠선물 안 사줄 거야라고 던 동생이다



아빠는 평소 검소하셨고 새 옷, 새 차.. 이런 물건에 대한 욕심은 더욱 없으셨던 것 같다. 그래도 선물이니 못 이기는 척 받아주시지 기어코 환불을 시키시다니..(나중에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새 옷을 얼마나 입겠냐고 했단다. 아픈 사람이 좋은 옷 입고 다녀서 뭐 하냐고 몸이 건강해야지 껍질만 번지르르하면 뭐 하냐고)



2012년 5월 가정의 달 근로자의 날과 연차를 끼워쓰고 현금 20만 원을 1만 원권으로 바꿔서 봉투에 담아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엄마에게는 시내에 나가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신상 여름 점퍼를 같이 고르며 사드리고(아빠가 아프시니까 쇼핑도 죄책감에 못하시는 엄마였다) 늘 "아빠는 아픈데 엄마만 꾸미고 다니면 이상해"라고 말하셨는데(아빠의 지병이 20년 넘게 이어졌기에) 성인이 되고선 두  딸이 늘 엄마 옷이며 화장품 신발 등 선물을 사드 바빴던 것 같다


아빠에게는 준비해 온 현금봉투를 선물로 드렸다. 아빠 또한 기쁘게 받으셨고 맞춤선물을 한 나는 기분 좋은 만족감을 느끼며  잠을 자려고 누워있는데 거실에서 촥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을 살짝 열어보니 아빠가 내가 드린 봉투에서 돈을 꺼내서 손으로 세는 소리였다. 침을 퉤퉤 묻혀가며 돈을 세고 다시 봉투에 넣었다가 잠시 후 다시 꺼내 돈을 세는 아빠의 얼굴에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커서 아빠 용돈을 주네'하는 기특함과 뿌듯한 표 어났다



다음 날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엄마 서울 도착해서 전화할게"




"엄마 나 잘 도착했어"


"으내야 엄마 지금 의료원 응급실이야.. 너 올라가고 아빠가 갑자기 피를 토해내서 구급차 타고 왔어"


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아빠가

많은 양의 피를 토해내셔서 눈앞에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던 엄마는 촌고모의 능수능란한 대처로 119 구급차를 타고 사이렌은 울리지 않은 채 조용히 응급실로 이동하셨다고 했다 


사촌고모는 같은 아파트 옆라인에 살고 계셨는데 하반신이 사고로 마비되신 고모부가 아프실 때면 구급차를 불러 이동을 해야 했는데 동네에서 사이렌소리가 울리면 소문이 나니 사생활 보호와 동네주민들을 배려한 대처였다





우리 동네 가장 큰 병원에 입원한 아빠는 다음날 일반 병실로 올라갔고 특별한 치료는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는데 병동에 입원한 사람 몇몇이 병실에서 냄새가 난다며 민원을 제기했다. 아빠는 다른 데는 멀쩡하고 딱 한 부위 코만 아프셨는데 그곳이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뼈가 녹아내려 냄새가 나서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었던 것 같다.


간호사에게 601호로 병실을 옮기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으셨다 했다.


"여기는 일반 병실이라 시끄럽기도 하고 거기에 가면 조용하고 환자분도 더 편하실 거예요"


간호사의 에 큰 고민 없이 덜컥 병실을 옮겼는데 그곳은 호스피스 이었다.

 



아빠가 오랜 기간 아팠어도 겉모습은 멀쩡해서 아픈 사람 같지 않았고, 책임감이 강한 모습에 늘 우리 세 여자는 아픈 아빠를 많이 의지했었는데 이곳에 들어오고 상황이 반전되었다


아빠의 상태는 하루하루 달라졌고 정말 많이 아픈 사람의 모습이었다. 직장생활을 했던 나는 매주 금요일마다 서울에서 남원으로 아빠에게 갔다. 같은 병실에는 갈 때마다 새로운 환자들이 보였고 내가 가면 엄마는 매번 저희 큰딸이에요라고 인사를 시켜주셨다. 그다음 주에 오면 저번주에 인사했던 환자는 안 보이고 또 새로운 환자로 바뀌어 있었다.


"또 바뀌었네? 엄마 저번주에 인사했던 그 가족은 퇴원한 거야?"  

"가셨어.."


집으로 가신 게 아니란 걸 한참이나 늦게 알게 되었다. 엄마는 혼자 아빠를 간호하시며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눈앞에서 죽어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머리털이 곤두선다고 무섭다고 이야기하셨다(그때 엄마나이 50도 안되었을 때다)


그렇게 오가며 아빠 건강이 조금 회복되면 퇴원을 해서 집으로 돌아갈 거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3개월이 채 되기 전에 그 병실에 더는 가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는 아빠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내고 싶었다

10년도 넘은 일이고 무덤덤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글을 쓰는 지금 모든 상황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대문자 F인 내 옆에는 휴지가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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