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33화

3부 「대가」 ②

by 윤아무개

우리는 술집을 나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열대야의 덥고 습한 어둠이 끈적끈적하게 살갗에 달라붙었다. 저녁까지 북적거렸던 번화가도 썰렁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밤거리는 낮의 걸음들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듯 스산한 기운도 있었다. 예비 변호사가 휴대폰을 켜더니 한 시 가까이 됐다고 말했다.

“첫차 오려면 아직 멀었네요.” 나는 담배연기를 뿜고 대답했다.

“찜질방 갈래요?” 예비 변호사가 자신의 팔뚝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피로도 풀 겸.”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그렇지만 피곤하기도 한 데다 술을 더 마실 수는 없었고, 달리 할 만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골목 저쪽에서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나선형 골목이라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서히 실루엣을 드러내며 등장한 사람은 노인이었다. 노숙자인 듯 추레한 차림의 그는 몸집보다 큰 종이박스를 등과 어깨에 십자가처럼 지고 우리를 천천히 지나쳤다. 담배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며 낮의 풍경을 떠올렸다. 기차역에서 다소 드센 모습으로, 혹은 위축된 모습으로 돌아다니던 노숙자들. 그때는 눈에 담지 않았지만 도처에서 쓰레기통을 기웃거리고 그늘에 앉아 식사를 해결하던 사람들. 그들이 잃은 것은 집뿐만 아니라 이름과 삶 전부일지 몰랐다. 이름 잃은 자들에게 삶은 형벌이 아닐까? 나의 삶 역시 이름을 앓던 세월과 이름을 잃은 세월로 양분되었다. 어느 쪽이 낫다고 할 것 없이 두 세월 다 형벌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지금의 형벌은 무척이나 달큼할 따름이었다. 유해할 정도로.

찜질방에 가기 전 술도 깰 겸 산책을 했다. 예비 변호사는 로키가 사회학과 동기였으며 지금은 네일아티스트로 일한다고 했다. 둘은 절친한 사이였지만, 내심 로키가 본인만큼 우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듯해 서운한 눈치였다. 예비 변호사는 이따금 내가 지루해하는지 살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놨다. 옆에서 종알거리는 이야기들이 듣기 나쁘지 않았다. 더 이상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은은하게 들었고, 그렇다면 내 이야기에 진실의 순도를 높여야 할지 침묵을 지켜야 할지 고민했다. 미약하지만 선선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그가 양팔을 감싸 안았다. 그에게 팔을 둘러 주고픈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을 경계하며 이제 찜질방에 가자고 말했다.

샤워기를 틀어 한참 씻다가 수온을 조금 더 높였다. 쏟아지는 뜨거운 물에 숨이 가빠지며 생각이 멈추었다. 정신은 작은 이성일 뿐, 거대한 이성은 몸이다, 이걸 어디서 읽었지?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닐 테지만, 몸의 감각으로 잡생각을 차단하면서 보다 실질적인 문제에 집중하자면 어김없이 저 말이 떠올랐다. 본래의 뜻이 아니면 어때. 각자의 상황에 맞게 논리를 부여해 주는 게 철학의 본분 아닌가? 지금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네. 수도꼭지를 돌려 수온을 더 높였다. 당장은 똑똑한 예비 변호사에게 내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를 모욕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제 와서 들통 나는 것이 덜 모욕적이리라 볼 수도 없었다.

황토색 사우나복을 입고 지갑과 담배를 챙겼다. 휴대폰을 켜자 인호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웬 찜질방? 호텔 가지.

발신 시각을 보니 샤워 중에 온 문자 메시지였다. 답장하지 않고 휴대폰을 캐비닛에 넣어 잠갔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휴게실에는 큰 전등도 꺼져 있었고, 다큐멘터리가 방영 중인 TV도 음소거 상태였다. 예비 변호사는 보이지 않았다. 레자 매트리스에서 코고는 사람들을 지나 매점으로 갔다. 식혜 두 병을 주문하고 매점 옆 벽면에 있는 커다란 책장을 구경했다. 죄다 출간한 지 삼십 년은 족히 지났을 책들이었다. 뒷짐을 지고 너절해진 책등을 훑는 사이 파란 사우나복을 입은 예비 변호사가 목에 수건을 걸치고 나왔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우리는 식혜를 한 병씩 들고 주홍빛 조명이 아늑한 황토방에 들어갔다. 이용객 두 명이 누운 채로 얼굴에 수건을 덮고, 다리를 높이 들어 벽에 발뒤꿈치를 대고 있었다. 우리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적당한 온기에 몸의 긴장이 풀렸고 불빛마저 몸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시선이 마주칠 때만 잠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목덜미에 땀이 배어나올 때쯤, 마네킹처럼 누워 있던 이용객들이 일어나 수건과 목침을 챙겨 나갔다. 둘만 남자 예비 변호사가 바로 입을 뗐다.

“숨 막히는 줄 알았어요.”

“더우세요?”

“아뇨, 심심해서요.” 예비 변호사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그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식혜를 한 모금 마셨다. “다들 아직 같이 있을까요?”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로키가 인호의 손톱을 다듬어 주는 상상을 하고 피식 웃었다. 볼이 쏙 들어가도록 빨대로 식혜를 빨았다. 병따개는? 연달아 약쟁이를 만난 게 과연 우연일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예비 변호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떠날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어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작은 집을 구해서 멋지게 꾸미고 싶다고 했다.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근사한데요. 어떻게 꾸미시려고요?”

“단층주택에, 건물 자체가 소박한 다락방 느낌이면 좋겠어요.”

“다락방이라.”

“분석하지 마세요.”

예비 변호사가 식혜가 든 수통을 들고 나를 겨눴다. 나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현관에 사다리를 붙여도 재밌겠네요.” 내가 말했다.

“좋은데요? 사다리 허리를 잘라서 현관문을 닫으면 사다리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해야겠어요.”

“옥상엔 뭐가 있죠?”

“선베드와 탁자, 다이빙대요.”

“풀장도 있군요.”

“아뇨. 콘크리트 바닥인데요.”

“분석 안 해도 되는 거 맞아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식혜를 마셨다. 그새 얼음이 녹았는지 밍밍했다. “집을 꾸민 다음은요?”

“아무것도 안 해요. 집이 낡을 때까지.”

“오호.” 나는 몸을 약간 뒤로 젖히며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황토벽을 스크린 삼아 한 채의 집이 낡아가는 과정을 영사해 보았다. 근사하고 지루한 시간. “오래 쉬겠군요.”

“규찬 씨는 떠난다면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주홍빛 조명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빛의 잔상들. “비슷해요. 그런데 아무도 안 만나고, 평생 그곳에 저 혼자 살면 좋겠네요.”

“평생이요?”

“네. ……기억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포화상태라, 더 이상 새로운 만남이나 기억을 쌓고 싶지 않아요.” 나는 식혜를 한 모금 마셨다. “뭐, 지금은 바쁘게 살아야죠. 머뭇거리는 순간 온갖 기억들이 날 삼켜버릴 테니까. 그런데도 가끔 상상해요. 돈을 많이 벌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을 수 있다면, 살아온 나날들을 곱씹으며 살고 싶다고. 무엇 때문에 잘못됐는지 생각하면서, 내가 저지른 잘못들을 평생 후회하면서.”

“슬픈데요. 지옥을 짓고 들어가 살고 싶으신 것 같아서.”

“현재는 과거의 지옥이죠.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 할 과거들이 산적해 있어요.”

“아이러니하네요. 대가를 치르도록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게.”

나는 무슨 말이냐는 듯 예비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돈 벌어야 하잖아요, 다들.” 예비 변호사가 바닥에 깔린 멍석을 주먹으로 꾹 눌렀다. “죄책감에 시달릴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죠. 대가를 치를 여유가 한 번이라도 찾아올까요?”

문이 열리고 다른 이용객들이 들어왔다. 우리는 황토방을 나와 여기저기 둘러보다 사람이 없는 편백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온도가 황토방보다 낮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나무 숲이 그려진 시트지가 통유리창을 덮고 있었다. 연둣빛 조명이 은은하게 대나무 숲을 밝혔다. 우리는 서로의 컨디션을 확인하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예비 변호사는 나의 지옥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했다.

“제가 나쁜 놈이었어요. 나쁘고, 병들었었고. 곁에서 지키고 보살펴주던 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끝내 제가 깽판을 치고 상처를 줬어요.” 나는 얼음이 다 녹은 식혜를 마저 마셨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아뇨, 어쩔 수 있었겠죠. 내가 건강과 여유를 지켰더라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끝난 건 억울하거나 후회되지 않아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거든요. 하지만 상처를 덜 주며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모두 내 탓이라 그것만은 후회됩니다.”

“좋은 사람이었나 봐요, 그분.”

“맞아요.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어릴 때부터 전 스스로 좋은 놈이 아니라고, 나쁜 놈이라고 되뇌어왔어요. 그런데 삶의 분기점에 설 때마다 실은 생각보다 나쁜 놈이 아니라는 거, 그렇다고 그다지 좋은 놈도 아니라는 거, 가장 보통의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죠. 그런데도 매번 합리화했어요. 난 나쁜 놈이라고, 그렇게 되뇌며 늘 나쁜 선택을 했죠. 가장 손쉽게 상황을 끝낼 방법이었으니까. 그런 선택을 반복하면 어느 순간 정말로 나쁜 사람이 된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제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됐어요. 절대로.”

예비 변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무릎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위악부리지 말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들었더라면, 어쩌면 제게는 여백이 남았을지도 모르죠. 위악이라는 건, 부리지 않았을 때만 존재할 수 있는 여백 같은 개념일지 몰라요. 그에게 상처를 주면서 제 위악은 그저 악이 되어버렸습니다.” 감정의 격함 없이 눈물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조용히, 천천히 눈시울을 진정시켰다. “그때 부리려던 악은 거짓이었는데 지금은 사실이 됐죠. 거짓이 사실이 되면 그 이후는 되돌릴 수가 없어요. 그런 놈인 채로 살아야하는 거예요, 평생.”

“그렇더라도 더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예비 변호사가 따뜻하게 말했다. “규찬 씨는 노력할 거잖아요.”

나는 대나무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조용히 숲만 쳐다봤다. 판다라도 뛰쳐나오길 기다리는 사람마냥. 잠시 후 예비 변호사가 거짓, 하고 중얼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태어나서 처음 한 거짓말 기억나세요?”

여행을 작당할 때 술집 사장에게 했던 거짓말이 떠올랐지만 적당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글쎄요.” 내가 웃었다. “혹시 기억하세요? 처음 한 거짓말?”

“처음은 아닐 테지만, 제가 기억하는 거짓말 중엔 최초예요.”

“필요 이상으로 정확하시네. 어떤 건데요?”

“어릴 때 부모님 따라 교회를 다녔거든요. 교회에 병설 어린이집이 있어서 거기도 다녔어요. 아침 여덟 시면 통원버스가 집 앞에 왔죠. 내색은 안 했지만 가고 싶지 않았어요. 제일 좋아하던 만화가 매일 아홉 시에 TV에서 했었거든요.”

“타당한 이유네요.”

“겨울이었어요. 아침을 먹다가 TV에서 제가 좋아하는 만화 스페셜 편이 방영된다는 걸 알았어요. 평소보다 분량도 한 시간이나 더 길다더라고요. 그래도 부모님 성격을 아니까 지레 체념하고 집을 나섰죠. 그런데 그날따라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안 오는 거예요. 날은 추운데 차는 올 생각도 안 하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발만 동동 굴렸죠. 미련하게 삼사십 분을 기다린 것 같아요. 꽁꽁 얼어붙은 몸으로 창문을 올려다봤어요. 그때 저희 집이 빌라 이 층인가, 삼 층이었을 거예요. 창문에 대고 버스가 안 온다고 소리쳤어요. 생각해 보니까 왜 아무도 함께 버스를 기다려주지 않았을까요? 이상하네.”

예비 변호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어깨를 으쓱했다.

“부모님은 못 들으셨는지 반응이 없었고, 저는 집으로 올라갔어요. 부모님께선 놀라셨죠. 저는 어린이집 버스가 골목으로 안 들어왔다고, 큰길에서 그냥 지나가더라고 말했어요. 부모님은 지나간 차가 정말 통원버스였느냐고 물었고, 저는 그렇다고 대답했죠.”

“정말 버스를 봤어요?”

“노란 버스가 큰길에서 지나가는 걸 보긴 했어요. 근데 저희 어린이집 차량인지는 몰랐죠. 그런 차가 한둘이 아니니까. 저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예비 변호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날 저는 막 시작한 만화 스페셜 편을 볼 수 있었어요. 뒤에서는 부모님이 번갈아 어린이집에 전화를 해 고함을 질러댔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만화를 볼 수 있었어요. 계속. 그러고 좀 지난 다음부터 부모님이 교회에 안 나가기 시작했어요. 매주 성실히 다니던 분들이었는데. 어렸던 저는 그저 놀 수 있어서 좋았죠. 우리 집은 그해에 이사했어요. 당시 동네 어른들이 우릴 안 좋게 봤다는 건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어요. 워낙 어렸던 터라 뭐가 문제였는지 몰랐죠.”

예비 변호사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의 이야기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경계심이 올랐지만, 백번 생각해도 그가 나를 속일 이유는 없었다. 예비 변호사가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규찬 씨 이사했을 때랑 비슷하죠? 아까 이야기 듣다가 놀랐거든요.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요?” 나는 웃었다. 물론 내게도 그를 속일 이유는 없었다.

예비 변호사는 지역까지 옮겼던 이사는 그때가 유일했다고 말했다. 이후 같은 동네에서 맴돌 듯 셋방살이를 하다 중학생이 되고서야 지금 사는 집에 정착했다고 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입을 뗐다.

“통원버스가 오지 않은 건 사실이잖아요. 거짓말이 큰 문제는 아니었을 텐데.”

“제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조금은 덜 사나웠겠죠.”

“어른들의 다른 사정이 더 있었을 겁니다. 이사라는 게 그렇잖아요.”

“글쎄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나는 마지막 남은 식혜를 마저 마시고 빈 수통을 목침에 올려뒀다. 이사하고는 좀 나아졌느냐고 묻자 그가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꾸 사는 게 어렵고 힘드니까, 정말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예비 변호사가 빈 수통으로 무릎을 꾹 누르며 말했다. 그는 알고 있다. 어딘가로 훌쩍 떠난다고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참고 싶었다. 하지만,

“가끔씩 나 자신이 낯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내 이름이 문득 이질적이고 생소하게 느껴지죠.” 그만해. 하지만 나는 나를 멈추지 않는다. “미시감. 익숙했던 것, 이미 겪어본 것인데 꼭 처음 겪는 것 같은 느낌. 삼십 년 가까이 불려온 이름이 낯설어질 때, 그 이름을 걷어버리고 싶어지곤 해요. 그러고 나서도 남는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겠죠.”

지금 나에게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거짓말의 대가는 늘 각오보다 크다. 일상을 무너뜨리고 터전을 바꿀 정도로. 불현듯 이 여행에 전부를 걸었다는 사실이 덜컥 겁이 났다. 산더미같이 쌓인 대가가 무엇인지는 치러야 할 순간이 목전에 닥칠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차가운 감각에 주의를 돌리려 손을 뻗었지만, 닿는 것은 미지근한 습기와 빈 수통의 공허감뿐이었다. 마른 혀로 입술을 축이고 예비 변호사를 바라봤다. 그때 문이 열리고 다른 이용객들이 들어왔다. 대화가 툭 부러진 채 우리는 각자 쉬었다. 더 이상의 친밀감을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궁금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는지. 이제껏 살아온 내력을 지닌 이름을 견디며 계속 살아갈 수 있는지. 목침을 베고 누운 그의 얼굴에 새겨진 모든 인상의 역사가 궁금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이 지긋지긋한 여행을 끝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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