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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by JIPPIL HAN

문득 옛 생각이 나서 20년이 훌쩍 넘은 앨범을 꺼냈습니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젊은 날의 나, 그리고 그 옆에 끼워져 있던 한 장의 편지.

25년 전, 결혼식 후 신혼여행을 떠난 저를 기다리며 아버지가 써 내려간 편지였습니다.


그땐 그저 한 번 읽고 앨범 속에 넣어둔 채 잊고 있었죠.

그 편지를 25년 만에 다시 펼쳐보니, 무뚝뚝하던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스며 나왔습니다.

아마 막내딸에게 건넨, 아빠인생에서 가장 긴 대화가 아니었을까 하며 읽는 내내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이제는 저도 곧 자식을 시집보내는 부모가 될 나이가 되니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시간을 건너온 편지가 제 마음을 꼭 안아 주는 하루였기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어서 적어봅니다.



사랑하는 ㅇㅇ아~

너에게 이렇게 지면을 통해 사연을 적어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구나.

방문 앞에 걸린 너희 삼 남매의 어렸을 때 사진을 보니 정말 세월의 빠르기를 실감하겠구나.

너는 막내지만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어른스러웠고, 매사에 낙관적이어서 엄마 아빠는 항상 대견스러웠단다.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서울 본사 직원은 물론 지방공장 직원까지 모두 와서 조의를 표하는 것을 보고 너의 대인관계의 원만함을 하나님께 감사했단다.


이제 삼 남매 중 마지막으로 너까지 다른 집 식구로 보낸다는 것이 엄마아빠에게 너무나 안타깝고 섭섭하며 허전하구나.

네가 신혼여행을 떠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너의 방에 들어서니 가슴 저 구석부터 밀려오는 공허함으로 괴롭더구나. 그러나 그동안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렇게 곱게 자라 저렇게 잘생긴 사위를 맞게 했다는 행복감으로 애써 너에 대한 슬픔을 희석시킬 수 있었단다.


이제부터 너희 부부는 의식주를 바탕으로 한 모든 인생사를 너희들 자신이 설계하고 책임지며 실천해야 하는, 어떻게 보면 무척 외롭고 힘든 길을 걸어야 한다.

네가 어떻게 결혼생활을 하여야 할지는 엄마가 잘 가르쳐서 다른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아빠가 자신 있게 너에게 권할 수 있는 딱 한마디는

"네 엄마 같은 사고방식과 행동으로 가족과 이웃을 대하라"라는 말이다.

아빠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엄마 같은 훌륭한 배필을 만나게 해 주신 것이다.

나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뚜렷한 발돋움은 하지 못했지만 너희 엄마 때문에 항상 행복했다고 느끼며 살아왔다. 이러한 나의 행복감을 사위에게도 줄 수 있는 네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현대사회는 경제력의 밑받침 없는 행복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행복의 필수적인 경제력(노년에는 절대적인)을 기르는 길은 딱 하나 젊었을 때의 계획적이고 조금은 지독하다고 할 정도의 '내핍과 절약'이라고 생각한다. 젊음은 이러한 내핍과 절약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너희들 신혼집에 가서 주인들의 뻔뻔하고 구역질 나는 거들먹거림을 보았다.*(저희 전셋집 3층에 주인 집이 있었는데 이래저래 횡포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또 화가 나네요)


이러한 경험은 너희들의 경제적 자립을 촉진하는 요인의 하나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다.


건강은 육체적인 트레이닝도 중요하지만 매사에 긍정적이고 감사하며 여유를 가지는 마음가짐이 더욱 중요하다. 자동차도 며칠만 세워놓으면 기능이 떨어진다. 하물며 인체는 어떻겠니?

끊임없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작은 일에 감사하면 건강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둘 다 너희들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공을 항상 생각하며 생활할 줄 믿는다.

너를 떠나보내는 서글픔과 공허를 잊으려면 세월의 흐름 밖에 없을 것 같구나.

우리 부부의 살아온 길을 거울삼아 우리보다 훨씬 더 행복한 부부가 될 것을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이만 줄인다.


실제 아빠의 손편지


12월 22일 새벽 3시에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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