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44화

3부 「피부인간」

by 윤아무개

산장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신발을 신은 채로 통로를 지나 열려 있는 왼쪽 방으로 들어갔다. N이 낡은 가죽소파에 앉아 커피에 도넛을 먹고 있었다.

“왔네? 좀 먹을래?”

그가 도넛 상자를 집어 들었다.

“괜찮아. 밖에 뭐야? 배팅장이야?”

“응. 피칭머신 샀어. 야구공으로 절벽을 때려서 무너뜨리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아?”

“미친놈.”

N이 씩 웃으며 티슈를 뽑아 손을 닦고 방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퇴원할 때 데리러가려 했는데 왜 연락 안 했어?”

“셜록 연락은 받지도 않는다며.”

“그 새끼야 일 때문에 연락하는 거지. 너랑 같아?”

나는 N을 지나쳐 그가 앉아 있던 소파에 앉았다. “쉬고 있던 거야?”

“네가 안정을 취하는 동안 나도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지.”

나는 맞은편 구석에 새로 장만한 듯한 일인용 소파와 바 테이블을 쳐다봤다. N이 일인용 소파에 가 앉았다.

“좋은 소파 놔두고 왜 여기 앉아 있었어?” 내가 물었다.

“몸이 퍼지면 생각이 둔해지니까.”

“무슨 생각을 하셨길래?”

“다음 여행계획.” N이 능청을 떨었다. “남은 주식도 전부 매각했어. 수중에 있는 돈만으로도 지금처럼 먹고사는 덴 지장 없을 거야. 런던이나 피렌체 갈래? 가고 싶어 했잖아. 아닌가. 단풍축제는 보고 갈까?”

N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안해?”

“뭐가?”

“말이 많길래.”

“아.” N도 나를 빤히 응시하더니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눈썹을 문질렀다. 그가 미소를 머금고서 다리를 꼬았다. “분위기 살벌하네. 대치 중인 건가?”

“어쩌면.”

“한잔할래?”

“아니.”

“웬일로.”

“네 후배들 말이야, 출세했더라?”

“그래?” 그는 꼬았던 다리를 풀며 놀라워했다.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놀란 게 아니라 후배들의 출세에 놀란 표정이었다. “자식들, 일 잘했나 보네. 사업체 분리했대? 아님 정규직 전환?”

“특채. 정규직 전환.”

“역시. 잘들 해낼 줄 알았어.” N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 보였다.

“나는 못 해낼 것 같았냐?”

“당연히 못 해내지.” 그가 선웃음을 지었다. “계속 우리끼리 했거나 너까지 프로젝트 팀에 합류했다면 다 망쳐버렸을 거야. 완전히, 아주 개박살을 냈겠지.”

나는 이를 악물며 애써 웃었다.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계산기 때렸지. 사업을 지속하는 것과 팔아넘기는 것 중에 어느 게 이득일지.”

“예상은 했다만, 정말 뻔뻔하네.”

“당당하다고 해 줄래?”

“나랑 상의했어야지.”

“상의? 네가 상의할 정신이나 있었어?” N이 온더록스 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말했다. “사업이 망해서 네가 폐인이 된 게 아니잖아. 네가 폐인이라 사업이 망한 거지.”

“망하지 않았어. 네가 팔아넘겼지.”

“망할 거였어, 분명히. 대표란 녀석이 날마다 술 처먹고 열등감으로 팀 분위기 다 조져놓고…… 애들이 너 때문에 얼마나 눈치 본 줄 알아?” N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가 선심 쓰듯 말을 이었다. “뭐, 망한 게 네 탓만은 아니야. 애초에 우리가 대기업 상대로 이길 덩치는 아니었잖아? 빨리 팔아치우는 게 상책이었어.”

“너 이 새끼,”

“왜 화를 내는 거야? 사업 팔아넘긴 돈을 나 혼자 썼어? 아니잖아.”

“너도 찔려서 숨긴 거잖아. 아니야?”

“숨겨? 내가? 방해될 테니까 말 안 한 거야. 사업에 목숨 건 놈인데 당연히 팔면 안 된다고 들겠지. 질질 끌어봤자 우리한테 무슨 득이 되는데?”

“방해? 납득할 만한 대안이면 당연히 네 말에 따랐겠지. 방해될까 봐 상의도 안 한다는 게 말이 돼?”

“그러게. 이렇게 납득할 줄 알았으면 진작 얘기할걸 그랬다야. 근데 지금의 너라 납득하는 거지, 그때의 넌 게거품 물고 반대했을걸.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데 눈깔 뒤집혀 있었잖아.”

“그래.” 나는 마른입술을 혀로 축였다. “백 번 양보해서 그때는 그렇다 쳐. 상황이 다 끝난 뒤에는 얘기해 줬어야지.”

“뭐 하러 얘길 해? 알아봤자 이렇게 열이나 내는 게 다잖아. 돈 받았고, 그 돈 함께 썼고, 그럼 된 거지. 알든 모르든 달라질 건 없었어.”

“도대체 네가 왜 내 인생을 결정하는데?” 참다못해 언성이 높아졌다. “넷이 다 같이 프로젝트에 들어가도 됐잖아.”

“프로젝트 담당자가 누군지 몰라? 너를 잘도 받아줬겠다야.”

“깽값 먼저 치른 게 누구였는데? 일부러 그랬지?”

“안 치렀어도 패 죽였겠던데 뭘.” N이 술잔을 든 손을 짧게 내저었다. “접시 메다꽂을 때 상황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어. 내가 화장실에 조금만 늦게 들어갔으면 넌 이미 그놈 멱따고 있었을걸.”

“그때도 이미 사업을 팔아넘길 생각이었지?”

“고민하고 있었지. 그때가 분기점이긴 했어.” N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도대체 이런 대화를 왜 하는 거야? 안 지루해? 게임 끝난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뒷북을 쳐?”

“게임?”

“그래. 대표씩이나 되는 놈이 언제까지 정신 못 차리고 살까 싶었어. 실체적 진실을 찾을 눈은 남아 있나 했지. 근데 없더라. 투자자들 다 빠져나가고 사업이 곤두박질 쳤는데도 넌 끝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 너와의 게임은 그때 끝난 거야. 이제 우린 같은 팀인데 왜 이렇게 나한테 대립각을 세워?”

“내 인생을 가지고 게임을 해? 너 제정신이야?” 내가 소리쳤다. “사업을 계속 했더라면 아니, 다 같이 프로젝트 팀에라도 들어갔다면 내 인생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어.”

“남 밑에서 일하기 싫다고 우는소리 하던 건 잊었나 봐? 뭐, 그것도 네 주제를 모르고 한말일 테지만.” N이 잔을 들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판단력 떨어지는 건 여전하네. 대기업엘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남으시려고? 네가 우리 팀에 속해 있었던 건 순전히 네가 가져온 사업 아이템 덕분이었어. 아이템을 팔아넘겼는데 네가 가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N은 상체를 숙여 내 얼굴에 눈높이를 맞췄다. “없어. 없다고. 능력도 없는 새끼가 밀림에 뛰어들려고? 용기는 가상하네. 보통 그런 애들이 빨리 죽지만.”

“만석이처럼?”

“훅 치고 들어오네.” 녀석이 허리를 다시 곧추세우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맞아. 근데 너랑 만석이를 능력으로 비교하는 건 좀, 밸런스 차이가 심하긴 해, 그치?”

“셜록은 만석이가 안 죽었을 거라 하던데.”

“하여간” N이 실실 웃었다. “까졌다고 자부하는 새끼들이 알고 보면 순진해 빠졌다니까. 웃기지 않냐?”

“웃겨? 셜록은 끝까지 널 믿었어. 적어도 사람은 죽이지 않았을 거라고.”

“내가 믿어달라고 빌었냐? 됐고, 만석이는 없애야 했어, 우릴 위해서. 잘 알잖아.”

“좆까, 관음증 변태새끼야.” 나는 일어나 주머니에서 유에스비를 꺼내들었다. “셜록 명의로 초소형 카메라 구매 내역까지 확인했어. 건전지로 작동하고 실시간 확인까지 되더라? 불고기에 약이라도 탔냐?”

N이 익살맞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자극과 감각에 미친 새끼가 재미로 살인하는데, 보이지도 않는 데서 굶겨 죽인다는 건 너무 밋밋하잖아. 칼로 쑤시는 게 더 그럴듯하지.”

“재미로 죽인 건 아니야. 필요에 의해서였지만 그냥 보내기엔 아깝잖아.”

“그래서 카메라를 설치했다? 남 죽어가는 거 보니까 짜릿하디?” N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나 발작하는 영상도 있던데 재미 좀 봤어? 딸딸이라도 쳤냐, 씨발새끼야?”

“시청각적인 자극만으론 아쉽긴 하더라. 죽음의 감각이 궁금했거든. 어쩌겠어? 너도 먹여 살려야 하는데, 당장 내가 죽을 수는 없잖아.”

“닥쳐, 개새끼야.” 멱살을 한손으로 쥐고 놈의 눈앞에 유에스비를 치켜들었다. “당장 경찰서로 갈 거야. 가서 네가 한 짓들 다 밝힐 거야.”

“좋아. 나란히 감방생활 해 보자고.” N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나란히? 아, 그래. 마약사범? 나도 들어가지 뭐. 씨발, 너랑 이렇게 사는 것보다 더한 지옥도 없어.”

“말 섭섭하게 하네, 진짜.” N이 내 손을 뿌리쳤다. “정말 기억 못 하는 거야?”

“뭘?”

“따라와. 보여줄 테니까.” N이 바 테이블로 돌아가서 위스키를 병째 들고 방을 나섰다. “오라고.”

미심쩍은 마음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N은 오른쪽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문이 없고 불도 꺼져 있어 캄캄했다. 어둠에 눈이 적응하도록 기다렸다. 그때 무언가를 조작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틱, 하며 작고 푸르스름한 불빛이 켜졌다. 스크린에 빔 프로젝터 불빛이 영사됐다.

“뭔데?” 내가 물었다.

“기다려 봐.”

영상은 이동하는 봉고차 안에서 시작되었다. 네댓 명의 떡대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차창 밖으로 우거진 나무들이 카메라에 잡혔다. 곧 숲속에서 차가 멈추고 모두들 내렸다. 카메라는 차 뒤쪽으로 돌아갔다. 떡대들 중 한 명이 트렁크를 열자 안에 큼지막한 마대자루들이 보였다. 그때 누군가 “내가, 내가!”하고 소리쳤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화면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나였다. 화면 속 나는 흐느적거리면서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쇼핑하듯 마대자루를 이것저것 들어보더니 가장 묵직해 보이는 것 하나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화면 밖으로 나갔다.

카메라가 나를 쫓아갔고, 영상을 보던 나는 주저앉았다.

화면 속 내가 마대자루를 안고 저벅저벅 걸어간 곳은, 약에 취했을 때 꿈속에서 본 호수였다.

나는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거, 설마……”

영상의 내가 호수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맞아.” N이 말했다. “만석이야.”

“내가, 내가, 만석이를 저렇게 번쩍 들었다고? 말이 안 되잖아.”

“말이 돼. 저건 몸통이거든.”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렸다. N을 돌아보았다. 그는 담뱃불을 붙이더니 확인 사살하듯 어깨를 손날로 긋는 시늉을 했다. “말했잖아. 시청각적 자극만으로는 아쉽더라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이 막혀왔다. 주저앉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발작적으로 얼굴에 가벼운 마비가 왔고, 팔에 이물감이 들어 연신 쓸어내렸다. N이 내 곁에 쪼그려 앉아서 얼굴에 담배연기를 뿜었다. 켁켁거리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도 같이 했잖아. 톱질에 소질이 있던데.” 그가 웃었다.

화면 속의 나는 수면이 허리춤에 닿을 때까지 계속 걸었다. 누군가 영상 속에 불쑥 뒤통수를 내보이며 호숫가로 달려갔다. 형님, 그만 가요. 거기 던져요. 녹색 뒤통수. 뽀리였다.

“셜록은 몰라. 너랑 나 사이에 뒀더니 그새 입이 싸졌더라고. 일처리에서 제외시켰지.” N이 내 뺨을 손바닥으로 톡톡 쳤다. “유에스비에 담아줄게. 가지고 경찰서에 가.”

“그럴 리 없어, 그랬을 리 없어, 내가……”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입이 마르고 가쁜 숨이 혀뿌리 근처에서 자맥질했다. 차가운 발목. 종아리. 호수 깊이 걸어 들어갈 때의 냉기가 다리를 조여 왔다. “너, 너 그러면 안 돼. 안 되는 거야. 어떻게 네가, 네가 씨발 나한테 저런 걸, 어떻게…….”

“내가 저러도록 시켰다고? 약을 먹이고?” N이 내 턱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저거 안 보이냐? 네가 신나서 들고 갔잖아.”

“네가 부추겼잖아. 찌한테도 그랬지. 걔가 어떻게 사는지 알아?”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평생 스스로 낙인찍으면서 속죄하고 살아. 네가 벌인 일 때문에!”

“찌?”

N은 나를 한참 노려봤다. 뭔가 캐낼 눈동자로. 그러더니 위스키를 병째 몇 모금 마시고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넌 어떻게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왜 사람들을 네 맘대로 가지고 놀려 들고,”

“내가 뭘 어쨌는데!” N이 언성을 높이며 내 말을 가로챘다. “씨발, 사람 쪽팔리게…….”

“뭐?”

“그걸 왜 다 기억하고 있어? 응? 그걸 왜 아직까지 믿고 있냐고, 이 등신새끼야.” N이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 고개를 들어올렸다. “다 거짓말이잖아. 전부 내가 지어낸 얘기잖아. 딱 들어보면 몰라?”

나는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나도 중학생이었어. 너희랑 똑같은 중학생. 고작 열여섯 살이 무슨 그딴 일을 계획하고 판을 벌여?”

“다 거짓말이라고?”

“그래!” N이 벌떡 일어나 내 멱살을 움켜쥐고 왼쪽 방으로 갔다. 팔다리에 힘이 빠져 질질 끌려가다 불빛 아래 내동댕이쳐졌다. “난 그냥 놀려고 애들 불러 모은 거야. 씨발, 왕따새끼 맨날 처맞고 살길래 애들이랑 좀 친해지라고 데리고 간 거고. 집에도 가끔 오던 애니까. 씨발 근데 일이 그 꼴이 될 줄 누가 알았어?”

혼란스러웠다. 십여 년간 믿고 있던 견고한 이야기가 부서지고 뭉치길 반복했다.

“잠깐, 잠깐만.” 내가 중재하듯 손을 들었다. “친해지자고 걔를 데리고 갔다고?”

“왜? 못 믿겠냐? 못 믿겠지, 너한테 난 개새끼니까.” N이 바 테이블에 다가가 걸터앉았다. 술병들이 위태롭게 흔들리다 자리를 잡았다. “찌랑 연락이라도 했나 보네. 내 얘기하디? 나 때문에 지 인생 조졌대?”

아니. 찌는 펜션 사건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묻지 않았기에.

“아니겠지. 다 지가 벌인 일이니까.” N이 대신 대답했다.

나는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 그를 향해 바로 섰다. 흥분으로 숨이 가빠졌다.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그럼 왜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N은 창가 쪽을 보며 위스키를 병째 몇 모금 마셨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 그러면 내가 뭐라도 좀 된 것 같아서. 왜? 같잖냐?” N이 허탈하게 웃더니 나를 쏘아보았다. “난 평범한 애였어. 날 추켜세운 건 얼치기 같은 너희였잖아. 그래.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에 어머니는 잘 나가는 변호사다. 그게 뭐? 나랑 뭔 상관인데. 돈도 좀 있고 머리도 잘 돌아가고 언변도 좋다. 그게 뭐? 뭐가 그렇게 특별할 일인데? 뒤에서 잔뜩 소문이나 만들어내고, 대단한 인물이라도 난 것 마냥 호들갑 떨어대고, 선의와 호의로 한 행동들도 뭔 속셈이 있는 것 마냥 죄다 의심하고. 그거 다 너희 신나자고 그런 거잖아. 아니야? 그래, 까놓고 말해서 나도 장단 맞춰 주다가 흥도 났고 춤까지 췄다. 그게 내 잘못이냐?”

할 말을 잃었다. 고작 그런 이유였다고?

“자, 내가 누구 인생을 말아먹었다고? 찌? 너?” N이 바 테이블 위에 있던 지갑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너희가 뻑하면 대는 핑계, 씨발 나도 좀 대 봐? 날 이렇게 만든 건 얼치기 머저리 같은 너희들이야.”

나는 천천히 다가가 N이 집어던진 것을 주워들었다. 여행을 준비할 때 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이었다. 근엄하고 비장한 표정의 N과 그의 어깨를 쥐고 등신 같은 표정으로 뒤에 서 있는 나. 나는 생각했다. 특별함의 양식에 대해. 폭력과 잔인성에 환상을 심어 소년들의 누아르를 그린 최초의 사람에 대해. 정형화된 반항으로 청춘의 얼굴들을 복제하게 만들어낸 아이러니에 대해. 그걸 믿고 비뚤어진 영웅을 선망하는 수많은 아이들에 대해. 그딴 게 추억이라고 누가 그래? 이런 말을 누가 했더라.

그러나 여전히 마음이 석연찮았다. 말로 표현 못할.

“난 아니었어.”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난 너한테 그런 모습 바란 적 없었어.”

“맞아. 난 네 관심 밖이었지.” N이 가식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래서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 친해지고 나니 똑같았지만.”

나는 N이 걸터앉아 있는 바 테이블로 다가가 사진을 지갑 옆에 두었다. N이 위스키 병을 건넸다. 나는 몇 모금 마신 뒤 테이블에 병을 올려놓았다.

“믿지 않는구나.”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N이 말했다. “하긴, 나 같은 씹새끼한테 선의나 호의, 우정 따위가 웬 말이냐. 씨발, 나만 친구라고 생각했지, 나만.”

친구, 친구, 정말 역겨웠다. N을 쏘아보았다.

“넌 날 보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어때서?”

“씨발, 만석일 죽이고 날 가둬놓고서, 이제 와 가지고 어깨동무하고 같이 비행기라도 타길 바라는 거야?”

“넌 뭐가 그렇게 떳떳한데? 나한테 약 먹인 것도 모자라 주삿바늘까지 꽂았으면서. 계산도 안 하고 투약하는 바람에 난 뒈질 뻔했어, 알아?” N이 팔뚝을 걷었다. 희미하게 주삿바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람 치졸하게 만들지 마. 난 다 잊었어. 아까 줄줄 읊어대던 어릴 적 얘기도, 네가 나한테 약 먹인 것도, 네가 이 지랄만 떨지 않으면 난 생각도 안 하고 살아. 넌 늘 네 삶이 어디서부터 망가졌는지 되짚어보고 엉터리 서사나 만들어대지만, 난 그딴 거 신경도 안 써.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까만 생각하지.”

“살아온 나날들이 한 인간을 만드는 거야. 과거를 돌이켜봐야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거고.”

“과거?” N이 크게 웃더니 뭔가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존나게 중요하지. 뭐라더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창문도 없는, 밀폐된 지하실 같은 공간을 가지고 있어요, 안 그래?”

“뭐라고?” 나는 뒷걸음질 쳤다. “네가 그걸 어떻게……”

“지하실에선 트라우마가 정말 미친 듯이 발현되던데?” N이 불현듯 울상을 짓더니 한쪽 팔을 휘두르며 엄지로 리모컨을 마구 누르는 흉내를 냈다. “켜지 마, 켜지 마, 꺼! 꺼!”

영상. 유에스비에 담긴 지하실 영상. 내가 발작을 일으켰을 때 했던 행동이었다. 소음과 악취가 미세하게 따라오는 기분.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았다. “한 마디만 더 해라.”

N이 내 어깨를 잡고 눈을 부라리며 웃었다. “너 정말 컨테이너에서 아무 짓,”

“이런 씨발새끼가!”

N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의 머리채를 잡고서 연거푸 더 갈겼다. N이 비틀거리며 바 테이블을 짚었다. 테이블과 함께 술병들이 크게 흔들렸고 두어 병이 떨어져 깨졌다. N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가가 그의 멱살을 쥐었다.

“개새끼야, 웃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데?”

“그럼 씨발 울까? 재미 좀 느끼면 어때? 감정도 한낱 자극일 뿐이야.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우리 꼴을 봐.” 나는 멱살을 쥔 채 이를 악물었다. “끝없이 자극만 찾아대면서 꿈꿨던 삶이 이런 모습이야? 너, 넌 친구까지 죽였어. 여기서 안 멈추고 무슨 짓을 더 벌이게? 죗값을 어떻게 치르려 그래? 이 모든 일을 떠안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려고 그래?”

“죗값? 절대 치를 일 없을걸.” N이 비실대며 웃었다. “죗값 치를 작정이었으면 유에스비 들고 당장 경찰서에 갔겠지. 넌 또 도망칠 거야. 그리고 잊어버리겠지. 네가 살인에 가담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테고, 나중에야 문득 생각할 거야. ‘아니, 내가 그 일을 잊어버리다니.’ 그렇게 죄책감에 시달리다, 그걸로 끝이지. 너 같은 새끼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죄의 대가라고, 죄의식과 자괴감에 며칠 몇 달을 바치고서는 속죄라도 한 것 마냥 합리화하잖아. 나중에 누군가가 진상을 추궁해오면 이렇게 지껄일걸. ‘나도 괴로웠어. 내 삶도 가꾸지 못하고 망가졌어.’ 좆까. 실은 이 정도 힘들었으면 됐지, 그렇게 생각하잖아?”

나는 욕을 하며 N의 얼굴을 연거푸 갈겼다. 녀석의 입가에 피가 터졌다.

“젠장, 더 때려 봐. 더 때려.” N이 비틀거렸다. “난 개새끼니까, 너한테도 무슨 좆같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겠다, 그렇지? 응? 네 인생 조지려고 너랑 친해진 거야. 네가 바라는 게 이런 거지?”

한 번 더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나뒹구는 N을 내버려두고 소파를 연거푸 걷어찼다.

“그래. 예전부터 궁금했어.” N에게로 돌아섰다. “왜 나야? 다른 새끼들 널리고 깔렸는데 왜 나를 끌어들인 거야?”

“씨발, 똑같은 질문 지겹지도 않냐?” N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친구니까. 왜 이렇게 사냐고? 자극이 되고 재밌으니까.”

“고작…… 정말 고작, 씨발……”

“왜? 삶의 모든 선택에 어떤 거창한 철학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인생은 철학이 아니야. 거대한 실험이지.” N이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물론 실험에도 철학은 존재해. 하지만 복잡하고 고상하지 않아. 단순하고 저열하지. 그 어떤 숭고한 인식도 뿌리는 진창에 내리며 자라는 거라고.”

“네가 만든 진창에서 계속 뒹굴어 봤자 얻는 건 막장 인생뿐이야.”

N이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너도 때리니까 피가 끓지? 살아있다는 걸 느끼지? 우리가 살아있음을 일깨워주는 게 아니라면 철학이 무슨 쓸모가 있냐?”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거야.”

“으, 씨발. 한 마디 한 마디 진부해서 못 들어주겠네.” N이 피로 얼룩진 이를 드러내며 빈정거렸다. “넌 되도록 떠들지 마라. 등신새끼가 지 아가리로 지 가치를 못 살려.”

“가치?”

“그래, 가치. 넌 어릴 때부터 남다른 영감을 가졌었어. 그걸 표현해내는 데 젬병이라 그렇지. 넌 그냥 영감으로서만 존재하면 돼, 그게 너의 훼손되지 않는 가치니까. 네가 원하는 거, 바라는 거, 꿈꾸고 재밌어하는 거 내가 다 이뤄주잖아. 나만큼 네 인생을 재미있게 써낼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 다 즐겨놓고 이제 와서 왜 불만이야?”

“내가 바란 건 이딴 저질스러운 삶이 아니야.”

“좆까고 있네. 삐까뻔쩍한 사업가의 길 깔아 줬더니만 보기 좋게 걷어찬 인간이 누군데.” N이 비웃었다. “그래. 숭고하기 그지없는 너는 이제 뭐 해먹고 살 건데? 돈도 기반도 없는 네가 뭘 할 수 있어?”

“그놈의 돈, 돈, 씨발, 그거 때문에 너한테 개처럼 끌려 다니는 것도 이제 지겨워.”

N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고작 생각한 게 그거야? 내가 널 돈으로 묶어서 지배하고 꼭두각시처럼 가지고 놀았다는 거? 그래. 지금까지 널 위했으니까 끝까지 위해 줄게. 네 인생을 망친 악당이 돼 주지 뭐. 중학생 때부터 의도적으로 너랑 친해졌고, 일부러 같은 지역으로 대학도 갔고, 치밀하게 사업을 망친 뒤 널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 심리적으로 지배했어. 결국 방탕한 생활과 무기력에 젖게 해서 널 폐인으로 만들었지. 씨발, 할리우드에서 판권 사가겠네. 이 중에 사실은 단 하나뿐이야. 내가 사업 팔아넘긴 거. 그것도 네가 좀 더 빨리 정신만 차렸다면 충분히 막았을 테고, 그럼 나도 주저 없이 널 도왔을 거야. 난 사업을 망칠 생각이 아니라 널 정신 차리게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넌 너를 망친 거대한 음모가 있다고 믿고 싶지? 그게 없다면 망가진 네 인생은 그저 네가 등신새끼인 탓이라는 건데, 그걸 인정하긴 싫은 거지.”

“계속 입 놀려라.” 나는 이를 악물었다.

“좋아. 네 생각대로 내가 정말 잔악무도한 새끼라면 아버지도 내가 죽였겠네.”

“뭐?”

“아버지. 우리 사업 딱 망했을 때 돌아가셨잖아.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지 않아?” N이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정황상 아버지가 우리를 살린 건 맞지. 네가 행사에서 깽판 친 덕분에 사업을 헐값으로 넘기게 됐거든. 당장 우리한텐 돈이 필요했는데, 아버지가 딱 죽어줬네? 재밌는 얘기해 줄까? 다른 집들은 피 안 섞인 사이는 부부뿐이라는데, 우리 집은 자식새끼도 피가 안 섞였어. 내 어머니는 대단한 변호사고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 어때? 변호사인 어머니가 내 인생에 좋은 비상구가 돼 주지 않았겠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내뱉는 N의 모든 말들이 백짓장처럼 여겨졌다. 오늘 들었던 이야기부터 십수 년 간 들어온 모든 이야기들이 차례차례 표백되듯 새하얘졌다. 나는 더듬더듬 뒷걸음질쳤다. 섬망을 앓듯 머리가 창백하게 질렸다. 그가 평생 떠든 말들 중에 진실이란 게 있을까? N은 정말 펜션 사건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망가진 나의 삶에 N의 의도가 있기나 한 걸까?

“널 살린 건 나야.” N이 말했다. “고마워하진 않더라도 미워하진 말아야지. 네 곁에 누가 남아있어? 너랑 함께 있던 사람들은 다 널 떠나거나 망가졌지. 아, 망가진 채 떠난 사람도 있고. 포니테일.”

“입 닥쳐.”

“네 곁에 있던 사람들은 다 그랬어. 만석이도 마찬가지야. 사업만 제값에 팔았어도 만석이가 우리랑 엮일 일은 없었어. 다 너 때문에 끝장난 인생들이야. 나 못지않게 너도 무지막지한 새끼라니까? 모르겠어? 너나 나나, 우리를 견딜 수 있는 건 서로뿐이야.” N이 바닥을 짚고 앉아 나를 쏘아봤다. “두 개의 거대한 서사가 있어. 평생 널 위하던 친구와 어떻게든 멋지게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뜻대로 안 되어 인생이 망가졌다는 서사, 혹은 어릴 적 악의를 가지고 접근한 새끼 하나 때문에 네 인생이 체계적으로 망가졌다는 서사. 원하는 대로 골라서 존나게 합리화해 봐.”

나는 얼굴을 감싸 쥐고 잠시 숨을 골랐다. 바 테이블로 가서 멀쩡한 위스키 병 하나를 따 몇 모금 들이켰다. 속이 화끈거렸다. 바닥에 앉아 있는 N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웠다.

“네 말이 맞아. 그따위 과거가 뭐가 중요하겠어. 난 떠날 거야.”

“어떻게 살려고?”

“적어도 이렇게는 안 살아.”

“그건 전에도 한 말이고.” N이 진절머리 난다는 듯 말했다. “대답은 되도 대책이 안 되잖아. 난 평생 네 곁에서 실패를 봐왔어. 넌 사는 내내 실패할 거야. 나랑 한 여행이 그리워서 결국 돌아오겠지.” N이 내 손을 뿌리치고 내 어깨를 잡았다.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물론 이 말을 듣고 넌 실패를 자각하고, 벗어나려 발버둥 치겠지. 하지만 안 될걸? 실패는 네 머리뿐 아니라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결국 커다란 문제 앞에서 실패도 못 해보고 도망칠 거야.” 그가 내 얼굴을 거칠게 잡으며 웃었다. “아직도 너를 그렇게 몰라? 넌 사람답게 살려고 날 떠나는 게 아니잖아. 내가 없어야만 비로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망가진 삶을 즐길 수 있으니까 그런 거지. 넌 늘 바닥을 치고 네 자신을 연민하고 싶어 했잖아.”

거기까지였다. 나는 욕설을 퍼부으며 N을 죽어라 팼다. 열에 받쳐, 악에 받쳐, 얼굴에서 피가 쏟아지고 숨도 못 쉬도록 팼다. N은 반격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발길질을 멈췄을 때 입에서 피를 진득하게 흘리던 N이 뭐라 중얼거렸다. 웅얼거리는 소리는 그가 방구석으로 기어가며 점차 분명히 들려왔다. 자극이 안 된다고, 공허한 목소리로 분명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N은 바 테이블 밑으로 기어가 술병 파편을 들고 팔을 긋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N의 팔뚝이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나는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광기에 잠식된 그의 모습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기괴했고 기이한 황홀을 느낄 만큼 화려했으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그의 심연은 무서우리만치 텅 비어 있었다.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언젠가는 삶의 전부에 깃들어 있던 유일한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N이 유리조각을 양손에 쥘 때 나는 그곳에서 도망쳐 나와 산 아래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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