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와.”
“장 그르니에가 쓴 『섬』이라는 책의 한 구절이에요. 예전에 감명 깊게 읽고 외웠었는데,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하시길래 생각이 나서.”
“낯선 도시에서 비밀을 간직한 삶이라…… 근사하네요.”
“……”
“……”
“왜 떠나고 싶어요?”
“사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죠.”
“리셋 버튼이 필요하시군요.”
“그런 셈이죠……. 죄송해요. 진료하는 기분 드시겠다.”
“괜찮습니다. 이야기 나누자고 같이 있는걸요. 친구로서 들어볼게요.”
“친구로요?”
“친구는 너무 갔나? ……뭐, 처음 만난 사이고 모르는 사이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지 않겠어요?”
“음…….”
“뭐 이를테면…… 전 초등학생 때 삼촌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어요. 삼촌이 음주운전을 하셨거든요. 차가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다가 전봇대에 쾅. 삼촌은 즉사. 저는 무사, 까지는 아니지만 크게 다치진 않았어요. 대신 평생 운전할 엄두를 못 내고 있죠. 면허도 없어요. 이 이야기는, ……인호도 몰라요.”
“아…… 되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시네요.”
“떠올리기 힘들다는 반증이죠. 남 일 말하듯 하기. 좋은 기억은 아니니까.”
“죄송해요.”
“죄송은요. 이제 차례를 넘기도록 하죠.”
“글쎄요, 무슨 이야기를 할까…….”
“기왕이면 긴 이야기? 여름밤도 생각보다 길어서요.”
“규찬 씨는 짧게 해놓고선.”
“번갈아 하죠 뭐.”
“음, 저도 어릴 때 일인데요, 근데 정말 재미없을 거예요.”
“스탠드업 코미디를 기대하는 게 아니에요. 부담 갖지 마세요.”
“그럼……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필통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어요. 그땐 왜 그리 눈물이 많았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까 그대로 울음이 터져 버리더라고요. 좋아하던 친구한테 선물 받은 필통이라 더 속상했던 것도 같아요. 친구들이 무슨 일이냐 물었고 함께 필통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교실 구석구석을 살펴도 보이지 않으니까 누군가 훔쳐간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돌았어요. 그걸 한 친구가 담임선생님께 그대로 전했고요.”
“음, 훔쳐갔다……”
“저는 어쩔 줄 몰랐어요. 선생님은 우리에게 종례시간 전까지 필통을 돌려놓으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필통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결국 아무도 집에 가지 못하고 모두 책상 위에 무릎을 꿇었어요. 필통은 너무 찾고 싶었지만 일이 커지니까 부담스러워지기도 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이건 한 친구의 필통을 찾는 일이 아니라 다른 한 친구의 양심을 되찾는 일이라고요.”
“비장하네요.”
“전…… 저는 솔직히 도난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께서 잃어버린 게 아니냐고 확인하지 않으셨나요?”
“물어보셨죠. 근데…… 제가 대답을 못 했어요. 무서웠거든요. 선생님도 내내 책상에 있던 필통이 그냥 사라질 리는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도난 외에 다른 가능성은 안 두셨어요.”
“하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죠.”
“마음에 걸리는 건, 잃어버린 게 아니냐고 선생님이 물으셨을 때 대답을 못 했다는 거예요.”
“확신이 없었잖아요.”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친구들은 물론이고 선생님까지 나서니까 일이 너무 커진 느낌이었어요. 도미노가 쓰러지듯 걷잡을 수 없이 일이 굴러가니까 무섭더라고요. 상황이 내 손을 떠났다고 생각했어요. 나한테 벌어진 일인데 아무렇게나 굴러가도록 내버려둔 거예요.”
“……어렸잖아요.”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그때부터 계속 그래왔나 싶은 거죠.”
“……필통은 어떻게 됐어요?”
“범인은 나오지 않았어요. 부드럽게 타이르던 선생님도 점점 윽박지르기 시작했죠. 모두 놀랐어요, 선생님이 화내는 걸 처음 봤거든요. 종례시간이 길어지고, 집에도 못 가고, 다들 다리가 저려 움찔거리고 있으니 눈치가 보였어요. 모두들 제가 그냥 넘어가자고 하길 바랐던 거 같아요. 앞자리 아이는 노골적으로 저를 돌아보면서 신경질을 내더라고요.”
“애꿎은 사람에게 화살이 돌아갔네요.”
“아닐지도 몰라요. 아, 규찬 씨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제가 애꿎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도난사건이 아니라면 괜히 나 때문에 아이들이 잡혀 있던 거니까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더 눈치를 봤군요.”
“맞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선생님 책상에 있던 내선전화가 울리기 시작했어요. 학부모들이 난리가 난 거예요. 선생님은 여러 번 사정 설명을 하셨어요. 그런데도 계속 전화가 걸려오니까 나중에는 전화선을 뽑아버리셨어요.”
“많이 흥분하셨네. 범인은 잡았나요?”
“그게…… 기억이 안 나요.”
“네?”
“이상하게 그것만 기억이 안 나요……. 그저 어느 순간, 저린 무릎 위에 필통이 놓여 있던 것만 기억나요. 이상하죠?”
“도난사건이 아니었나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그때 기억은 다 뒤죽박죽이에요.”
“……그럴 수 있어요. 한 잔 더 마실래요? 아, 아직 남았구나. 네, 저, 여기 마티니 한 잔 더요. 죄송해요, 계속 이야기해 주세요.”
“그 일이 떠오를 때마다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도난사건이 아니었던 거 같아요.”
“확실한가요?”
“느낌이 그래요. ……그 후로 저한테 친절하게 구는 사람은 선생님뿐이었어요. 모두가 저를 배제하고, 암묵적으로 힐난하는 분위기였죠. 저 또한 어린 마음에 모두에게 날을 세웠고요. 정말 도난사건이었다면 모두가 저를 그렇게까지 미워했을까요?”
“모든 일이 이치와 논리에 맞게 굴러가진 않죠. 사람 마음도 그렇고요. 아마 군중심리가 작용했을 거예요. 사회는 개인의 총합이 아니니까.”
“그럴까요……. 아.”
“감사합니다. ……죄송해요, 마저 얘기하세요. 안주도 드시고.”
“네, 규찬 씨도 얼른 드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발령을 받으셨어요. 워낙 인기가 많던 선생님이라 모두가 아쉬워했죠. 그날 일 때문에 선생님을 안 좋게 보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좋아했거든요. 가만 놔두면 안 된다고 난리쳤던 건 학부모들이었어요.”
“여러모로 사랑이 넘치는 학교였네요.”
“정말 그랬죠. 선생님은 다른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저한테 전화번호를 남기고 가셨어요. 아쉬워하던 애들의 눈길은 비난의 눈길로 변했죠. ……제 편을 들어준 유일한 분이었는데, 묘하게 밉기도 했어요. 혼자 그렇게 가버리면 나는 어떡하라고. 전선 뽑힌 전화기가 된 기분이었어요. 내심 부럽기도 했던 것 같아요. 떠나버리면 다 그만일 것 같아서.”
“……연락은 해 봤어요?”
“아뇨.”
“……”
“그때부터 줄곧 떠나고 싶던 곳이었는데 지금까지 살고 있네요.”
“떠나면…… 달라질 수 있어요?”
“달라져야죠. 이를 악물고, 죽을힘을 다해서.”
“……”
“언제부턴가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스스로한테 부여하고 있더라고요. 어릴 때는 어리다고, 자라서는 부모님 뜻을 거스를 수 없다고, 자취할 돈이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세상은 온갖 자격을 요구하는데 저는 단 한 번도 그 자격을 갖춘 적이 없던 것 같아요.”
“어디로 가고 싶어요?”
“음…… 프라하, 슬로바키아, 런던, 뉴질랜드, 벨기에, 피렌체, 시카고…… 지도 펼쳐보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곳도 많아요. 나라인지 도시인지 모르는 데도 있고요. 근데 그래서 가고 싶어요. 날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좋네요.”
“말하고 나니까 싱겁네요. 별거 아닌 일 같고. 근데 저한테는 아직도 그 기억이 지옥 같아요. 어릴 때는 나 혼자 지옥에 살고 있는데 아무도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힘들었어요. 세상 사람들은 다 무탈해 보였거든요.”
“타인의 지옥은 미지근한 법이죠.”
“……소견이 어때요?”
“소견이라니요?”
“그냥…… 제 이야기요.”
“친구로서 들은 건데요?”
“……”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창문도 없는, 밀폐된 지하실 같은 공간을 가지고 있어요. 어두컴컴한 그곳에는 갖가지 트라우마도 있고, 기억을 변형시키거나 잠재워 버리는 가스도 있고, 지독한 공기 속에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는 기억들도 있죠.”
“꼭 여기 같네요.”
“살다보면 잊었던 기억이 번뜩 떠오를 때가 있잖아요. 기억은 삭거나 마모되어 형체가 달라질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아요. 물론 아까 말하신 기억의 공백은 사라진 게 아니라 편집과 비슷한 과정인데, 자세히 말하자면 좀 복잡해요. 중요한 건, 마모된 기억이든 온전한 기억이든, 가라앉아 평소에는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든, 그 모든 기억들이 내면화를 거쳐서 세상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살아가는 태도에 반영된다는 거예요.”
“내가 겪은 일들이 나를 만든다…….”
“그런 셈이죠. 그 일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도 중요하지만, 일어난 일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굉장히 중요하죠.”
“만약 필통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은 좋지 않아요. 벌어진 일은 벌어진 대로 두고, 그걸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거죠.”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지금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처방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거겠네요. 새우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좋아요, 그럼 새우요리랑…… 술 마시기 힘들면 음료수 드실래요?”
“제가 주문할게요. 저…… 네, 여기 감바스 알 아히요랑 발렌타인 온더록스로 두 잔 주세요. 네. ……제가 사실 말술이거든요.”
“걱정 안 했어요. 너무 말짱해 보이셔서.”
“술이 세면 돈이 많이 들어요.”
“몇 잔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쓸데없이 술값 다 계산하는 머저리도 있어요.”
“아까 취해서 계산하신 거예요?”
“아뇨, 아뇨, 그건 아니에요.”
“다행이네요. ……규찬 씨에게도 어두컴컴한 지하실이 있나요?”
“……저라고 없을까요.”
“그게 지금의 규찬 씨를 만드는 데 일조했고요?”
“그렇죠.”
“지하실을 열면 뭐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