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박수칠 때 떠나라」 ②
N이 말한 대로 호텔은 안전했다. 다음날 오전 열 시 뽀리가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고 연락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로비 자판기에서 음료수 두 캔을 뽑아 뽀리에게 하나 건넸다. 뽀리는 최근에 오토바이를 바꿨다며, 나중에 튜닝해서 보여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벽에 걸린 공중전화를 쳐다보며 마지막 남은 음료수 한 모금을 마셨다. 빈 캔을 구겨 분리수거함에 던져 넣었다.
날씨가 몹시 화창했다. 차에 타려던 나는 속이 안 좋아서 잠시 머뭇거렸다.
“괜찮으세요?” 뽀리가 걱정하듯 물었다. “금고로 오라시던데요.”
나는 괜찮다며 조수석에 탔다. 전날의 숙취와 약기운으로 몸이 가라앉았다. 일 터진 게 만석이 쪽이라면 자금 문제일까.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뽀리의 편안한 운전 덕에 차 안에서 푹 쉬었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불현듯 큰일이 났다는 직감이 가슴에 뻐근한 통증을 남겼다. 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깼다. 만석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젖은 이마를 닦았다.
“일어나셨네요? 푹 주무시지.”
“괜찮아. 어디쯤이야?”
“한 십오 분 더 가면 돼요. 괜찮아요? 안색이 영 안 좋으신데.”
“괜찮다니까. N한테 따로 들은 얘기 없어?”
“형님들이 저한테 뭐 말해주시는 게 있나요.” 뽀리가 헤헤거리며 웃었다. “근데 형님들은 다들 무리하는 체질이신가 봐요.”
“무리?”
“우리 사장님이나 형님이나, 몸도 안 좋으신데 계속 무리하는 거 같아서요.”
“나는 놀고 다니는데 뭘. 걔 어디 아파?”
“모르세요? 우리 큰형님, 아니, 사장님 옆구리에 칼 맞으셨잖아요.”
“칼? 왜?”
“못 들으셨구나. 저도 이유는 잘 몰라요.” 그는 부드럽게 커브길을 돌면서 말했다. “일주일 전인가, 퇴근길에 어떤 썅년이 사장님 옆구리에 칼침 놨어요. 나이도 어린 게.”
“어려?”
“고삐리? 중삐리? 하여간 십대밖에 안 돼 보이던데.”
나는 좌석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드러누웠다. “걔도 꼴이 말이 아니겠다. 어린애한테 칼이나 맞고.”
“숨어 있다가 냅다 쑤시는데 장사 있나요.”
“많이 다쳤냐?”
“제가 보기엔? 그래도 일은 다 하세요.”
“여자앤 왜 그랬대?”
“뭐라더라? 너 때문에 엄마가 더 힘들어졌다나? 지랄 똥을 싸는 거죠.” 뽀리가 톨게이트에 차를 세워 요금을 정산하고 다시 출발했다. “채무자 딸인가 본데, 그러게 누가 우리한테 돈을 빌리랍니까? 칼침 놓은 것도 모자라서 미친년이 옥상에서 화분을 두 개나 떨어뜨려가지고 사장님 차를 개작살을 냈다니까요.”
국도를 따라 조금 달리다 바로 앞 신호등에 섰다. 뽀리가 내 쪽으로 몸을 살짝 돌려 말했다.
“형님, 이 일을 해 보니까 말예요, 세상은요 나쁜 놈들 천지예요. 하나같이 다 못된 새끼들이야.”
“그래.”
“어릴 때는요, 사채업하는 인간들은 다 쓰레긴 줄 알았거든요. 건달들도 그렇고.”
“맞잖아. 신호 바뀌었어.”
“맞죠.” 뽀리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근데 돈 빌리는 놈들도 있죠, 제때 갚으러 오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요. 뭐 ‘채무자들이 돈 갚으려는데 사채업자가 잠수타고는 나중에 이자 붙여서 온다’ 그런 말들 있잖아요? 그런 놈들도 있긴 하죠. 없다는 게 아니야. 근데 우리 사장님은 안 그러거든요? 되레 채무자 놈들이 다 기간 늘려달라거나 잠수 타거나, 이 지랄들 떤다니까요? 이자야 높으니까 그렇다 쳐도, 새끼들이 원금도 안 가져와. 가져올 생각 자체를 안 해. 남의 돈 빌려놓고 안 갚는 게 천하의 썅놈들이죠. 우리 큰형님이 사람 좋아 다행이지, 다른 사채건달들이었으면 그런 채무자들 몸뚱어리는 벌써 세계 곳곳에 흩뿌려졌어요.”
창밖에 거대한 축사가 보였다. 금고가 있는 산 아래 근방이었다.
“너 양아치 다 됐다?”
“아, 형님 진짜.” 뽀리가 투덜거리며 갓길에 차를 세웠다. “내리세요.”
“뭘 내려. 삐졌어?”
“삐지긴 뭘 삐져요. 저도 빨리 돌아가야 해요. 톨게이트 지나자마자 내려드렸어야 하는 건데 더 온 거라고요.”
“그래? 친절했네.”
“양아치 아니라니까요.” 뽀리가 문의 잠금장치를 열며 헤헤거렸다. “나중에 연락 한번 주세요, 술이라도 한잔해요.”
나는 웃으며 알겠다고 한 뒤 차에서 내렸다. 뽀리는 유턴을 위해 일 차로로 차를 몰았다. 길을 따라 몇 걸음 걷는 동안 웃음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셜록이 칼을 맞았다고. 전날 전화를 받던 N의 심각한 얼굴을 떠올렸다. 휴대폰으로 지도를 한번 확인했다. 셜록이 알려준 지름길로 걸음을 서둘렀다. 무슨 일이 생기든 오늘부로 여행을 끝내야만 했다.
수풀을 가로질러 산중턱 도로로 올라갔다. 금고 앞에 못 보던 차가 서 있었다. 건물로 들어서니 웬일인지 철판이 밀려 열려 있었고 지하실 문도 열려 있었다. 아래에서 음식 볶는 냄새가 올라왔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로 들어서며 문을 닫으려 했다.
“열어둬.” N이 요리를 하며 말했다. 목소리가 밝았다. “만석이 금방 올 거야.”
나는 다시 문을 밀어 활짝 열어두었다. “뭐하는 거야? 불고기?”
“응. 좀 있으면 샴페인도 올 거야. 네가 좋아하는 위스키도 사오라고 했어.”
일이 잘 풀렸는지 N의 표정이 밝았다. 나는 얇은 겉옷을 벗어 소파 팔걸이에 걸쳐 놓았다.
“야, 어제 하던 이야기 있잖아,”
“이따가.”
N이 가스레인지 불을 줄이고 로그오프된 컴퓨터를 켜 노래를 틀었다. 볼륨 짱짱한 헤비메탈 음악이 터져 나왔다.
“동네 떠나가겠다.”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근처에 동네도 없잖아.” N이 맥주를 건네며 웃었다.
그는 간밤의 일을 모두 잊은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맥주를 건네받아 책상 위에 두었다. N에게 어제 큰일이 터진 거 아니었냐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내 어깨를 토닥였다. “이따가 말해줄게.”
잠시 후 만석이 기타 리프 치는 흉내를 내며 계단을 흥겹게 내려왔다. N이 문 앞으로 가서 그를 반기고 막걸리와 샴페인, 위스키가 든 봉지를 건네받으며 만석을 안으로 들였다. 나는 음악을 껐다.
“당장 팔 만한 주식들은 매도해서 전부 해외계좌로 돌렸어. 이제 다 같이 뉴질랜드로 뜨면 돼.”
만석이 외투를 행어에 걸며 말했다. 뒤통수를 치겠다더니 뻔뻔하게 동행을 이야기하는 만석이나 기어이 해외로 뜨겠다는 N이나 기가 차기는 마찬가지였다. N을 쳐다보자 진정하라 손짓하며 차차 설명해 주겠다고 했다. 음식 냄새에 프라이팬 앞으로 홀리듯 간 만석은 신나 보였다.
“만석아, 불 좀 봐주라. 차에서 지갑 가져올게.” N이 말했다.
“네 지갑 내 차에 있잖아.” 만석이 허리를 숙여 불을 확인했다.
“그래? 차키 어디 있어?”
“옷 주머니.” 만석이 프라이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행어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컴퓨터 앞으로 갔다. 스피커에서 헤비메탈이 쏟아졌다.
만석의 옷에서 차키를 꺼낸 N이 내게 담배 피우자는 제스처를 보였다. 나는 방을 나서서 계단을 올랐다. N이 뒤따라 나오며 문을 닫았다. 음악소리가 지워지자 산골의 고요함이 감돌았다. 찰칵, 하는 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뭐야?”
나는 계단을 다시 내려가며 휴대폰 플래시라이트를 켰다. N이 커다란 액자를 문손잡이 아래에 끼우고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튼튼해 보이는 액자는 문손잡이와 계단 사이에 사선으로 꽉 물렸다. 나는 문손잡이를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안쪽에 있어야 할 잠금장치가 바깥쪽에 있었다.
“뭐하는 거야?” 내가 멍하니 물었다. “문손잡이가 왜 바뀌어 있어?”
“빨리 올라가.”
“만석이는?”
N이 위쪽으로 나를 거칠게 떠밀었다. 엉거주춤하게 지상에 올라서자 N이 잽싼 몸짓으로 철판을 당겨 통로를 덮었다. 못 보던 걸고리가 철판과 바닥에 달려 있었다. N은 걸고리를 채운 뒤 한쪽 구석에 쌓인 폐자재 더미에서 쇠사슬과 아기 머리통만 한 자물쇠 두 개를 가져왔다. 걸고리에다 자물쇠를 채우고 쇠사슬로 그것을 싸맸다. 나는 쇠사슬 뭉치에 자물쇠를 하나 더 채우려는 N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하는 짓이야?” 내가 소리쳤다.
N이 손을 뿌리치고 자물쇠를 채운 뒤 일어나 열쇠를 지갑에 넣었다.
“잘 들어.” N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경찰이 붙었어.”
“뭐?”
“메시아 사건 수사가 재개됐어. 경찰, 검찰, 금감원까지 다 만석일 쫓고 있다고. 이번에 꼬리 밟히면 우리 돈 불리겠다고 벌였던 주식 리딩방 운영에 찌라시 유포, 우린 알아듣지도 못할 온갖 주식 사기까지 다 들통나.”
“만석이 새끼, 손 털었다더니.” 바닥에 굴러다니던 나무토막을 걷어찼다. “너도 가담했어?”
“남 걱정할 때가 아니야. 너도 가담했어.”
“내가?”
“그럼 쟤가 내 계좌만 관리했겠어?” N이 내 어깨를 잡으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잘 들어. 우린 만석이한테 계좌를 털린 거야. 메시아 사건 직후 잠적했던 만석이는 세상이 좀 잠잠해진 틈을 타서 중학교 동창들한테 접근했어. 우리는 간만에 만난 친구랑 한잔하다가 휴대폰을 해킹 당했고, 신상이고 계좌고 다 털려서 차명계좌로 이용당한 거야.”
“말이 돼? 그 돈 누가 다 썼는데? 우리 흔적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야.”
“말 안 되지. 상관없어. 말할 필요 없을 테니까.”
N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만석의 휴대폰였다.
“그걸 왜 네가 들고 있어?”
N은 나를 호전적으로 응시하며 만석의 휴대폰을 다시 넣고 자신의 휴대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네, 사장님. 잘 지내셨죠. 다름이 아니라, 전에 말씀드렸던 농가 있잖아요. 예예, 산골짜기에 있는. 거기 지하에 시멘트 좀 부어 주셔야할 거 같아요. 네. 이유가 뭐 있나요. 안 쓰니까 그러지.”
“너 미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N이 배를 힘껏 걷어찼다. 숨이 막혔다.
“산 너머에 작은 학교가 있다더니, 학생들이 여기까지 문 따고 와서 노나 보더라고요. 애들이 아지트 삼으면 피곤해지잖아요.”
“야……”
N이 다시 걷어찼고 나는 나동그라졌다. 그는 모로 쓰러진 나를 발로 밀어 똑바로 뉘인 뒤 배를 지그시 밟았다.
“일주일이요? 더 빨리는 안 될까요? 아…… 알겠어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N이 전화를 끊었다.
“미친놈아. 뭐하는 짓이야.” 내가 말했다.
“일 분 뒤면 전기, 가스, 통신까지 모두 끊어질 거야.” N이 발을 치우고 건물을 둘러봤다. “문 따도 소용없어. 철판 뚫리도록 주먹질해 보라지. 동네도 없고 오가는 사람도 없는데.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어.”
“살인이야.”
“가둔 거뿐이야.”
“꺼낼 생각도 없잖아.”
“상황 파악이 안 돼? 차분하게 말하니까 별일 아닌 거 같지?” N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텅 빈 눈으로. “지금 만석이 새끼 안 잘라내면 우리 다 사망선고야. 사람 죽이려는 게 아니라 살리려는 거라고.”
나는 몸을 일으켜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앉았다.
“다른 방법, 분명히 있어. 셜록한테 만석이 신분 세탁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뉴질랜드로 보내자. 어때?”
“이 새끼가 진짜.” N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만석이한테 당할 뻔했던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저 새끼, 벌어들인 돈 죄다 공중분해 시켜서 메시아 팀원들 모조리 물 먹인 놈이야. 이젠 내 돈도 갈가리 찢어서 휴지조각으로 만들려던 거, 너도 알고 있었잖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몰랐다고 하지 마. 언제까지 씨발, 멍청이 흉내 낼래? 삼등분이니 나발이니 애초부터 넌 믿지도 않았잖아. 살 의욕이 없어?” N이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셜록은 어떻게 살라고. 응? 셜록한테 달린 입이 몇인 줄은 알아?”
그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아끼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담배를 꺼내 내 입에 물렸다.
“만석이 새끼 놔두면 네가 자꾸 흔들려. 리스크가 크다고.” N이 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넌 그냥 내가 하는 일들 지켜보기만 하면 돼.”
왜 굳이 날 여기로 불렀을까. 담배를 깊이 빨며, 우습게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 후면 만석은 지하에서 꼼짝없이 죽는다, 그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N을 나무랐던 것은 의식적인 행동이었을 뿐 나는 전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N이 손을 내밀었다. 녀석은 왜 굳이 나를 여기로 불렀을까. 나 없이도 처리할 수 있는 일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술 있냐?” 내가 물었다.
“있지.”
“운전 좀 해.” 나는 흙먼지로 뒤덮인 옷을 털었다. “한잔해야겠어.”
“그럼요. 편히 모셔야지.”
나는 건물 밖으로 나가다가 N의 어깨를 세게 밀었다. “그리고 씨발, 자꾸 패라?”
“아이, 미안해.” 녀석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실실 웃었다.
우리는 금고를 나섰다. 담벼락 아래 차 한 대가 더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먼저 세워져 있던 차에 탔다. 글러브박스에 힙 플라스크가 들어 있었다. 위스키를 몇 모금 마시자 몸이 뜨거워졌다.
“만석이 차는 어떡해?” 내가 물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호텔에서 푹 쉬자. 당분간 여행도 보류하고.”
N이 시동을 걸었다. 굽이진 산길을 내려가는 동안 전날 밤에 금고로 오면서 일을 꾸몄을 N을 생각했다. 만석을 내보냈겠지. 휴가를 줬거나 혼자 조용히 있고 싶으니 나가 놀라고 했을 것이다. 만석이 나간 뒤 준비해온 쇠사슬과 자물쇠를 폐자재 사이에 던져놓고, 지하실 문고리를 바꿔 끼우고, 지하실 문을 열고서 문과 벽 사이에 커다란 액자를 두고, 냉장고의 음식과 옷가지, 연락망 등 탈출과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없애버렸을 것이다. 셜록이 가담했을까? 다쳤으면서도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이거였을까……. 전날 N이 호텔에서 비상이라며 옷을 갈아입다 말고 나더러는 쉬라고 번복했던 게 떠올랐다. 모든 행보가 그 한순간에 정해졌을까. 점점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입체적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만석은 죽는다. 고개가 뻣뻣해졌다. 가빠진 호흡을 들키지 않으려 조용히 숨 쉬었다. 공포에 머리가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술을 더 마셨다.
조수석에서 앉은 내내 잠을 잤다.
호텔에 도착해 술을 마시고 약을 빨았다.
미친 듯. 며칠 동안.
시간이 산산이 부서지고 모였다가 흩어지고.
모르는 사람이 침대에 함께 누워 있기도.
뇌가 주먹으로 내리친 청포묵처럼 으깨지는 기분. 그 장면을 감은 눈으로 슬로모션처럼 본다.
이럼 안 돼. 기억해내.
“뭘 기억해?”
“내가 말했어?”
섹스 중. 이 사람은 누구지?
“좋아, 자기야.”
뜨거운 숨. 뜨거운 몸. 젠장.
시간이 또 흐르고. 저녁 어스름의 호수 풍경. 머릿속에 빙빙 도는 풍경.
차가운 발목.
정신 차려. 기억해내.
지갑. N의 지갑.
몸을 일으킨다. 침대. 호두알처럼 흔들리는 뇌. 주변을 둘러본다. 침실. 나뿐. 응접실로.
“해승 씨, 일어났네?”
해승? 처음 보는 인간이 욕실에서 나오며 알은체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옷. 저 새낀 뭐했길래 옷을 입고서 다 젖어있지?
“해승 씨.” 검댕이 음흉한 눈짓으로 소파를 가리킨다. 소파에 누워있는 N. 정확히는 뻗어있는. 직감.
“저 새끼 약 했어요?”
“왜 모른 척이셔? 해승 씨가 시켰잖아요.”
“내가?”
“응. 술에 약 타달라며. 아무것도 모르고 잘만 마시던데.” 끽끽. 검댕이 끽끽거리며 웃는다. 끽끽.
“나가요.” 나는 N에게 다가선다.
“네?”
“나가라고.” 소파 테이블에 흩어진 지폐들을 끌어 모아. 검댕에게 건네고. “못 알아들어요?”
약에 취해 풀린 눈으로 그를 쏘아본다. 지폐를 받은 검댕, 잰걸음으로 방을 나선다. 문 닫히는 소리. N을 내려다본다. 개새끼. “개씨발새끼.” N이 또 날 속일 작정이라면. 혹은 아니라면.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힘껏 그의 뺨을 후려친다. 고개가 반대쪽으로 꺾이더니 미동도 없다. 다시 한번 힘껏 후려친다. 헛방. 제대로. 여전하다. 또 한 번, 또 한 번. 그는 일어나지 않는다. N의 목을 손가락으로 힘주어 누른다. 분명한 맥박. 식은땀. 비틀거리며 침실로. 고무밴드와 주사기를 챙겨 다시 N에게로. “개새끼.” 개씨발새끼. 놈의 뒤통수를 잡고. 입을 쩍 벌려 녀석의 머리통을 깨물고. 으흐흐흐. 씨발새끼. N의 팔뚝을 동여매고. 숟가락. 생수에 헤로인, 라이터. 주사기에 채우고. 손이 떨린다. 집주. 씨발. 집중. 푸른 정맥. 찰싹찰싹. 울뚝불뚝. 이게 뭐더라? 헤로인? 코카인? 필로폰모르핀마리화나마리아아메바,
택시! 잡아타고. 행복한 주문을 아세요? 닥쳐. 비상구를 없애요. 열쇠 두 개를 만지작거리며 손 안에서 계속 놀리면서.
금고에 도착하면 택시를 보내야 해. 죽어가는 만석일 보일 수는 없지. 난 자랑이 못 되었으니까. 씨발, 닥치라고. 가방. 가방에 뭘 넣었지. 빵. 음료수. 물. 기절.
미터기를 보았다. 세상에나. 값을 더 얹어 치르고 택시에서 내렸다. 찬바람이 불고. 가방을 끌어안고 금고를 향해 달렸다. 지름길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도로로 뛰었다. 뛰다 넘어지고, 뛰다 넘어지고. 도로에 엎어진 채 숨을 몰아쉬다 다시 뛰었다.
시멘트 길. 가로등 불빛 두 점. 농가. 농가를 가장한 금고, 빌어먹을 금고. 겨우 겨우 금고에 다다랐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담벼락에 기대어 한숨 돌린 뒤 건물로 들어갔다. 휴대폰 플래시라이트를 켰다. 자물쇠를 열고 쇠사슬을 풀고, 두 번째 자물쇠까지 여는 동안 왠지 모르게 감정이 싸늘히 식어갔다. 감정의 격함도 없는데 눈물이 흘렀다. 철판을 밀고 뛰어 내려갔다. 잠긴 문고리도 끼워놓은 액자도 그대로였다. 액자를 힘주어 빼내고 문고리를 쥐었다. 찰칵, 잠금장치를 풀고 마른침을 삼켰다.
어둠만큼이나 빽빽한 적막. 플래시라이트로 천천히 방 안을 살폈다. 몇 걸음이나 들어왔을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을 향해 몸을 틀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나는 깜짝 놀라 홱 뒤돌았다. 플래시라이트로 목소리의 당사자를 비추기도 전에 갑자기 눈에 강한 빛이 쏘였고 동시에 주먹이 턱에 날아와 꽂혔다. 책상에 옆구리를 박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발길질이 이어졌다.
N의 목소리. 분명 N의 목소리였다.
주먹은 그의 것이 아닌 듯하지만. 두 명? 세 명? 토가 쏠렸다. 무참히 짓밟힌 채 짐과 휴대폰을 뺏겼다.
안 돼.
나가는 발소리.
“안 돼.”
찰칵.
숨을 컥컥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문을 두들겼다. 끝장이다. 족쇄 같은 어둠뿐이다. 숨을 고르고 소리를 질러댈 수 있었을 땐 이미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절규와 발악.
정신을 잃었던 건지, 지쳐 잠들었던 건지. 약간의 빛도 들지 않는 지하실. 가까운 벽에 기대어 앉았다. 눈을 떠도 깊이와 폭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만이 존재했다. 만석의 이름을 불렀다. 연거푸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손발이 저려왔다. N을 안다. 잘 알고 있다. 그의 행적이나 행보는 모르더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그가 만든 밀실이라면 절대 빠져나갈 길이 없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허기와 갈증, 추위. 수도 없이 잠들었다 깨고, 정신을 잃고. 사지는 마비된 듯 말을 듣지 않고. 벌레들이 날카로운 다리와 이빨로 살갗을 파고드는 듯하다. 정말 벌레는 아니겠지? 그런 생각에 울고 웃고. 어둠속에서 망상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가지 않고. 몇 시간이 지났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방도가 없다. 어디선가 나기 시작하는 악취. 미미하게, 그러나 꾸준히, 더 역해지고. 더 진해지며. 시간이 갈수록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음악도 들려온다. 음악소리,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을 섞은 듯한, 이상한 악기들의 조합이 내는 소리 역시 악취처럼 미미하게 시작해 점차 증폭한다. 음악이 아니야. 불협화음. 끔찍한. 코와 귀를 찢어대는 악취와 소음이 정신을 망가뜨린다. 살려줘. 꺼내줘. 방 안을 기고. 울며불며 문을 두들기고. 헛소리를 해대고. 주먹이 터지도록, 발목이 꺾이도록 문손잡이를 내리치고. 입에서 터져나가는 절규는 귀에조차 닿지 않고 괴상한 소음에 묻혀버린다. 악취에 거듭하는 토악질. 방 안을 헤집고 기는 손에 닿는 비닐봉투. 안을 더듬고. 술. 술병. 위스키. 샴페인. 터무니없이 가볍다. 빈 게 분명한 술병을 따 입에 털고.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술 담고 있지 않는 술병이여. 저주 있을지어다. 만석아. 한번 맡고 듣기 시작한 악취와 소음은 잠시도 끊이지 않고. 통증만이 유일한 현실.
바닥에 쓰러진 채 눈물과 콧물과 침이 흐르는 대로 둔다.
끝이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눈을 뜨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죽음이라는 틈에 영영 갇혔다는 기분도.
그럴 때면 뺨을 때린다. 혀를 씹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뚫을 듯이 눌러댄다. 그러면 살아있음을 느끼고. 절망과 환희가 섞인 허탈감이 울음으로 터진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쓰러진 몸의 모든 구멍들로 온 존재가 흘러나가는 기분. 어둠 속으로 무한히 멀어지는 천장을 보고 웃으며 나를 조롱한다. 알고 있다. 음악과 악취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음악과 악취 중 무엇을 먼저 알아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들리거나 맡아지기 시작했을 때 진원지를 찾아 헤맸다. 옷장, 옷장이었다. 마침내 옷장 문에 얼굴을 박아댔을 때, 거기서 모든 것이 흘러나옴을 알게 됐다.
흐흐흐. 그 순간을 떠올리며 웃는다. 흐흐흐흐. 웃음도 악취나 소음처럼 끊길 줄 모르고 질질 샌다. 멍청한 짓. 나약한 정신. 끝내 옷장을 열어 보지 못한 등신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