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박수칠 때 떠나라」 ①
“형, 저는요, 다시 태어나면 존나 섹시하게 태어나고 싶어요. 아무 생각 없이 거울을 봤는데 존나 꼴려서 자위하고 싶을 정도로요.”
씨발, 이딴 얘길 듣고 있어야 돼? 나는 딴청을 피우며 생맥주를 마셨다. 엉엉 울며 변태 같은 소리나 지껄이는 야구모자도, 녀석의 술잔을 계속 채워 주는 재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다음 생에는 네가 내 마누라하면 되겠다.” 재혁이 삶은 완두콩 껍질을 까며 말했다.
“남자로 태어날 거예요.” 야구모자가 더 크게 울었다.
“그럼 서방하든가.”
“마누라할 거예요.”
“씨발, 어쩌자는 거야?” 재혁이 완두콩 껍질을 야구모자에게 던지고 알맹이를 입에 넣었다. 야구모자가 더 크게 울었다. “얼씨구. 술집 떠내려가겠네.” 재혁이 면박을 줬다. 테이블 위에 두었던 내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였다.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형들은 말이죠,” 야구모자가 불콰한 얼굴로 운을 뗐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것에 중독된 적 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재혁이 물었다.
나날이 쌓이는 회의감은 N과 심적인 거리를 두게 했지만, 늘 그랬듯 그를 떠날 수는 없었다. 무능력과 무기력이 좀먹은 나의 정신은 마약에까지 속수무책으로 절어가고 있었다. 최대한 자제하려 했지만, 오래 숨을 참고 있는 사람 마냥 끝끝내 무너졌다. N은 그럴 때마다 교묘히 더욱 중독성 강한 약을 건넸다.
“담배 말예요, 담배. 중학생 때, 그러니까 피워본 적도 없는 담밴데, 너무 피우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거예요. 호기심 따위가 아니라 진짜 중독 증세였어요. 시험지를 찢어 가지고 말아서 불붙이고 빨아댔다니까요.”
충동과 절제가 서로를 베는 중독자의 삶. 그러나 충동에 못 이겨 약에 손을 댈 때만이 비로소 한 시기를 끝낸 기분이 들었다. 괴로운 인내만 요구하는 절제는 고통을 늘리기만 할 뿐이었다. 한숨 돌리는 기분, 하나의 시기를 마무리하는 감각. 절제로서는 줄 수 없는 보상들이었기에, 생활은 끝끝내 충동에 패배하는 패턴만을 되풀이했다.
“그게 무슨 중독이야.” 재혁이 빈정거렸다. “다 핑계지.”
나는 남은 맥주를 마저 다 마셨다. 잔 손잡이를 테이블 모서리와 평행을 이루도록 돌려놓았다. N 재끼고 우리 셋 다 독립하자. 만석의 제안이었다. N의 돈을 빼돌려서 셜록과 만석 그리고 나, 셋이서 갈라먹자는 이야기였다. 녀석에게서 독립할 방법은 그것뿐이야.
그냥 손절하면 되지, 걔 돈에 손을 왜 대? 내가 대꾸했다.
너희 생각해서 그러지. 셜록은 N이랑 손절하면 길거리에 나앉아야 돼. 너도 마찬가지잖아. 집도 절도 없는 백수에 약물중독잔데, 당장 필요한 생활비랑 약값, 치료비는 어떻게 감당할래? 멀쩡하게 살고 싶다며. 그럼 돈이 있어야지.
“무슨 생각해?” 재혁이 테이블을 두들기며 나를 봤다. “쟤 뻗었다.”
“그래? 어쩌지?”
“가자, 재미없다.”
우리는 야구모자를 부축해서 술집 밖으로 나섰다. 하루가 다르게 날이 선선해지고 있었지만 여름의 더위가 다 가시지는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늦여름 끝물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안 춥네.” 재혁이 인적 없는 골목 한쪽으로 야구모자를 데리고 가 담장 아래 앉히려 했다. 다른 팔을 부축하던 나도 엉겁결에 그를 놓아버렸다.
“여기 두게?”
“안 얼어 죽어.” 재혁이 야구모자의 모자를 벗겨서 가방에 넣었다. “신경 쓰이면 신고하든가.”
“절도죄로?”
내가 가방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재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 말고, 미친 새끼야.”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막 지난 시간이었다. 우리는 차례로 샤워하고 커피를 한잔 마셨다. 차가운 커피 잔을 쥐고 미니바로 갔다. 와인 한 병의 코르크마개가 열려 있었다. 와인 병을 집어 들었다. 라벨에 호텔명이 새겨진 한정판이었다. 묵직한 병을 제자리에 두고 커피 잔을 비웠다. N은 샤워가운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소파 테이블에 와인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녀석이 목을 뒤로 젖혀 소파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뉴질랜드로 가자.” 그가 천장을 보며 말했다.
“갑자기?”
“응. 싫어?”
“글쎄. 갑작스러워서 그러지.” 나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셜록이랑 만석이도 같이 갈 거야.”
걔들이? 나는 N을 쳐다봤다. “애들하고 얘기해 봤어?”
“얘기가 왜 필요해? 걔들이야 가자고 하면 가지.”
“그래도 이야기는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왜? 새끼들 딴 맘 품어서?”
N은 천장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당황해서 말이 목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녀석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나를 노려봤다.
“니들 이젠 내가 존나 우습지? 뒤통수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와 눈이 마주치자 초점에 힘이 풀렸다. 불현듯 N이 풀썩 웃으며 표정을 풀었다.
“농담이야. 애들하고도 얘기 다 했어. 너만 결정하면 돼.”
나는 벙 찐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만석이 그 새끼, 진짜 뒤통수칠 생각이었어. 정말 괜찮겠어?” 내가 물었다.
“괜찮아. 너랑 셜록만 동조하지 않으면 걘 아무것도 못해. 혼자서 움직이진 않는 녀석이니까.” N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진작 말해주지, 지금까지 뭐했어?”
셜록이 말했구나, 나는 생각했다. “말하려고 했지.”
“괜찮아. 그건 됐고, 어떡할래? 같이 갈래?”
“뉴질랜드에선 뭐할 건데?”
“똑같아. 셜록은 우리 뒤 봐주고, 만석이는 돈 불리고, 우린 여행하고. 너 국내여행 질렸잖아. 외국에서는 더 재미있고 편할 거야. 아니다. 한국인들 만나면 좀 더 스릴 있을지도 모르겠네.”
N은 별일 아니라는 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외국에서도 이렇게 살자고? 이름 없이 떠돌면서 허송세월을 보내자고? 비행기에 타는 순간 나는 끝장이다. 할 줄 아는 영어도 몇 마디 없는데. 무일푼으로 N에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 다시는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N에게서 등을 돌려 창가에 다가섰다. 빌어먹을 야경이 근사하게 나를 엿 먹이고 있었다. 삶의 분기점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라고, 충동적으로 판단했다.
“안 갈래.”
“그래? 국내 좀 더 돌지 뭐.”
“아니.” 젠장할. “여행 그만한다고.”
양손으로 창가를 짚고서 고개를 숙였다. 대답을 기다렸지만 N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간 그러고 있다 마지못해 녀석을 향해 뒤돌아섰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서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갈 건데?” N이 물었다. “F시?”
“어디든.”
“어떻게 살려고?”
“어떻게든.”
“그래.” N이 벌떡 일어나 미니바로 가서 한정판 와인 한 잔을 따랐다. “잘 가. 뭐하고 살지 정말 궁금하다.”
녀석이 다가와 와인 잔을 건넸다. 나는 잔을 받아들어 불빛에 비춰보고서 향을 맡았다. 의식적인 몸짓.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는 N의 시선이 느껴졌다. 라이터 켜는 소리.
“얼른 마셔요, 손님. 갈 길이 먼데.”
N이 소파에 가 앉으며 미소 지었다. 나는 와인 잔을 쥔 손을 허리춤까지 늘어뜨렸다. 이걸로 정말 끝인가? 입술을 말아 넣었다.
“왜? 인터뷰라도 바라는 거야?” N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더니 두 손을 깍지 껴 다리 위에 두었다. “좋아, 그럼. 왜 여행을 그만두시려는 거죠?” 담배를 물고 있어 발음이 뭉개졌다.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의미 없이 세월만 보내는 거 같아서.”
“악, 친구로서 마음 아파 못 듣겠다야.” N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잘 가라.”
“넌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건데?”
“내가 원할 때까지.”
“그래, 넌 그럴 수 있겠지. 난 아니야. 막말로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수 있겠어? 네가 질려서 이 여행 끝내버리면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센데, 불안해서 이러고 못 살아.”
“네가 원하면 평생 이러고 살 수 있어. 너도 알잖아.”
“뭐?”
“모른 척하네? 내가 널 버릴까 무서웠어?”
대답하지 못했다. N이 재떨이에 담배를 끄고 벌떡 일어나서 다가왔다.
“안 버릴까봐 무서웠겠지, 이 씨발새끼야.” N이 코앞에까지 와서 말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이거지? 남들처럼. 그래, 가라고. 누가 잡았냐?”
“왜 이렇게 화를 내?”
“화가 안 나게 생겼냐? 네가, 무슨, 사람다움을 논해?” N이 어절 단위로 말을 끊으며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나는 와인 잔을 놓칠까 봐 얼른 창가에 올려두었다. “나를 돈줄로만 본 게 누군데? 씨발 나는 둘도 없는 친구라 같이 다닌 건데, 넌 빌어먹을 돈줄 끊길까봐 호시탐탐 눈치만 봤지? 돈 다 대주는데도 비싼 데서 안 자고, 옷도 죄다 싼 거만 고르면서 궁상떨고. 다 내 심기 건드릴까 봐 쫄려서 그런 거 아니야?”
“내 돈이 아니니까 그랬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한테 미안해서.”
“아, 예의를 차리셨다? 그런 분이 뒷돈 줘가며 셜록한테 뒷조사 시키고 만석이랑 손잡고 내 뒤통수를 노렸어?”
“그건……”
“알아.” N이 말을 끊었다. “괜찮아. 계속 말했잖아. 덕분에 네가 조금이라도 재미 봤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내가 다 퉁쳐 줬는데 왜 관두겠다는 건데?”
“그게 괜찮다는 사람 태도야?”
“논점 흐리지 마. 뒤통수치려 했다는 걸로 내가 이러는 게 아니잖아. 나한테 미안하다는 네 말과 행동이 안 맞는다고 지적하는 거지.”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맞겠지. 네가 언제 틀린 적 있었어? 그렇게 대단한 애가 왜 이러고 살까? 이 생활이 좋아?”
“맘에 들어. 재밌잖아.”
“딴사람인 척하고 사는 게 재밌어? 남들 속이고 의미 없이 돈 펑펑 써대는 게?”
“의미 찾고 앉아있네. 밖에 나가서 그렇게 지껄여봐.” N이 팔을 뻗어 창문을 가리켰다. “싫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거 같아? 왜 굴러들어온 복을 저세상까지 못 차서 안달이야?”
“난 싫어.”
“등 따시고 배불러서 아주 지랄을 한다.”
“이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이게 사는 거야?”
“바로 그거야.” N이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신나지 않아? 네가 너라서 행복했던 적이 있었어? 뭐, 이제 와서 자기 자신이 막 사랑스러워지기라도 한 거야?”
“비아냥대지 마. 그래, 내가 좋았던 적 없었고 지금도 싫어. 그래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야 등신 같은 나를 극복할 거 아니야.”
“극복? 와씨, 멋져요. 진짜.” N이 과장된 몸짓으로 박수를 쳤다. “선생님, 어떻게 살면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이러곤 안 살 거야.”
“못 사는 거지. 착각하지 마.” N이 빈정거렸다. “정 먹고살 방법이 없으면 네 재능을 잘 살려 봐. 손대는 것마다 족족 실패하는 재능. 공부며 사업, 연애, 인간관계, 심지어는 신나게 노는 데마저도 실패하는 재능. 존나 멋지네, 그거 잘 살려서 돈 벌 궁리 해보세요.” 그가 창가에 놓인 와인 잔을 내 손에 다시 쥐여 주고 소파로 돌아갔다. “그런 길이 있을까 싶지만. 뭘 멍하니 서 있어? 와인을 마시든, 집어던지고 나가든 해야지. 나가면서 마시진 마. 잔은 룸에 둬야하니까.”
“씨발, 그러는 너는 날 친구로 생각한 적 있어?” 나는 창가에 다시 잔을 올려두었다. “돈 가지고 내 멱살 쥐고 흔든 건 너잖아.”
“돈 다 대줬더니 저건 무슨 피해의식일까?” N이 중얼거렸다.
“나한테 약 대준 것도 손쉽게 끌고 다니려던 속셈이었잖아. 아니야?”
“아, 마음 아파.” N이 가슴을 끌어안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약은 지가 빨아놓고 왜 나한테 지랄일까? 친구라고 비싸고 순도 높은 걸로만 구해줬더니.”
“우리 꼴을 봐. 이게 정상적인 친구야?”
“왜?” N이 다시 일어나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너 혹시, 마약하는 걸 말리지 않았다고 이러는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 왜 말려?”
“뭐?”
“감각만이 존재를 증명해.” N이 다가오며 말했다. “인간의 몸은 한계가 아니야. 몸을 갖지 못한 창조주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위대한 발명품이지. 인간이 기계와 인공지능을 만든 것처럼. 자, 그럼 왜 인간은 다섯 가지의 감각을 가졌으면서도 육감까지 이야기할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N의 눈에 광기 같은 빛이 번뜩였다.
“있길 바라니까. 갈망하는 거야. 다섯 가지 감각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왜 그렇게들 감각에 환장할까? 감각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니까. 인간관계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인간을 보호하기도 하거든.”
“요점이 뭐야?”
“네가 이 여행에 질린 건, 씨발 무슨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거지. 지속적인 감각에 질린 것뿐이야. 매순간 감각을 벼렸던 나와 달리 게을렀던 네 탓인데 누굴 추궁하겠어? 오염된 오감에 새로운 자극을 끼얹어야지.”
“그게 마약이다?”
N이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래. 환각. 망각. 흥분. 감각의 교란과 초월. 어때? 기분이 어땠어?”
“너, 이 미친 새끼.”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약 때문에 하루하루 죽어가는 기분이다, 씨발새끼야.”
“아, 그런 거 말고. 더 구체적으로 말해줘야지.” N이 떼쓰듯 안달했다. “어때? 황홀했어? 막 없는 게 보이고, 감각이 확장되고 그래?”
조롱에 북받쳐 그의 멱살을 잡으려던 순간 N의 주먹이 먼저 내 얼굴에 내리꽂혔다. 막을 새도 없이 배도 걷어차이고 나동그라졌다. 숨이 막혔다. N은 옆구리를 한 번 더 힘껏 걷어찬 뒤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어때? 맞으니까 정신이 팍 들지? 몸은 위대하다니까.”
숨이 막혀서 대답할 수 없었다.
“네가 저 야경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아? 그럼 진작 갔겠지. 저 사회는 네가 느끼는 감각들과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잔잔하고 별 볼일 없는 일상, 그 똑같은 패턴의 자극이 너한테 무슨 기쁨을 줄 수 있는데? 고작해야 화만 돋우고 신경질 나는 자극뿐이겠지. 그들은 이미 서로 공통된 감각으로 공동체를 꾸리고 살아. 근데 네가 거기서 자리를 잡겠다고? 어색함과 소외감을 견디는 데 시간을 들여가면서? 우리 삶에는 즐거운 자극 천지잖아. 왜 이런 생활을 버리겠다는 거야?”
“즐거운 자극? 그래봤자 섹스와 마약뿐이잖아.”
“몸의 자극 말고, 마음에 자극을 주는 거. 잊었어? 마음의 피부.” N이 반발자국 다가왔다. “타인의 삶을 그려내고, 몰입하고, 연기하는 즐거움. 남들이 눈치 챌까 긴장하는 스릴. 그뿐이야? 초면의 여자한테 설레고, 또래들한테 부러움 사고, 형들한테 귀여움 받고, 부자들과 친구하는 그 모든 생활을 잊어버린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극의 선악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어. 자극의 척도는 강약이지 옳고 그름, 선과 악 따위가 아니라고.”
“이렇게 살다간 더 큰 자극만 바랄 뿐이야. 결국 우릴 망칠 거라고.”
“수도사 납셨네.” N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말했잖아. 자극에는 선악이 없다니까. 우릴 망칠 의지조차 가질 수 없어.”
“결국 우리의 욕구가 우릴 망치겠지.”
“욕구?”
“너도 약을 원하잖아. 감각의 교란, 초월. 실은 네가 느끼고 싶은 거 아니야?”
N이 씩 웃으며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래. 내 욕구가 날 망칠 수 있겠지. 그러지 않도록 네가 곁에서 잘 지켜줘.”
“내가 왜?”
“친구잖아.” N이 내 어깨를 짚었다.
“너는 마약에 손대지 않게 지켜 달라? 장난하냐?”
“아니. 내가 약을 안 하는 건,”
그때 방 한쪽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N이 김샜다는 듯 눈을 치켜뜨더니 휴대폰을 찾으러 갔다. 그는 소파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문 아래 벽에 기대었다. 삭신이 쑤셨다. 죽일까. N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한 살의가 솟구쳤다. 죽여 버릴까. 그럼 다 끝날까.
“씨발, 알았어. 일단 끊자.” N이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고 나를 보았다. “옷 갈아입어. 비상이야, 지금.”
“왜? 무슨 일인데?”
N이 침대 곁으로 가 샤워가운을 벗고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그러더니 생각이 바뀐 듯 나를 불렀다.
“아니다. 너는 여기서 쉬어. 쉬다가 내일 내가 연락하면 와.”
“심각한 일이야?”
“별일 아닐 수도 있겠어. 걱정하지 말고, 아까 하던 이야기는 내일 마저 하자.”
서둘러 짐을 챙기는 N을 보자 불안감이 들었다.
“여긴 안전한 거야?”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N이 불쑥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고, 나는 그 표정들을 하나하나 읽어내지 못하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이내 N이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날 그렇게 못 믿냐? 간다, 연락할게.”
왠지 모를 미안함이 속에서 몸부림을 쳤다. 아니, 미안함만은 아니었다. 나가려는 N을 보자 조바심이 목을 졸랐다.
“야.” 내가 말했다.
씨발. 하지 마. 빌어먹을. 개좆같은.
N이 나가려다 뒤돌아봤다.
하지 말라고.
“왜?” N이 물었다.
“나, 약 좀…….”
씨발새끼, 등신새끼.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N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줬잖아.” N이 말했다. 고개를 번쩍 들자 그가 와인을 가리켰다. “필요하면 더 마시든가. 너무 많이 하진 말고.”
“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입에서 탄식 섞인 한숨이 가스처럼 새어 나왔다.
방을 나서던 N이 다시 뒤돌아보았다. “난 말렸다. 나중에 딴소리하기만 해 봐.” 그가 씩 웃더니 룸을 나섰다. 조금 전까지 나를 사로잡았던 살의가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소파에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약을 탄 와인을 마시지도 않고, 그저 허리를 곧추세운 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어느 순간 전화가 왔다. 뽀리였다.
“형님, 주무셨어요?” 뽀리가 활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밖인지 주변이 소란했다.
“아니. 무슨 일이야?”
“N 형님이 내일 오전에 형님 모시러 가라 해가지고요. 열 시쯤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N은 어디래? 어디로 오래?”
“모르겠어요. 내일 알려주신댔어요. 그럼 내일 호텔에서 뵐게요.”
“어디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있어요. 내일 운전은 무리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아침에 봬요.”
나는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허전했다. 와인을 잔에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뽀리를 부러워하는 건가. 타인을 보듯 나를 관찰하며 자조하려 했지만, 그것마저 할 기분이 아니었다. 휴대폰을 다시 켰다. 부재중 전화 알림이 떠 있었다. 시각을 확인해 보니 야구모자와의 술자리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시계를 봤다. 새벽 두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누구의 목소리든 듣고 싶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다가 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낯선 목소리.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저녁에 그쪽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어서요. 실례지만 누구시죠?”
“제가요? 저녁에요?” 상대방은 생판 모르는 눈치였다.
“네. 시간이, 아홉 시 좀 지나서였네요.”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한마디 했다. 나는 곧장 전화를 끊어 버리고 와인을 병째 마시다 쓰러졌다.
친구가 전화했나 보네요. 아까 폰을 빌려갔었거든요.
해머로 가슴을 얻어맞는 듯한 통증에 눈을 번쩍 떴다. 소파와 탁자 사이 좁은 공간에 쓰러져 있었다. 일어나다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박았지만 아프지 않았다. 가슴의 통증도 사라졌다. 비틀거리며 룸을 나섰다. 몇 시쯤일까. 해가 뜨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벽이 물렁물렁해 보였고 그대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아 두려웠다. 벽을 만졌다. 차갑고 딱딱한 촉감과는 반대로 벽에 물결 같은 파장이 일었다. 눈을 힘주어 감았다 뜨자 정상으로 돌아왔다. 로비에 들어섰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요하고 정돈된 공간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드라마 세트장에 견학 온 아이처럼 로비를 한 바퀴 돈 뒤 음료 자판기 옆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동전을 여러 개 넣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머리가 기억하는 번호가 아니라 손가락이 기억하는 번호. 야심한 밤. 자고 있겠지. 전화기 윗부분에 손을 얹고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여보세요?” 목소리는 멀쩡했다. 또렷한 정신.
나는 수화기를 내리치듯 전화를 끊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공중전화 부스 유리창으로 밖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숨을 길게 내뱉으며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났다. 같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상대방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잠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다가 다시 끊을까 했다.
“살아있었네.” 포니테일이 말했다.
“응.”
“무슨 일 있어? 휴대폰이 아닌데.”
“공중전화야. 폰을 잃어버려서.”
“거짓말도 성의껏 좀 하지.”
“내가 원래 그렇잖아.”
우리는 잠시 말없이 있었다. 공중전화 요금이 떨어지고 있었고 나는 동전을 더 넣었다.
“미안해.” 내가 말했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뭐하면서 지내?”
목소리가 차가웠고, 별 관심 없이 물어보는 것 같았다. 혹은 그렇게 들리도록 말하는 걸지도.
“그냥.” 내가 대답했다. “그냥 살고 있지.”
“왜 전화했어?”
아닌가. 포니테일이 아니었나. 나는 정말 몰랐나.
“새벽이잖아.”
“감성 터져서?”
“그래.” 나는 힘없이 웃었다. “자꾸 생각나서. 미안한 게.”
“괜찮아? 목소리가 안 좋은데.”
“좀 아파. 원래 정상이 아니잖아, 내가.”
“아직도 그렇게 살아?”
“더하게 살지.” 나는 부스 벽에 기대 낮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근데 이제 제대로 살려고. 내일 다 끝낼 거야. 더 이상 도망 안 쳐. 내 손으로 끝낼 거야.”
포니테일은 잠시간 말이 없다가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어왔다.
“응.”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 제대로 살 수 있겠지?”
“글쎄. 난 모르지.”
“그래.”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응?”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었잖아. 난 오빠를 몰라. 난 정말 괜찮으니까 미안해하지도 말고, 연락하지도 마. 난 그때 그 시간들, 없는 셈 치고 살기로 했으니까.”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네.”
“나 다시 전학 가, 서울로.”
“그래.”
“안 놀라네?”
“놀랄 게 뭐 있나. 넌 우리랑, 이 동네랑 안 어울렸어.”
“그런가. 종종 놀러오면 연락할게.”
“하지 마.”
“응?”
“연락하지 마. 다신 보지 말자, 우리. 그래야 해.”
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룸으로 올라가 남은 와인을 몽땅 마시고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