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둘째 아이의 스무 번째 생일이었다.
생일이면 당연히 축하와 기쁨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나는 이 시기가 가까워올 때마다 깊고 진한 우울감에 힘겨워 온다.
아이를 건강하고 평범하게 키워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매년 반복되는 이 마음의 기울기가 아이의 생일을 온전히 축하하지 못하게 만든다.
둘째는 전신탈모를 앓고 있다.
증상은 올해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작년엔 눈썹과 속눈썹에 솜털이 살포시 돋으며 기적처럼 희망을 보였지만 감기 한 번에 다시 모두 빠져버렸다.(이 이야기를 더 자세히 적은 글은 [브런치북] 그래도 춤은 멈추지 않는다에 있다.)
딸은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 괜한 기대 하지 마. 난 이제 그런 기대 안해.”
하지만 어떻게 그 말을 고스란히 따를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이 아이의 몸 어디선가 새 생명이 돋아날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나는 믿음이 흔들릴 만큼 속이 무너질 때가 있다.
하나님이 왜 착한 내 딸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는지 이만치 버텼으면 이제는 좀 나을 때도 되지 않았는지
억울함과 원망이 동시에 밀려온다.
이 마음은 매년 같은 시기에 다시 올라와 내 감정을 휘감는다.
생일케이크의 촛불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 그 순간만큼은 나는 꼭 자리를 피한다.
딸의 ‘유일한 소원’을 바라보는 것이 내겐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나는 안다.
딸은 가발 때문에 힘들었다고 고충을 이야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엄마 마음이 얼마나 무너질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평범한 사람도 버거운 장시간의 공연 연습을 언제 벗겨질지 모르는 가발을 쓰고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12월 대형 퍼포먼스가 예정되어 있어 아이의 새벽 연습은 계속되고 몸은 녹초가 되어 돌아온다.
그 공연을 나는 과연 마음 편히 볼 수 있을까.
다른 부모들은 신나게 즐길 그 무대가 나에게는 매 순간 조마조마한 시간일 것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덜컹거린다.
나는 요즘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제발 아이의 머리가 다시 나게 해 달라”라고 기도해야 할까.
아니면 “힘든 순간에도 춤을 계속할 수 있게 해 달라”라고 기도해야 할까.
혹은 “아이가 꿈을 접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라고 기도해야 할까.
어떤 것이 이 아이를 위한 기도인지, 나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딸의 생일은 우리 가족에게 기쁨이자 슬픔이자 기도이자 인내의 날이다.
매년 생일이 다가오고, 생일을 맞고, 생일이 지나가는 며칠 동안 나는 우울과 죄책감이라는 낡은 그림자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아마 앞으로도 아이의 생일이 오는 계절마다 이 마음을 다시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믿는다. 딸은 누구보다 강하고, 그 강함은 고통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는 끝없는 딸의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엄마로서 오늘도 딸을 위해 기도한다.
제발 딸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개척해 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