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맹목

by 해랑

인류는 여러 병증을 지닌 존재이지만 그중에서도 무지(無知)에 기반한 맹목적인 믿음은 긴 세월 우리와 함께하며 여러 부작용을 낳은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지는 우리의 눈을 가려 삶의 고통을 마주하지 못하게 하고 항상 우회적인 방법으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편법을 찾게끔 했다. 조금이라도 생을 마주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완벽하게 구제해 줄 지름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인생사의 모든 괴로움을 해소할 방법이 있다며 사람들을 현혹하려는 이들은 늘 존재했다.


듣기 좋은 거짓말은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아왔으며, 사람들이 잘못된 믿음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그 외의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곤 했다. 맹목적인 신념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은 배척하고 착취해도 무방하다고 여긴다. 하나의 가치에 목매지만 않는다면 하지 않을 비윤리적인 선택들도 이들은 쉽사리 택한다.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는 이러한 경향성을 지닌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서로의 잘못된 믿음을 긍정하고 강화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잘못된 신념으로 무장한 집단은 때때로 그 위세가 대단하여 많은 사람에게 무력감을 느끼게끔 한다. 언론은 그들이 저지른 만행에 초점을 맞추어 이것이 얼마나 경악하고 두려워해야 마땅한 일인지 자극적인 언어로 퍼뜨리고 싶어 한다.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이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우리의 눈과 머리에 생생하게 전달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을 경계해야 할지언정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공포심을 퍼뜨리는 것은 맹목적인 이들의 전략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널리 알리고 무력을 써서라도 더 많은 사람의 긍정을 얻어내지 못하면 금방 무너질 위태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흔히 쓰는 자극적인 문구나 극단적인 행위들의 본질을 살펴봤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설령 겉모습일 뿐일지라도 세상이 자신들이 믿는 질서 아래에 있기를, 그리고 그 질서 아래에서 자신들은 항상 게임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누구도 논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자신들의 메시지를 반박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간 채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평온할 수는 없다. 본인들조차 자신들의 방식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마음속 깊이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득세하는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들고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어리석음의 존재 자체를 세상의 멸망이나 인류 몰락의 신호탄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저 우리의 오래된 병증이 다시 한번 도진 것으로 봐야 하며, 증세를 살피고 치료법에 대해 고민해보면 된다.


한 꺼풀만 벗겨내면 잘못된 신념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약하다. 이분법적인 사고관에 사로잡혀 현실에서 직면해야 하는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위협적인 적이 될 수가 없다. 자신의 불안과 분노가 어디서 기인하는지 고찰하지 못하고 자꾸 다른 요인과 핑계를 찾는 이들은 발밑조차 위태롭다. 통찰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이들과 상대했을 때 이들은 전혀 승산이 없다. 머릿수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인간을 태생적으로 등급을 매기던 시기도,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어떠한 권리도 주지 않았던 역사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거의 모든 곳에서 그런 행위가 금지된 것은 사람들의 도덕심이 크게 향상되어서라기보다는 그런 행위가 이득이 되는 시대가 지났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의 흐름조차 읽지 못하고 예전의 방식으로 권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시대에 뒤처진 낙오자들 뿐이다.


더욱이 어떤 사람도 고립되어서 살아가기는 힘든 것처럼, 어떤 집단도 다른 집단과 교류를 끊고 살아남기는 어렵다. 혼자서 생존할 수는 없으니 결국 맹목적인 신념에서 시작된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그들의 선택지는 아무와도 교류하지 않고 홀로 말라죽느냐, 자신들의 고립된 상황을 이용하려고 하는 세력과 손을 잡느냐 두 가지밖에 없다. 자신들이 그토록 원했던, 세상의 모든 것을 발아래에 둔 채 군림하려는 생각은 망상이었고 곧 자신들의 처지로 인해 이용당하는 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약속한 천국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인류는 진보만 하는 존재가 아니며,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언제든 급격하게 퇴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상기해야 한다. 우리에겐 태생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결함이 여럿 있으며, 오늘도 세상의 어느 그늘에서는 인류의 미개함을 엿볼 수 있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깨어있는 순간 우리가 부단히 수양하고, 지성적으로 후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도 결국 이 어리석음의 유전자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상은 언제나 그 모습을 달리하며 우리를 현혹하며, 우리에게도 언제나 맹목의 함정에 뛰어들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린다. 그것은 물질이 될 수도 있고, 안락함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상이 될 수도 있고, 깨달음이 될 수도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이후로 비교적 최근까지도 내 안에 우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그것만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 믿을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내면적 모순은 커졌다. 그러나 설령 단 하나의 가치를 손에 넣는다고 한들 무엇이 남겠는가? 여전히 살아내야 하는 생애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마주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맹목적인 어리석음에 대한 값은 본인이 치러야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것처럼 자기 자신을 속여가며 겉으로는 큰 뜻을 추구하는 것처럼 포장하고, 뒤로는 사사로운 이득이나 단기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자기 자신의 지성을 개발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행위이며, 수양을 거부함으로써 평온이 찾아오기를 영원히 거절하는 것이다. 맹목의 끝에 낙원이 기다리지 않는다.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이 가장 미개한 날 것의 모습으로 눈앞에 드러날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리석음을 빨리 이 세상에서 제거하고 싶은 조바심이 난다. 그러나 순리는 자연스럽게 흘러서 자신들의 무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 뒤떨어진 방식을 고수하는 자들을 세상으로부터 도태시킨다. 깨어있다는 것은 세상의 표면적인 문제들로부터 근원적인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런 부분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결코 무지에 감화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 안의 무지와 맹목을 부지런히 경계해야 한다. 잘못된 신념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는 법은 앎을 추구하는 것이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며, 타인이 좋고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것들의 이면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에게 대가 없이 저절로 낙원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 스스로 부지런히 이 오래된 아픈 곳을 관리하는 것만이 무지와 맹목이라는 지병을 안고 나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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