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대가」 ①
그 사람의 기분과 기질을 유지해야 한다고? 만에 하나 N이 마약을 시작했다면 빌어먹을 여행은 끝장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도 계속 약이 필요할 테고, 그것은 N의 다른 이름들이 아닌 N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 버리지 못할 자신의 모습을 또 하나 만들어 버리는 셈이었다. 그러한 점들에 이 여행의 모순이 있었다. N이 창조하는 인물들은 늘 말주변이 좋다. 그래야만 술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까. 그 때문에 우리는 늘 술을 마신다. 주종에 변화는 줬어도 술을 안 마시는 역할은 없었다. 우리의 인물들에게 빠지지 않는 특징들이 생기기 전에는 보다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N이 말주변 없고 숙맥 같은 캐릭터를 잡아 보기도 했고 내가 나서서 술자리를 잡은 적도 있었지만, 그런 여행들은 물에 젖은 휴지조각처럼 기억에 남지 않고 맥없이 풀어졌다. 그 정도로는 N의 흥미를 끌 수 없었다. N 역시 인물의 정형화를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는 정말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은 걸까? 여행을 반복하며 한계를 느낀 적은 없을까? 어쩌면 인물들의 패턴을 허용하는 것이 여행을 지속하기 위한 N의 타협점일 수 있었다. 허나 그렇다면 원점으로 돌아가서, 매번 다른 사람이 되고자하던 N의 신념을 양보할 만큼 이 여행의 지속이 가치 있는 것일까? 그의 신념 자체가 이 여행의 정체성인데 그것을 부정하면 여행을 하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애초에 증명하기를 거부한다느니 훼손되지 않는 가치를 찾는다느니 하던 모든 말들이 나를 꼬드기기 위한 거짓 명분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종업원이 감바스 알 아히요와 발렌타인 온더록스 두 잔을 가져왔다. 화장실에 갔던 예비 변호사도 뒤따라와 앉았다.
“드디어 음식이 나왔네요.” 예비 변호사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네. 얘기할 때가 됐군요.” 나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접시를 그에게로 살짝 밀었다. “일단 맛부터 좀 보세요.”
예비 변호사가 새우를 포크로 찍어 손바닥으로 아래를 받친 뒤 재빨리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새우를 접시 위에서 포크로 밀었다 당기기만 반복했다. 음식을 삼킨 그가 팔짱을 끼고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린 채 나를 돌아봤다.
“지하실을 열면요……” 나는 동그랗게 말린 새우를 보며 눈깔사탕 같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있어요.”
“아이들이요?”
“상상도 해선 안 될 짓을 하고 있죠. 화면 너머에서.”
나는 포크로 새우를 쿡 찔러 입에 넣고 씹었다. 통통한 식감이 생생했다. 예비 변호사는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리는 듯 침묵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멋쩍게 웃었다.
“역시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얘기하고 싶지 않으세요?”
“듣기 불편할 거예요.”
“규찬 씨가 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면,”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예비 변호사는 팔짱을 풀고 술잔을 쥐었다. 그리고 술잔을 살짝 기울여 테이블에 밑바닥 모서리 한쪽만 닿게 했다. 얼음이 달각거렸다. 한쪽 발만 무대에 딛고 선 발레리노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른손으로 울대를 쓸어내리고 헛기침했다.
“………어릴 때 이사랑 전학을 자주 다녔어요. 한 열두 살 때까지. 초등학교 일 학년 때 등록했던 합기도 도장도 아주 짧게 다녔었죠. 피아노 학원이랑 작은 교회, 문구점, 공방 같은 데와 한 건물에 함께 입주해 있던 작은 도장이었어요.”
앞서 비운 접시에 남은 생크림을 보자 속이 안 좋았다. 약간 남은 마티니를 마저 마시고 종업원에게 빈 잔과 접시 들을 치워달라고 했다. 얼음이 녹고 있는 발렌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합기도 도장이랑 피아노 학원이 통원차량 한 대를 함께 사용했는데, 한 번에 두 곳 원생들을 다 태웠어요. 수업 시간도 같고 원생들도 적어서 그랬나 봐요. 차를 타러 가는 게 좋았어요. 피아노 학원에 좋아하는 누나가 있었거든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예비 변호사가 씩 웃었다. 나는 술잔의 로고가 보이도록 반 바퀴 돌렸다.
“학교에 다른 반 친구가 있었는데 같은 도장에 다니면서 친해졌어요. 친화력이 좋은 친구였죠. 장난기도 많고 모험심도 많고. 친구들을 모아서 동네 구석구석 탐험하길 즐기던 애였어요. 한날은 저더러 애들을 모아서 쓰레기장에 가자더라고요. 진짜 쓰레기장은 아니고 저희끼리 그렇게 부르던 곳이었어요. 언덕 위에 시멘트벽돌로 담장을 세워 놓고 안에 넓은 마당과 컨테이너 건물이 있던 곳이었죠. 담벼락 안팎으로 타이어, 고장 난 전자제품,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고요.”
“고물상 같은 덴가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진짜 고물상은 아니었지만.”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긴 숨을 내쉬었다. 예비 변호사가 좀 드시라며 접시를 내 쪽으로 살짝 밀었다. 소스에 흠뻑 젖은 편마늘을 새우 위에 얹고 함께 떠먹었다. 혀로 새우와 마늘을 휘감고 천천히 씹으면서 식감에 최대한 집중했다.
“전 안 간다고 했어요. 거긴 정말…… 음침하고 느낌이 안 좋았거든요. 평소 탐험하던 다리 밑이나 사람 없는 공사장과는 달랐어요. 친구는 겁쟁이냐며 장난을 쳤죠. 녀석은 통원차량에서 피아노 학원 친구들한테도 함께 탐험하러 가자고 꼬드겼어요. 그중에는 제가 좋아하는 누나도 있었죠.”
“그 누나도 함께 갔나요?”
“누나는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저는 최종적으로 누가 갔는지 알지 못했어요. 보통 다들 집에 갔다가 다시 모여서 탐험을 떠나는데 저는 그날 빠졌거든요.”
술잔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물기가 흥건했다. 악력으로 유리잔을 깨뜨릴 수 있을까 궁금했고, 안간힘을 다해 곁길로 새어나가려는 생각들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나는 힘을 다 주지 못하고 술잔을 놓았다.
“그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괜히 약이 오르더라고요. 겁쟁이라고?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죠. 그리고……”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을 늘였다. “학교에서 친구를 다시 만난 게 며칠 뒤였던 것 같은데…… 주말이나 휴가가 껴 있던 모양이에요. 위풍당당하게 친구한테 쓰레기장에 가자고 했죠. 그런데 친구가 안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왠지 모르게 긴장한 얼굴이었어요. 쓰레기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친구는 아니라고, 그날도 같이 갈 애들이 없어서 안 갔었다고 했어요.”
예비 변호사는 얼음이 녹는 걸 관찰하듯 술잔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기억나는 건, 그날부터 친구가 탐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거예요. 다른 아이들이랑 잘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면 평소랑 똑같았는데 말이죠. 그리고 그즈음 통원차량에서 제가 좋아하던 그 누나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어요. ……이야기가 길어지네요.”
나는 멋쩍게 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예비 변호사가 잔을 맞부딪치며, 괜찮으니 천천히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며칠 뒤 주말 오후에 저 혼자 쓰레기장에 갔어요. 친구들이 정말 안 갔었다면 미지의 탐험인 거고, 갔었더라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알아내고 싶었거든요. 거기 가려면 숲 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꽤 올라야 했어요. 열심히 걸어서 도착했을 때 쓰레기장의 녹슨 대문은 잠겨 있지 않았죠. 그래도 저는 뒤편 담장 아래 쌓인 마대자루를 밟고 담을 타넘어 들어갔어요.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 조심히 앞마당으로 나갔죠. 그간 지나다니면서 슬쩍 보고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더라고요. 마당에 쌓인 잡동사니들은 모두 정돈되어 있었어요. 타이어도 일렬횡대로 높이 쌓아 뒀고 차 문짝도 크기별로 가지런하게 세워져 있었어요. 가스레인지나 전자레인지도 종류별로 착착 쌓여 있었고요. 컨테이너에 창문이 있었는데 커튼이 쳐져 있어서 안을 볼 수는 없었어요. 문고리를 돌려 볼까 고민하던 찰나에 대문이 열렸죠. 멀끔하게 생긴 젊은 남자가 양손에 휘발유통을 들고 서 있었어요. 그는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은 눈치였죠. 마당에 들어와 휘발유통을 조심히 내려놓더니 제 이름……을 불렀어요.”
순간 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본명도, 수많은 가명들도. 입술이 말라갔다. 예비 변호사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는 사람이었나요?”
나는 혀로 입술을 살짝 축이고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때는 마냥 어른 남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이십대 초중반의 청년이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물었죠. ……‘규찬아, 형 기억 안 나?’ 나는 모른다고, 제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어요. 남자는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면서 휘발유통을 마당 한쪽에 옮겼어요. 그리고 컨테이너 문을 열더니 더워 보이는데 들어와서 물 한잔 마시라고 하더군요. 제가 쭈뼛거리고만 있으니 남자가 말했어요. ‘합기도 도장에서 같이 운동했었잖아. 잊어버렸어?’ 남자는 몇 달 전에 저희 도장에서 초등부 일일 코치를 맡았다고 말했어요. 도장의 제 친구들 이름도 여럿 알고 있었죠. 저희 도장에서는 수상 경력 있는 선배들이 가끔 일일 코치를 하러 오곤 했거든요. 그 말을 들으니 본 적 있는 것도 같았어요. 그를 따라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죠.”
술을 들이켰다. 동그랗게 녹은 얼음조각을 씹어 삼켰다.
“컨테이너 입구에는 주방이 있었어요. 안쪽으로 들어가니 그 당시 많았던 박스 형태의 퉁퉁한 브라운관 TV들이 체스 판을 세워놓은 것처럼 쌓여져 있었어요. 다른 벽 쪽에는 온갖 디지털카메라와 캠코더가 얼기설기 쌓여 있었죠. 그는 저를 소파에 앉히고 물을 한잔 주면서 운동은 열심히 하느냐고 물었어요. 전 그렇다고 했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남자가 넌지시 묻더라고요. ‘친구가 무슨 말 안 했어?’ 저는 고개만 저었죠. ‘그래?’ 남자가 미소 지었어요. 그때 느낌이 왔어요. 그 녀석, 여기 왔었구나. 남자가 재밌는 걸 보여 주겠다면서 TV 하나를 켜더니 뭘 막 연결하더라고요. 화면에 영상이 뜨자 남자는 후다닥 구석으로 가서 웅크리고 앉았어요. 화면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간 정적이 일자 테이블에 놓여 있던 예비변호사의 손이 주먹을 쥐듯 조금씩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나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주변 손님들의 말소리, 발소리, 바에 흐르는 선율 위로 풍부하고도 섬뜩한 뉘앙스가 예비 변호사와 나 사이를 메웠다. 침묵 속에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 당신이 할 수 있는 수많은 상상들 중에 정확히 그것이라고, 뉘앙스는 그렇게 가리키고 있었다. 술잔을 내려놓고 이마를 문질렀다.
“친구와 아이들…… 제가 좋아하던 누나도 화면 속에 있었어요. 아이들뿐이었죠.”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남일 얘기하듯 목소리 톤을 높였다. “그때는 몰랐어요. 내가 뭘 보고 있는 건지. 아이들, 아이들은…… 알 수 없는 몸짓들에, 그냥……. 무섭지도 않았어요. 다만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죠. 남자를 돌아봤어요. 그는 무릎을 웅크린 채로 다리를 끌어안고서 절 보며 웃고 있었어요. 소름끼치게.”
예비 변호사를 쳐다봤다. 그의 눈은 당혹감에 휩싸여 있다가 술잔 속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 여자는 내 얘기를 믿을까? 나는 내 이야기를 믿고 있나? 빌어먹을 상동과 하동의 컨테이너들, 이삿날 그 역겨운 풍경을 처음 봤을 때 점심으로 먹은 짜장면을 모두 게워내던 장면이 메스껍게 떠올랐다. 습관적으로 술잔을 잡았다. 빈 잔이었다.
“저는 달아났어요. 남자는 쫓아오지 않았죠. 그리고……” 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죄송해요. 딱 한 잔만 더 할게요.”
나는 바텐더가 있는 바 앞으로 가 발렌타인을 스트레이트로 한 잔 주문했다. 샷 잔에 술이 채워지자마자 반을 마셨다. 내게 웃긴 이야기가 있었더라면, 나는 작은 무대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저기 서서 떠들어대며 저 여자를 웃게 해 줄 수 있었더라면. N이 사준 샛노란 쓰리 피스 정장을 입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나를 본다. 상상으로나마 너무 먼 이야기. 잔을 들고 예비 변호사 곁으로 돌아갔다.
“괜찮으세요?” 예비 변호사가 걱정하며 물었다. 뜬금없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 없지. 그의 태도를 보면 확신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집에 가서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영상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됐고, 그게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들이 괴로워했다는 건 알 수 있었죠. 다음날 저는 통원차량에서 친구를 보자마자 안전벨트를 풀고 달려들었어요. 녀석은 영문도 모른 채 얻어맞았죠. 왜 때리느냐고 소리를 지르길래 저는 악을 쓰며 제가 좋아하던 누나의 이름을 외쳤어요. 그러니까 친구는 사색이 되더니 울음을 터뜨렸어요.” 나는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숙였다. “왜 때렸나고요? 오해였죠. 어린 나이에 나름대로 영상을 해석하다 오해한 거예요. 녀석이 누나를 괴롭혔다고. 젠장할, 녀석도, 녀석도 당한 거였는데, 그냥 어린애였는데.”
두 주먹을 테이블 위에서 꽉 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예비 변호사는 한참 뒤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규찬 씨도 어렸잖아요. 몰랐으니까.”
나는 예비 변호사와 눈을 맞췄다. 그가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술을 마셨다.
“그 뒤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애들이 치고 박았으니 부모님들끼리 만나서 대화한 모양이에요. 부모님은 제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우리는 늘 그랬듯 곧 이사를 갔고요. 그 동네를 떠난 게 그때의 일과 연관이 있는지 몰랐지만, 지금까지도 저는 물어본 적이 없어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수년 뒤에, 내가 본 게 뭐였는지 정확히 깨달았을 때 저는 혼란에 빠졌어요. 인간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소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게 양가적 감정이죠.”
“애증 같은 거요?”
“맞아요. 사랑하는데 증오스러워. 사람 완전 미치는 거죠.”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건배를 청하고,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이 타들어가고 코로 술의 진한 향이 솟구쳤다. “극도로 경멸하는 대상을 원해 본 적 있어요?”
예비 변호사는 쥐고 있던 술잔을 검지로 톡톡 치며 생각하다, 잘 모르겠다고 했다.
“저한테는 그게 성애였어요.”
“아.”
“끔찍했어요. 근데 궁금하더라고요. 아니, 원했죠, 저도.”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눈가를 문질렀다. 캄캄한 눈앞에 살구색 유화물감이 몇몇 선분으로 뭉개지듯 그어졌다. 끔찍한 장면의 인상인지 그저 술기운의 영향인지 알 수 없었다.
“내 안에 그런 욕구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 했어요. 추잡하고 더럽게 느껴졌죠. 하지만 분명 존재합니다. 몸 안에서 꿈틀거려요. 혼자 해소할 때도 있죠. 그러면 더 미치는 거예요. 성적 쾌락을 좇는 나와, 성욕 자체를 끔찍해하는 내가 분리되고, 독립적 존재로 성장하고, 이윽고 양쪽 모두 서로를 죽이려 들죠. 끝나지 않는 전쟁이에요, 지금까지도.” 나는 팔짱을 끼고 테이블에 기댔다. “요즘은 그런대로 휴전 중이지만.” 의자에 등받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스툴일 수 없겠지만.
예비 변호사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공부가 도움이 되었나요?”
“네?”
“정신의학이요.”
“아.” 술을 더 마시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러다 정말 사달이 날지도 몰랐다. 술은 누가 마시고 싶은 걸까? 규찬? 나? 나는 누구인가. 왜 나와 규찬을 분리해서 생각하는가. 담뱃갑을 쥐고 모서리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여러 이론을 공부하고 교수님과 상담도 나눴죠. 공부하고 연구하는 내내 자기직시와 자기인정을 반복했어요. 나이가 들면서 제 나름대로 사건을 재구성해 보기도 했고요. 남자는 아마 친구에게 그랬겠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평소처럼 친구들과 똑같이 지내라, 안 그러면……. 그런데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어요. 남자는 왜 나한테 영상을 보여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궁금증을 해결하기엔 단서가 너무 부족했어요. 혼자 오랜 기간 생각을 거듭했죠. 그러다 친구와 싸우고 난 뒤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왜 싸웠는지 파헤치다가 사건의 전모를 밝혀냈을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그러나 당장 그 일에 관계된 사람과 연락할 방도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부모님께 묻고 싶지도 않았고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심정으로 인터넷에서 그 시절 기사들을 뒤지기 시작했어요.”
“찾았어요?”
“네. 당시 워낙 흉흉한 사건들이 많아서 큰 이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관련 기사가 몇 건 있었어요. 경찰 조사 과정에서 한 아이가 사건에 관해 진술했는데, 내용으로 짐작컨대 제 친구가 진술한 것 같더라고요. 아마 제가 친구를 때렸고,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본 그의 부모가 신고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남자는 잡았나요?”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고개를 저었다.
“후속 기사에는 컨테이너를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써져 있었어요. 당시 인근 버려진 밭에서 카메라와 메모리칩, 비디오와 시디 등이 다량으로 태워져 있었대요.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휘발유……” 예비 변호사가 말끝을 흐렸다.
“더 이상의 후속 기사는 없었어요. 저도 조사를 멈췄고요.” 나는 테이블에 담뱃갑 모서리를 대고서 허리를 곧게 폈다. “이제 남은 것은 저를 직시하는 일뿐이었어요. 저는 어린 나이에 충격적인 영상을 보게 됐죠. 영상을 오해해서 친구를 때렸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른들에게 사건을 알린 단초가 되었어요. 결과적으로 범인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세상에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알렸죠. 그런데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친구를 때릴 바에야 사건을 묻어버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요. 물론 그래선 안 되지만, 친구를 때릴 바에야 말이죠.”
“오해가 있었잖아요.”
“그렇죠. 근데, 적어도 나는 알아요. 친구를 때린 정확한 이유 말이에요. 뭔지 모를 영상에서 친구가 누나를 괴롭힌다고 지레짐작했지만 친구도 밝은 표정은 아니었어요. 친구가 누나를 작정하고 괴롭혔다는 확신이 없었는데, 그런데도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무모한 탐험에 아이들을 끌어들인 건 녀석이었으니까, 맞아도 싸다고…… 그냥 맞으라고……. 주먹질 한 번 한 번이 결국 다 네 탓이라고 못 박는 짓이었어요. 녀석도 그런 일을 당할 줄 몰랐을 텐데. 녀석도 당한 것뿐인데. 나쁜 놈은 그 개새끼였는데.” 테이블에 담뱃갑을 대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고개를 숙이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떤 시절에는 비겁하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차라리 영상에 남자가 찍혔더라면, 영상의 내용이 뭔지 그때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내가 분노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 명확했었더라면 내가 지금보다는 덜 괴로웠을 텐데. 애먼 친구한테 다 뒤집어씌우고서는 결국 내 마음 편할 궁리만 했다는 거죠. 다른 친구들을 생각했더라면 어떻게 그런 궁리를 했겠어요?”
담뱃갑 모서리가 테이블에 눌려 찌그러졌다. 몸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멈추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나만 해도 몸의 욕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섹스를 불결하게 여기고, 저항하고, 사랑에 걸림돌을 느끼며 누군가에게 내 과거를 들킬까 두려워하는데, 녀석들이라고 안 그랬을까?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면서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마음의 단정이,”
예비 변호사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말이 멎으면서 자조 섞인 의문이 머리를 메웠다.
너 오늘 아침에 어디서 눈 떴는데?
네 이름이 뭐지? 넌 누구지?
“알았어요.” 나는 순식간에 떨림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떨림이 가라앉는 게 아니라 몸 밖으로 빠져나가듯 공허했다. “왜 종일 기분이 안 좋았는지.”
“왜요?”
나는 그를 돌아봤다.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에요, 별 이유 없어요. 생각이 많아서 그랬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