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1월은 유난히 포근한 날이 많다. 너무 포근해서 그런지 햇빛 좋은 공원가에는 개나리가 피고 영산홍이 망울을 터뜨렸다. 봄날 같은 포근한 날씨에 꽃나무가 착각을 한 것이다.
이 집 저 집 겨울채비로 김장을 담갔다는 소식이 전해온다. 올해는 염치없지만 귀농한 우리 형부댁에 부탁을 했다. 맛있게 김장을 해서 택배로 보내달라고. ㅎㅎ 마음이야 여행 삼아 춘천에 갔다가 언니랑 같이 재밌게 김장을 해서 차가득 싣고 오면 되는데, 주말이라 차가 너무 막히니 김장이 고생이 아니라 오고 가는 도로 위에서 하는 고생이 더 힘들다.
재작년에 겸사겸사 갔다가 김치는 잘 담가왔는데, 강원도 여행객들과 엉켜 왕복 10시간 가까이 걸리는 시간에 녹초가 되어 버렸다. 사실 이번엔 갑작스럽게 장례식장에 가야 할 일이 생기는 바람에 가려고 했어도 못 갈 상황이 되어 버리긴 했다. 어쨌든 언니가 내 부탁에 흔쾌히 그렇게 해주마 해서 난 올해 처음으로 김장 걱정 없이 겨울을 맞이하게 됐었다.
2010년 김장 독립 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김장으로부터 해방되는 기념비적인 첫해가 될 뻔했다. ㅎㅎㅎ
그런 사정을 어찌 귀신같이 아셨는지.ㅋㅋㅋ
어머님께서 전화를 하셔서는 올해 오랜만에 김장을 하고 싶다시며 내가 좀 도와주면 좋겠단다.
"아이고!! 어머님이 김치 담그고 싶으시면 담거야죠. 아무튼 수요일에 일 끝나고 갈 테니까 같이 장 보러 가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제가 가서 할 테니까요. 그리고 한 박스 하면 두통밖에 안 나와요. 기왕에 하는 것 2박스 하세요"
"그럴까? 그럼 너네도 한통 가져가고. 하하"
전화기 너머로 어머님의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인다.
2010년 아버님께서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후 자연스럽게 김장 독립을 하게 됐다. 매년 온 가족이 모여 100포기 남짓 배추를 다듬고 절여서 5가족이 먹을 김치를 하곤 했다. 김장은 그 속을 버무리는 과정보다 배추 절이고 씻는 작업이 가장 고된 일이다. 절인 배추를 사서 하는 요즘 김장은 사실 예전에 비하면 일도 아니긴 하다.
결혼 이후 매년 시댁에 가서 김장을 해왔던 터라 3년이면 서당개도 풍월을 읊는다는데, 사람이야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는 법이긴 하다. 배추 10여포기를 사서 직접 소금에 절이고, 각종 양념 재료를 손수 구해서 했던 나의 첫 김장 도전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오랜만에 우리 집에 와서 김치 맛을 본 우리 큰아가씨가 엄마 김치 맛이 난다고 칭찬을 했으니 말이다. ㅎㅎ 그 이후로 김장김치는 지금껏 그 맛을 유지하고 있다.
목요일날 배추 두 박스 주문해서 오기로 했다고 재차 전화를 주셨다.
사실 그날은 내가 오전 근무를 하는 날이기도 하고, 또 하필이면 우리 아들 수능시험을 보는 목요일이었다. 어머님께서 손주가 시험 보는 건 알았으나 그날이 목요인인 것은 잘 모르셨던 모양이다. ㅎㅎ
수요일에 일 마치고 가서 마트에서 어머님 만나 다발무 5개씩 세 묶음 15개, 대파 2단, 쪽파 큰 단 1개, 홍갓 한단, 청갓 한단을 사서 집으로 갔다. 무를 다듬어 씻어 놓은 다음, 쪽파를 어머님과 마주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깠다. 어머님께서 하필이면 손주 시험 보는 날 날짜를 잡았다고, 그제야 아시고는 내가 정신이 없어 그랬다고 미안해하셨다.
"어머님! 시험은 어차피 민돌이가 보는데, 마음 졸이며 종일 종종 거리는 것보다 차라리 바쁘게 김장 담그는 게 더 속편하지요!"
다듬고, 씻고 도란도란 얘기를 하다 보니, 속재료 준비도 다 끝났다. 마늘이며 생강도 어머님께서 미리 놀며 놀며 다 준비해 놓으셨다.
목요일 점심 즈음 절인배추가 도착했고, 어머님께서는 미리 보쌈을 준비해 두셨다. 무채를 썰어 갖은 재료를 섞어 배추속을 완성한 다음 잘 절여진 배추 속잎을 떼다가 보쌈과 함께 맛난 점심을 먹었다. 어머님도 출출하셨는지 잘 드셨다.
절인 배추 20kg 두박스, 어머님과 같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양념을 발라가자 순식간에 끝났다. 포기로 치면 14포기다. 큰 김치통이 성성하게 네 통이다.
김치 양념이 참 맛있게 되었고, 빛깔도 참 곱다.
어머님의 손맛은 여전히 살아 있다.
지금껏 김장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사진으로 남겨본 적이 없다. 이번엔 큰맘 먹고 사진도 찍고 어머님의 모습을 영상으로도 담아봤다. 어머님께서 쑥스러워하시면서도 김치 담그는 내내 어찌나 생기가 넘치고 기분이 좋은지 내 기분도 좋았다. 어머님께서 내내 너 아니면 내가 어찌 김치 담글 엄두나 냈겠냐며 니 덕에 김장해서 고맙다신다.
나도 벙글거리며, 한 말씀드린다.
저도 올해 처음으로 김장 안 하고 편하게 넘어가나 했더니, 어머님이 절 가만두질 않으시네요. ㅎㅎ
어머님! 사실 제가 김치를 담글 줄 몰랐다면, 선뜻 어머님께 도와드릴 테니 김장하시라 말 못 하죠. 이제 저도 살림 짬밥이 돼서 김장 좀 할 줄 아니까요. 혹 김장하다 무리가 돼서 아프실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죠.
올해 여든다섯 되신 어머님께서 김장 좀 하시겠다고 나서실 만큼 정정하시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다.
사실 나는 우리 어머님의 그 맘을 안다.
매년 내가 김장을 해서 두통씩 드리기 때문에 김장할 필요가 없긴 하시다. 그런데 올해 왜 그렇게 김장을 하고 싶으셨는지 말이다.
큰딸과 작은딸에게 엄마 손맛 가득한 김치를 해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나고, 가까이에 내가 있으니 큰 맘을 먹으신 것이다. 올해 큰딸은 이사를 했다 하니, 겸사겸사 김치 한통 들고 딸네 집에 가고 싶으셨고, 막내딸은 김장을 안 한다 하니, 이 집 저 집서 김치를 한통씩 선물로 받아오기는 하는데, 입맛 까다로운 딸내미는 그 김치들을 마땅찮아했을 것이고. 사실 막내 아가씨네는 워낙 바빠서 집에서 밥 먹을 일도 거의 없다. 그런 이유로 어머님은 두 딸들을 위해서 올해 특별히 김장김치를 좀 담그고 싶었다고 도란도란 이야기 속에서 내게 말씀을 하셨다.
딸들도 알았다면, 팔십다섯이되신 엄마가, 그것도 허리가 종종 말썽을 부리는 엄마가 김장을 하겠다했으면 엄마의 고집에 화를 내며 말렸을 것이다. 나 역시도 연로하신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해 김장을 한다했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 엄마가 아니라, 시어머님이신지라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맘을 알기에 내가 많이 도와드리면 어머님께서 맘 편하게 본인이 하고픈 일을 딸들을 위해 하실 수 있는데 싶어, 맘을 다잡았다. 내가 우리 시누이들을 위해 어머님 때문에 김치를 담근다고 생각했으면 참 심통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어머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김치를 담근다 생각하니, 순간 효부가 된듯한 착각이. ㅋㅋ
한해 한해 나이 들어가는 어머님이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디 불편하신 데가 있으면 살짝이 나에게 말씀을 하신다. 이런저런 하소연도 내게 하신다. 옛날 힘들었던 시절 이야기도 너무 자주 들어서 그 아들보다 내가 우리 어머님의 고단한 삶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어머님을 생각하면 안쓰럽고 짠하다. 지금이야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노년을 보내시지만 젊은 시절의 고단함은 한 편의 영화 이상이다.
우리 집 까탈스럽고 예민하고, 성질 급한 제비아빠!
만약 내가 어머님이 김장하게 나보고 오라시데? 하고 한마디만 했어도 당장 전화해서 난리를 쳤을 것이다.
허리도 안좋으면서 그 연세에 왜 김장을 하려고 하시냐, 딸들 줄 거면 걔네들 불러다 주말에 하지 왜 집사람을 불렀냐고 한소리 했을 것이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들은 종종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만들기도 하신다. 아마도 그건 본인 자식사랑이 지극해서 그럴 것이다. 우리 엄마도 종종 그러실 것이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 그런 어르신들의 마음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일 만큼 마음이 넓어졌다.
세상을 제법 살아갈 줄 알게 된 것이다.
어머님 집에서 깍두기 한통, 무생채 한통 맛나게 담아왔다. 올 김장은 이것으로 끝이다.
김장 담그시는 모습과 그 맛난 김치도 사진으로 식구들에게 공유해주었다.
아가씨들이 전화가 왔다. 고맙다고, 고생했다고 동영상까지 찍어줘서 잘 간직해 두고두고 보겠다고 말이다.
"엄마는 올케 힘들게...... 김치 먹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 고생을.... 애썼어요. 고마워요!"
"그러게요! 제가 춘천서 택배 오면 갖다 드리면 되는데! 전 언니한테 부탁해서 올해 편하게 김장 해결하나 했는데..... ㅎㅎ, 저도 우리 엄마면 말렸을 텐데.... (남의 엄마??아니 한 다리 건너라고...ㅎㅎ)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라고 했어요. 제가 김치 좀 담글 줄 아니까 도와드리면 되니까요. ㅎㅎ"
아이고! 말실수 크게 할 뻔했네. ㅎㅎ
아무튼 어머님의 솜씨는 여전하고,
김장 담그는 내내 기운차게 좋아하시고, 예전 배추 절이시던 정정할 때 생각나 기분이 참 좋았다.
내년에도 올해처럼 정정하셔서 같이 올해처럼 신나게 김장했으면 좋겠다.
"어머님! 내년 김장을 위해 몸 관리 잘 하세요!"
우리 어머님이 나보고 칭찬이 늘어지신다.
"애미는 어쩜 이렇게 손이 빠르냐? 기운도 세고!!"
그래 그런지 뺄살이 넘쳐나는 나를 보시고도, 다이어트좀 해야 한다고 살쪄 큰일 났다고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